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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바다에 누워 Sep 17. 2021

지금 당신이 '을의 연애'를 하고 있다면

문래동 기획회의 09.

어떤 관계에서, 특히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서 '갑'이 있고, '을'이 있는 게 말이 될까?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을'이라는 입장을 실제로 경험해본 사람은 수두룩하다. 그러니 세상 어딘가에는 이런 관계도 분명히 '존재'는 한다. 그래서 '갑'이 어딨고 '을'이 어딨냐 하는, 언어의 어원을 찾아올라가듯 본질적인 문제를 파고드는 머리 아픈 논쟁은 일단 접어두려고 한다. 그런 건... 누군가에겐 있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없기도 한 것이니까.



'을'로서 하는 연애는 일종의 짝사랑이다.


아니, 차라리 짝사랑이 나을 수도 있다. 짝사랑은 '그'에게 뭘 바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운한 것도 없다. 혼자의 감정이므로 상처받을 일도 극히 드물다. 드러내지 않으면 그뿐이니까. 하지만 연애는 다르다. 연애는 같이, 서로, 둘이 하는 것이다.

을의 연애. 그것은 둘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그 안에 하나의 알맹이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혼자면서 외로운 것과 둘인데 외로운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 물론, 인간은 어차피 외로운 존재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연애를 왜 하겠어? 연애할 때만큼은 때때로 '나는 지구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안 외로운 인간'이라고 착각해보기도 하고, 태어날 때부터 외로움이나 쓸쓸한 감정은 애초에 배워보지도 못한 것처럼 굴기도 하고 뭐 그러는 거지.

그렇다면 지난 날, 찢어지게 마음 바친 짝사랑 1년과 마음을 게속 찢으면서 임했던 '을'의 연애 1년 중 언제가 더 힘들었을까. 어느 쪽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했을까.

아, '완전히' 후자다. 명백하게 후자가 더 힘들었지만, 확실하게 더 행복했다. 그래도 '같이'한 행복한 기억이 더 많으니까. 어쨋든 내가 그의 '무엇'이라도 될 수 있던 시간이었으니까.  

참 등신같다. 그래서 이것이 '을의 연애'라는 것이다.


을은 종종 생각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내가 더 좋아하게 되었을까. 왜 나만 이렇게 서운할까. 갑이 되고 을이 되는 것은 좋아하는 마음에 비례해 보인다. 더 좋아하는 쪽이 을이라고. 주변 친구들도 그렇게 말한다.



"네가 더 좋아해서 그래."

그럼 왜 때문에 내가 더 좋아하게 된 것인가. 왜 갑은 나보다 더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나를 좋아하지 않진 않잖아? 그랬으면 안 사귀었겠지. 을은 갑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단서들을, 잘해줬던 순간을, 달콤했던 둘의 시간을 지난 날들에서 찾아 끌어모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나를 서운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혼자 화가 났다가 혼자 다시 그를 용서한다. 10번 울게 해도 1번 웃으면 행복한 을은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그의 전화 한 통에 다시 모든 게 괜찮아진다.


내가 '을'이었을 때,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집 앞 실내 포차에 앉아 주구장창 친구에게 '그에 대한 서운한 점', '그는 왜 그러는 걸까?', '그렇지만 그는 나에게 이렇게 노력한다' 등을 1절 2절 3절로 읊고, '연애 왜 이렇게 힘들까' '연애가 인생의 다는 아니지' '난 맨날 왜 이래'를 돌림노래처럼 100번 말한 뒤 집에 들어온 날이었다. 씻고 나와 튼 TV앞에 앉았는데 어떤 심리학자이자 연애 패널로 등장한 사람이 갑자기 나한테 하는 듯한 멘트를 했다.


"당신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을 헷갈리게 하지 않아요. 불안하게 하지도 않아요. 애초에 그사람이 '왜 그럴까'를 친구에게 묻는 일 자체를 만들지를 않아요. 행여나 그런 일을 만들었다면 직접 설명하거나 이해시키지... 당신이 친구에게 달려가게 하지도 않을 거고."


관계에 있어 '을'이 되는 건 내 의지도, 내 계획도 아니지만 을로서의 연애를 계속 지속할지 말지는 의지가 하는 일이다. 나는 내가 '을'임을 알았을 때 한동안 부정했다. 그래서 '나도 너보다 내가 중요해.' '나는 너만 바라보고 있지 않아.' '나도 바빠' 등을 잘 보여주기 위한 행동들을 시전했다.

연애를 했던 기간보다 안 했던 기간이 더 길었던 나로서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주변에 같이 놀 친구들을 널려 있었고, 할 것도 많았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친구와 멀리 여행을 가고 일도 많이 했다. 퇴근하고 종종 연락을 안 하고, 언제 볼 건지, 이번주에는 어디 갈 건지 같은 것도 먼저 묻지 않았다. 그리 올바른 방향은 아니지만, 새로운 남자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자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약간의 복수 같은 것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해봤자 을의 마음은 썩 통쾌하지 않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어느정도 취하면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고, 내가 뭐하는지 별 관심 없는 그가 야속해서 술을 더 많이 마시는 일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친구와 여행을 가서도 '남자친구를 두고 왜 나는...'이나 '그랑 왔으면 좋았을텐데' 같은 생각을 하느라 여행에 집중하지 못했다. 새로운 이성과 잠시잠깐이지만 양다리를 걸치는 느낌을 내보려고 해도 '역시 그만한 사람이 없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결국 우리 관계더 악화시키고 나는 나대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꼴이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일까'를 몇날며칠 생각해봤다.

거의 뭐 석가모니가 진리 찾기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렸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 '그 사람'일까? 아니면 '연애'? 그것도 아니면 '그 사람과의 연애'? 그것도 맞았지만, 그것들을 원하는 더 상위의 것이 있었다. 그건 단순했다. '행복하고 편안한 상태'였다. 나는 '행복'하기 위해 그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거고, 조금 더 '행복'하기 위해 연애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을'의 상태란, 더 정확히 말해 '내가 자처한 것이 아닌 '을'의 상태'란, 그것에 완전히 위배되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행복'해지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그사람과 헤어지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세팅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 사람과 헤어질까봐 불안했고, 그 사람이 나에 대한 마음이 식을까봐 전전긍긍했다. '그런 것 같다'는 추측을 가득 품은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서운하고 섭섭하고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좀더 행복하게 만나고 후회 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이렇게 하면 질리려나?' '이렇게 하면 내가 자기를 너무 많이 좋아한다고 생각하려나?' '이렇게 하면 나를 너무 당연하게 여기려나?' 이런 생각을 먼저, 아니 거의 대부분 하고 있었다.



사실 이건 아주 예전에 있었던 일이다


'을'의 경험은 나를 말로 다 할 수 없이 성장하게 했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결정했고 스스로 그 관계를 끊어내는 일은 결코,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내 젊고 창창한 날들을 위해 지금의 내가 나서지 않으면면 안 됐다.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등신같이 굴었지만 그 등신조차 나였기 때문에, 내가 이해해주고 내가 바꿔주지 않으면 영영 그런 관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나는'을'을 졸업하고 나서 다시는 나에게 그런 관계를 세팅하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내 행복을 체크했다. 누군가가 너무 좋아지는 일이 잘 없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가 간혹 생기더라도 '그'가 아니라 '나'부터 생각했다. '그의 마음이 어떻지?'가 아니라 '나는 어떤가? 함께 있을 때 나 그대로의 나로 있을 수 있나?' 같은 것들을 되물었다. 어설프게 어른스럽게 굴기보다 아이처럼 굴 수 있을 때 행복한 나는 반드시 그럴 수 있는 사람을 내 옆에 두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다시 연애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졌지만 상관없었다. 나를 건강하지 못하게 하는 관계는 없느니만 못했으니까. 아마도, 내가 살면서 나를 제일 많이 사랑하고 제일 많이 생각하고 잘 알던 시기가 그 때였지 않을까싶다. 어느 정도였냐면, 매순간 내 스스로가 기특해서 웃음이 나기도 했다.

어느 날은 회사에서 복합기에 인쇄된 인쇄물을 들고 바쁘게 자리로 돌아오다가 문득, '나 되게 괜찮은 사람 같아.'라고 생각했다. 아무 날도 아니었는데 정말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시간이 꽤 지나고 나서도 문득 문득 생각이 난다. 그때의 내가 정말 멋졌던 것 같다고 느끼면서.  


100살 넘은 노인 같은 말이지만, 지나고보니 그 '을'이라는 것 또한 누군가를 향해 '열렬하게' 마음을 다했던 날들의 한 장면이겠지 싶다. 그렇게 좋았을까, 그렇게 대단했을까. 그런 마음을 품었던 것이 정말 나일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또 100살 넘은 노인처럼 말하자면, 혹시 지금 누군가 '을의 연애'를 하고 있다면, 너무 초라해하거나 너무 힘들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널 더 좋아해. 그래서 뭐? 나는 널 더 좋아할 거야."라고 말할 수 있다면(나는 못했지만), 그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슈퍼을'이 되지 않을까. 을도 을 나름인 거다. 또 그쯤 되면 사랑에 있어서는 누가 뭐래도 갑일지도 모르지.

그리고 또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로운 순간이 종종 있다면, 당신은 언제든 그 관계를 끝내고 '을'을 졸업할 수 있다는 것. 많은 눈물과 애달픔이 동반하겠지만, 그 이후의 당신은 스스로의 행복을 지켜내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방실방실 아조씨 | 포차성애자. 소녀 감성과 아저씨 취향 그 사이 어디쯤에서 소맥을 말고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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