Thomas Vinterberg "Another Round", 2020
나는 이 영화를 이모집에서 처음 봤다. 중년을 지나 노년을 맞이한지 얼마되지 않은 이모는 이 영화를 극찬했다. 배우들이 연기를 잘하니 배우인 너는 꼭 봐야한다며 반강제적로 넷플릭스를 켜주셨다. 내가 싫어하는 술과 아저씨들을 소재로 한 영화였다. 중년의 고독함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을 다룬 이야기는 20대 아가씨에 속하는 내가 즐겨찾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매우 지루했고 졸렸다. 단 한 장면, 매즈 미켈슨의 춤사위를 제외하곤. '리듬에 몸을 맡긴다'는 게 이런 걸 보고 하는 말이란 걸 깨닫게 해준 그의 춤사위는 아주 가끔씩 내 머릿속을 스치곤 했다. 언젠가 그 장면을 제대로 이해하는 날이 오길 고대하며 묵혀두다가 얼마 전, 다시 영화를 재생시켰다. -알고보니 그는 배우가 되기 전 직업댄서였다고 한다-
2회차 관람에서는 지루하다기보단 슬펐다. 나는 아주 조금씩 아저씨들의 삶에 젖어들었고 '짠하다'라는 표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딱 싫어하는 아저씨들의 고함소리마저 조금 다르게 느껴졌는데, 이전엔 약자를 누르기 위한 쫌생이 짓이라고 생각했다면, 이 영화에서는 '나도 좀 봐달라'고 울부짖는 처음이자 마지막 포효처럼 느껴졌다.
술은 그들에게 도피가 아닌 하나의 해결책이었다. 이걸 알게 된 이상 찌질하다고, 겨우 생각해낸 방법이 그거냐고 욕할 수도 없었다. 늘 외면하고 싶었던 우리 아빠, 우리 삼촌의 슬픈 무표정이 떠올랐다. 그 뒤에 숨겨진 삶의 무게를 이 영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들여다보게 되어 좋았다. 거, 참. 모두가 나름대로 외롭다.
술은 연구주제처럼 심오하고 복잡한 놈이 아니었다. 술이 바꾼 그들의 일상은 의외로 간단했다. 용기. 먼저 인사를 건넬 용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을 용기, 무언가를 가르칠 자격을 스스로에게 부여해줄 용기,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내뱉을 용기. 작은 용기가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술이 아니라.
영화는 네명의 친구를 조명하고 있고, 특히 마르틴을 조금 더 집중적으로 보여주니 관객으로서의 나도 마르틴을 좀 더 집중적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화 중반부부터 묘하게 카뮈가 보였다. 혼자선 오줌도 못누는 늙은 개와 사는 외로운 아저씨말이다. 그는 네명의 친구들 중 마르틴에게 가장 힘이 되는 친구였다. 적재적소에 따뜻한 말한마디와 손길을 건넬 줄 아는 멋진 사람이었다. 정작 자신에겐 술과 담배만 주구장창 쥐어주는 어리석음도 함께 가지고 있긴 했지만... 나는 그가 따뜻한 인간이라 좋았다.
나는 그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꾹꾹 눌러 가슴에 남기고 싶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의 친구들도 나처럼 울지 않았다. 밝은 오후, 장례식이 끝나고 한자리가 빈 테이블에 그들이 둘러 앉았다. 마르틴은 비로소 옅고 굵은 눈물을 몇가닥 흘렸고 나도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은 그들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카뮈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에 즉각적인 용기로 화답했다. 친구들은 춤을 췄고 그 몸짓은 진실로 아름다웠다.
"모범의 대명사 학교선생들의 작은 일탈!"이라는 가면을 쓴 아재들의 생존 몸부림은 쓰라린 성공을 이루었다. 술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이 연구를 통해 얻어낸 일상의 용기는 앞으로의 그들의 삶에 한줄기 빛이 되어주리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용기가 필요한 이 세상의 모든 짠한 이들을 위하여! Skå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