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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바다에 누워 Sep 17. 2021

이렇게나 사랑이 넘치는 ‘슈퍼을’, 그게 바로 나예요

문래동 기획회의 10.


친구와 선배들은 내 연애를 보고 항상 입을 모아 이야기 했다.


“너, 그렇게 하면 너한테 금방 질려.”


그 말을 듣고 난 후부터 내 연애에 마침표가 찍히면 ‘나는 질리는 사람이야.’라는 필수 옵션 같은 절망을 했다. 연애가 끝난 것도 내 탓인 거고, 남자가 질린 것도 그건 그냥 ‘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땐 그랬다.


연애라는 걸 제대로 알게 된 건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이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그때까지 봐왔던 ‘보편적인’ 드라마 여주인공의 성향과 정반대인 삼순이라는 캐릭터를 보고 ‘저런 게 연애구나’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내 이름은 김삼순



자신과 과거 여자친구 희진 사이에서 갈등하는 삼식이에게 ‘너 가.’ 라는 냉정하고 차가운 말을 내뱉고, 어떤 갈등의 장면에서도 삼순이는 삼식이에게 절대 압도되지도, 마음 휘둘리지도 않는다. 그런 자신감과 당당함을 보여주는 그 드라마야 말로 진짜 연애의 정석이라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당당하지도, 자신감이 넘치지도 않았다.





더 많이 좋아하는 쪽이 '을'인가요





매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을 했다. 남자친구가 힘들면 그 힘든 마음과 투정을 다 받아줘야 진정한 여자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항상 남자친구보다 한 발자국 앞서 나가있었다. 친구들은 자신들 데이트 시간에 10분~30분이나 늦으면서도 ‘여자는 신경 쓰고 꾸밀 게 많잖아.’라는 핑계로 ‘여자는 그래도 돼.’라고 이상한 합리화 같은 걸 했었다. 그 말을 철저하게 거르고 나는 약속시간 보다 항상 10~30분 먼저 나가 남자친구를 기다렸는데 매번 약속에 30분~1시간 정도 늦었던 남자친구는 오래 기다려서 울상인 나를 보고 이 한마디를 했었다.


“그럼 너도 30분 늦게 나오면 되잖아.”


오래 기다렸지, 미안해 라는 말도 아니었다. 그 순간 ‘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 네가 잘못한 거야. 라고도 따지지 못했다. 그때는 그렇게 따져 묻듯 이야기 하면 ‘나 보러 멀리까지 나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잘잘못 따지려고 하면 상처 받을 거야. 상처 주지 말자.’ 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참고, 꾹 참았다. 그땐 그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라 생각했었으니까.


이후 그 친구는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그 친구는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사람을 위해 약속 시간 30분 전에 항상 나가 기다리고, 데이트가 끝나고 항상 집에 데려다주고, 자신의 친구들 모임에도 매번 동행하며 눈에서 꿀이 떨어지더라 라는 소식을 전해 듣게되었다.


반대로 나에게 있어 그 친구는 약속시간에 30분~1시간 늦는 것은 기본이었고, 내가 5분~10분 정도 늦었던 날이 만나면서 딱 한 번 있었는데 ‘왜 이렇게 늦게 와, 배고파 죽는 줄 알았잖아.’라는 온갖 구박과 짜증을 듣기도 했었다. 데이트가 끝나면 집이 멀다는 이유로 지하철 역에서 각자 손을 흔들며 헤어졌고, 친구들 모임이 있기에 나도 가도 되느냐 라고 하니 여자는 안 껴줘 라는 소리를 하며 상황을 회피했다. 눈에서 꿀 떨어지는 거? 연애 초기엔 그랬겠지? 라는 회상을 해봤지만 썩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다. 함께 있을 때면 항상 휴대폰 게임을 했고, 누가 그렇게 불러내는지 나와 데이트를 하다가도 뭐 더 할 거 있냐 물었고 없다고 대답하면 친구들을 만나러 가겠다고도 했다.


내게 연애라는 건 매 순간 최선을 다 하고, 온 마음을 진심으로 한다면 언젠가 통할 거라 생각했었다. 나에 대한 상대의 온도가 미지근한 정도여도 정성을 다한다면 그 온도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개코딱지같은 소리였다. 그때의 나는 철저하게 을이었던 거고, 나는 그저 그 친구에게 심심할 때 부르면 언제든 달려 올 수 있는 사람이었고, 언제든 돌아서면 기다리는 사람이었던 거다. 내 친구들은 내가 다 해주었기 때문에 너는 당연히 그래도 되는 사람이라 생각한 거라고. 단 한번도 튕기지 않았던 내 잘못이고, 너무 많이 좋아한 내 잘못이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되짚었다. 왜 더 좋아하는 쪽이 항상 아파야 하고, 그런 나는 왜 항상 을이 되어야 하는가. 라고.





그래도, 내 마음 크기에 충실할래요





언제부턴가 모두의 연애 앞에 ‘갑’과 ‘을’이라는 관계적인 단어가 형성된 것이 퍽 불편했다. 사랑만 하면 되지 왜 그 사랑을 크기로 재단하고 마음의 비중을 두는 거지? 왜그렇게 갑을 관계로 정의까지 하는 거야? 라고 말했던 그 불편러가 제대로 을이었던 거다.


사실 아직까지도 연애에서 갑과 을을 따지는 걸 매우 불편해하는 편이다. 그렇게 당해놓고, 그렇게 겪어놓고도 여전히 나는 (철딱서니없는)낭만주의에 가깝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거지. 뭐 그렇게 갖다 붙이는 게 많아.’라고. 그럴 때마다 친구들과 선배들은 내 등짝을 후려치며 말한다.


“먼저 연락하지 말고, 먼저 보고싶다고도 하지마. 약속시간에 너무 딱딱 맞춰 나가지도 말고, 좋아하는 마음을 먼저 들키지도 보여주지도 마. 상대가 너한테 열 개의 마음을 보여주면 너는 그때 세 개 정도 보여주면 되는 거야.”


을로써 절망했던 과거의 나라면 저 말들을 마치 수학의 정석처럼 연애 매뉴얼로 머릿 속에 고정해 두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먼저 말할 거고, 보고싶으면 보고 싶다고 먼저 찾아가기도 하고, 약속시간에는 언제나 그렇듯 여유롭게 먼저 나가 사람들 속에서 걸어오는 상대의 모습을 보며 행복해 할 거다. 내가 이만큼 더 좋아해 라고 내 마음의 크기를 언제든 보여줄 거고 상대가 열 개의 마음을 주면 나는 오십 개의 마음을 건네기도 할 생각이다.


연애에 있어 미묘한 줄다리기 같은 게 아주 필요없는 건 아니지만 요즘의 나는 그냥 내 진심 하나만 믿기로 했다. 내 마음이 순도 100%의 진심이라는 걸 알아주는 놈이 아니라면 지겨워져서 일찍이 떠나겠지만 반대로 그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진짜 어딘가에...).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줄 그런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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