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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바다에 누워 Jun 18. 2021

“오늘 우리 아포 갈래?”

문래동 기획회의 02.

배우'였다.

"그곳은 마치 연극 무대 같았고, 그 위에선 우리가 '주연 배우'였다."




술꾼이라고 다 같은 술꾼이 아니고 저마다 취향도 각각이지만, 노상에 앉아 마시는 술이나 누추한 비닐을 열고 들어가 마시는 포장마차 술에 환장하지 않는 술꾼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간판은 허름할수록 좋고 가게는 오래될수록 좋다. 요즘은 의도적으로 인테리어를 허름하게 해놓거나 오래된 가게처럼 보이도록 꾸며놓은 곳도 더러 있다. 뭐, 진짜 노포가 아니더라도 그런 ‘분위기’의 집을 발견하면 ‘아싸’ 소리가 절로 나온다. 아주 방방 뛴다. “저기 갈래, 저기 갈래.” 한 100번 말한다. 남들이 모르는 신상 명품 백을 반값에 발견하면 이런 기분이려나. 아니 또, 이렇게까지 좋을 이유는 뭐냐.


사실 포장마차의 안주들은 그저 그런 맛에다가, 생각보다 비싸기까지 하다. 열악한 환경에서 재료를 준비하고 조리하기 때문에 위생적이기 힘들고, 화장실 상태가 좋은 일은 거의 없다, 사장님들은 친숙하게 ‘이모’로 불리다 보니, 가끔 정말 내 진짜 이모가 되는 것처럼 반말을 하시거나 손님에 대한 예우를 몇 가지 생략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체 이 가격이 어떻게 나왔는지 의문이 드는 금액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로지 현금으로 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그게 포장마차다.


포장마차 오면서 현금 뽑아 오지 않은 자가 죄다. 포장마차 오면서 깨끗한 화장실 찾는 자가 무개념이다. 포장마차에서 번듯한 식당의 친절한 서비스를 예상하거나, 카드 리더기가 있을 거라는 철없는 기대를 했다면 그 사람이 백 번 잘못이다.      

어떤 쉴드도 쳐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 자체로 술맛 돌게 하는 포장마차의 모든 것들이 나는 좋으니까. 그렇게 좋아하는 포장마차들이 열댓 개 줄지어 늘어선, 말하자면 ‘포장마차 거리’를 품고 있던 동네에 살았었다. 요즘 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를 ‘초품아’라고 하던데, 같은 식으로 말하자면 ‘포품동’이다. 포장마차를 품은 동네.


뭐, 그걸 알고 그 동네로 이사를 간 것은 아니었다(내가 아무리 포장마차가 좋기로서니 포장마차 거리를 좇아 이사까지 하진 않는다.). 월급의 1/3을 방값으로 날리느라 허덕이던 홍대 앞 월세살이를 끝내고 전셋집을 얻기 위해 어쩌다 보니 북아현동까지 흘러들게 되었다.

아현역 2번 출구에서 나와 걸을 만하겠다 싶은 만만한 언덕길을 쭉 올라가다 보면 ‘이건 아니지.’ 싶게 가파른 언덕이 시작되는데, 딱 그 직전에 서 있는 빨간 벽돌의 4층짜리 빌라였다. 역에서 가깝고 볕이 잘 들고 친구의 엄마가 집주인이라는 사실에 막연한 안정감을 느껴 그 집에 살기로 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동네 산책을 하다가 나는 ‘할렐루야’를 외쳤다. 아현역 3번 출구에서 5분을 채 걷지 않아 나타난 아현동 포차 거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내 모든 술 약속 장소는 ‘아현포차’가 되었다. 나와 술 마시는 지인들은 모두 한 번 이상씩은 아현포차를 와봤을 정도. 2번 만나고 쫑낸 썸남까지 2번 중 1번을 아포에서 만났으니 말 다 했다.


“아포 갈래?”

이 한마디면 꽤 먼 거리에 사는 친구들도 친히 여기까지 와서 그 누추하고도 볼품없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술 먹기를 자처했다.

술에 알딸딸하게 취해 하늘을 바라보면 떠 있던 달, 너댓명이 왁자지껄 떠들며 끝도 없이 세우던 맥주병과 소주병, 새빨-간 오돌뼈에 어묵탕, 중간 중간 야외 테이블로 나와 말 걸어주던 이모들의 얼굴, 날 밝을 때쯤 막을 내린 불금의 끝에 들러 먹었던 따끈한 우동, 포차 초입에서 바라보면 반짝반짝한 빛이 저 끝까지 줄지어 서 있던 풍경...


‘나와 아포’를 찾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사람 중에는 ‘그 애’도 있었다. 나는 그 애를 친구의 결혼식에서 만났다. 같은 신부 쪽 하객이었고, 나의 친구들과 이미 친구인 아이였다. 우리 무리에 와 같이 앉았고, 결혼식 뒤풀이까지 가게 되었으니 자연스레 말을 트고 ‘친구의 친구’로 만난 친구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표면적인 사실이고, 나는 그 애를 단 한 번도 친구로 생각했던 적이 없다.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한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결혼식 뒤풀이가 끝난 늦은 밤 그 애가 차로 나를 집에 바래다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바로 그다음 날부터 나는 울렁거리는 속마음을 어찌할 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친구의 포지션을 열심히 지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친구’라고 말하며, 반듯한 선을 지켰다. 거의 매일 연락을 하며 일상을 나누면서도 말이다. 우리는 썸이 아니었다. ‘친구’라는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나는 최대한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며 1년 하고도 몇 개월을 그렇게 지냈다. 이유는 너무도 예상 가능하다. 친구 관계마저 깨질지도 모른다는, 친구로 위장한 채 좋아하는 남자 옆에 살고 있는 ‘짝사랑녀’들의 흔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와 친구였기에 그 애 역시 아포에 서너 번 왔었다. 그 애가 온 날은 원래 내 단골집이던 ‘작은 거인’ 이모네를 가지 않고 ‘주연 배우’ 이모네를 찾았다. 고작 포장마차의 간판일 뿐인데도, 배우를 꿈꾸던 그 애에게 그 네 글자는 운명 같은 단어였다.

우리가 친구가 된 지 3개월 정도 지난 어느 겨울날, ‘주연 배우’가 오픈을 하자마자 첫 손님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야장을 깔 수 없는 추운 겨울에는 어쩔 수 없이 작은 실내로 들어가야 했는데, 기껏해야 5명 정도 앉을 수 있는 ‘ㄷ’자 조리대 겸 재료 냉장고 겸 테이블에 간이 의자가 전부였다. 안쪽에서 이모는 주문 메뉴를 바로바로 조리해서 내어 주었다. 그때 우리가 뭘 먹었더라. 절대 잊어버릴 거 같지 않았는데, 거짓말처럼 기억이 안 난다.

그날 우리는 ‘주연 배우’에 오래 있었다. 우리 양쪽으로 손님들이 두 팀 정도 왔다가 나갔다. 우리의 오른 편에 앉았다 간 중년 남녀는 부부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말을 걸었고, 넉살 좋은 그 애는 잘 받아치며 “와, 그 안주는 뭐예요?” 묻고 안주를 얻어 오기까지 했다. 중년 커플 중 남자는 딱 봐도 ‘나 예술한다’ 하는 외면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금 취하더니 우리에게 말했다.


“인생 자체가 예술이야.”


예술대를 졸업한 우리 둘 다 아직 ‘예술’이라는 단어에 눈이 반짝이던 때였다. 지금 같았으면 ‘취해서 뭔 개소리야.’ 하고 대화가 더 이어지지 않도록 재빨리 손절했겠지만, 우리 두 사람 모두 “와…” 하고 말았다. 중년 남자는 ‘요놈들, 잘 걸렸다.’하고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중년 커플이 가고 나서는 아빠뻘의 아저씨가 혼자 들어왔다.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집에는 애들이 있고 마누라가 잔소리하니까….”라며 묻지도 않은 ‘혼술’의 이유를 웅얼거리셨다. 그 아저씨와도 몇몇 대화를 나눴던 것 같은데, 그저 짠했던 감정만 기억이 난다.

아저씨 손님도 나가고 나서 다시 우리 둘만 남았을 때, ‘주연 배우’ 이모가 우리에게 한마디 물었다.

“새기는 사인겨(사귀는 사인인 거야)?”

나는 재빨리, 서둘러, 그 애가 아니라고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아니요! 친구에요. 친구!”

라고 대답했다. 이모는 소리 없이 웃으며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봤고, 나는 고개를 돌린 채 소주를 마셨다. 생각해보니 그때 그 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떤 표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곧바로 그 애 쪽으로 고개를 다시 돌릴 수가 없어 확인할 길이 없었다.     




아현동에서 6년을 살았지만, ‘포품동’을 누린 기간은 3년뿐이었다. 아현동에 들어선 브랜드 아파트 주민들이 아포의 강제철거를 강하게 원했기 때문이었다. 아포 이모들은 생계수단을 잃었고 나는 포품동에 살 수 있는 특권을 잃었다. 아포의 철거는 사회적으로도 큰 의미를 던졌다. 주요 일간지에서는 한 면을 고스란히 할애해 이 이야기를 다루었다. 울부짖는 이모들, 무너진 점포들, 그와 비교되게 화려하고 높은 새 브랜드 아파트의 사진과 함께.

나는 새 아파트 주민들과 아파트의 존재 자체에 분함을 느꼈다.

‘저기 사는 사람들은 뭐가 달라? 서대문구는 왜 저 아파트 사람들의 민원만 접수하지? 비싼 아파트 사는 사람들만 구민이야?’


그러나 그 분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파트와 함께 들어선 주상복합단지에는 스타벅스가 생겼고, 깨끗하고 큰 마트가 생겼고, 네일숍과 미용실도 생겼다. 없을 땐 몰랐던 편리함을 알게 되었다. 편의 시설이 대거 갖추어진 그곳은 보란 듯이 아현동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었다. 그 아파트에 살지 않는, 길 건너 빌라에 살고 있는 내 삶의 질까지도 말이다.     


얼마 전, 아포 이모들 중 몇몇 분이 경의선 기찻길 옆에 실내포차로 다시 문을 여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와 같은 아포 매니아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다시 그곳을 찾고 있다고. 나는 다른 포장마차들을 전전하고 있지만 아직 그곳에는 가보지 않았다.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았던 그 애 얼굴처럼, 그냥 두어도 좋을 장면들은 그냥 그렇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끝





방실방실 아조씨 | 포차성애자. 소녀 감성과 아저씨 취향 그 사이 어디쯤에서 소맥을 말고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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