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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바다에 누워 Jul 11. 2021

입으면 실패하는 옷들

문래동 기획회의 05.



#구두


  포멀한 디자인이다. 둥근 앞 코, 블랙이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부담없는 4센치 짜리 굽. 보통 차분한 옷차림, 단정해 보이고 싶은 옷에 신으면 무난한 그런 구두. 인터넷으로 구매한 2만9천 원짜리 이 구두를 5년 째 신고 있다.


  그 구두를 신고 작년 4월, 벚꽃이 눈처럼 쏟아지던 일요일 저녁에 대학로를 갔다. 짝사랑하던 친구가 대학로에 맛있는 마라샹궈 집이 있다고 해서 먼 대학로까지 갔다. 길마다 벚꽃이 폈고, 사람들은 바글바글했다. 역에서 친구를 만나 어색하게 마라샹궈 집까지 걸었다. 사실 이 친구를 주말에 만나는 것도 처음이었고, 이렇게 사적인 자리에서 본 것도 처음이어서 아주 많이 어색했다. 어쩌면 그 친구가 더 많이 어색했을 지도 모른다. 속으로 이런 생각까지 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예의상 밥 사주겠다고 했더니 그걸 진담으로 알고 이렇게 주말에까지 불러내냐...눈치없네.’ 라고.


  가게 건물에 도착해 2층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올라가는 동안 계단이 어둑하기에 살짝 불안감이 들었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가기도 전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문이 닫혔네.” 라고 하자 친구는 적잖게 당황을 했다. 가뜩이나 말도 못하게 어색한 상황에, 호언장담을 했던 맛집이 문까지 닫아버려 이래저래 당황했을 친구를, 나는 가장 먼저 생각했다. “근처에 나도 갔던 마라샹궈 집 있는데, 괜찮으면 거기 가볼래?” 그 어두운 계단을 내려와 조금 더 밝은 곳으로 나갔다.

  조명이 밝은 가게에서 마주 보고 앉아 마라샹궈와 각 맥주 한 병을 시켰다. 그래도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고 나니 어색함이 조금 덜어지는 것 같았다. 얘기를 들어보니 친구는 바로 전날, 자신이 호감을 갖고 있는 여자와 함께 낙산공원에 올랐다고 했다. 야경을 보고, 벚꽃 나무 아래에서 사진도 찍어주고, 흡사 데이트와 같은 걸 했다고 하는데 그 친구도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있는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어제의 좋았던 그 생각으로 친구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마치 화사한 꽃향기가 나고 있는 것 같았다.

  

  밥을 다 먹고 낙산공원에 올라가 맥주 한 잔씩을 더 하기로 했다. 구두를 신은 채 높은 계단을 오르려니 보통 쉬운 게 아니었다. 숨이 턱까지 차고 힘들었지만 티를 내지 않고 최선을 다 해 계단 끝까지 오르니 가득 핀 목련들과 벚꽃들이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라고. 성곽 앞에 서서 숨을 크게 내쉬었다. 친구는 성곽 너머 보이는 서울 시내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가 어제 만난 여자애가 사는 동네고, 그 친구가 졸업한 학교는 저기. 그리고 내가 살았던 동네는 그 친구가 다니던 학교 옆.” 그만큼 자신과 그 친구 사이 교집합의 범위가 매우 넓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들이었다. ‘애써 웃는다’라는 표현은 바로 그럴 때 사용하는 게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애를 써서 미소를 지었다. ‘어디선가 한 번쯤 스쳐 지나갔을 인연인가 보네.’라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서.


낙산공원에 올라 찍은 그날의 봄


  서 있는 자리를 옮기려 몸을 휙 돌리자 바람이 살랑 불고 그때 다시 마라샹궈 집에서 맡았던 꽃향기가 훅하고 들어왔다. 행복해하고 있는 친구에게서 불어온 향기였다. 이 친구를 만나기 위해 면세점에서 큰 맘 먹고 산 구찌 Flora 향수를 온갖데 뿌린 건 난데. 내 옷깃 어느 곳에서도 그 향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는 찌질한 구린 냄새가 나고 있는 것 같았다.

  친구와 성곽을 따라 동대문역까지 걸어 내려갔다. 내리막길인 데다가 왼쪽 구두 굽이 덜렁거리는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최대한 이 오랜 구두에 더 이상의 큰 데미지가 없도록, 정말 조심조심, 살금살금 걸었다.

  내리막길을 모두 다 내려가고 평지에 발이 닿았을 때엔 안도감이 들었다. 이 친구와 있는 시간을 빠르게 끝내고 싶진 않지만, 내게는 기회가 오지 않겠구나 라는 생각이 이미 너무 크게 들었기에 그럴 용기를 내고 싶지도 않았다.


  밝게 인사를 하고 친구와 헤어졌다. 지하철에 타자마자 흙먼지가 뽀얗게 올라 앉은 구두 끝을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쎈 척, 쿨한 척, 단단한 척. 그렇게 잘 버틴 것 같다.   

  



#오프숄더


  보타닉 패턴의 오프숄더다. 작년 3월, 더블린 O'nellis pub(더블린에서 전통적인 아이리쉬 펍) 앞에 있는 H&M에서 구매한 3.5유로 짜리. 언제 입을지, 어떻게 입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산 건 아니었다. 펍에서 일하는 동생의 아르바이트 시간이 끝날 시간까지 Molly Malone Statue 앞에서 금발 언니의 버스킹을 구경하다가 잠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되었다. ‘너는 행복했니? 너를 위해 해준 것이 있니? 그 행위는 너를 행복하게 했니?’뭐 그런 여행에서 필수로 떠올리는 상념 같은 것.

  그 자리에서 바로 H&M으로 가서 봄옷 하나를 샀다. 그 옷이 바로 그 오프숄더였고, 30대가 되어서도 오프숄더라는 건 입어 본 역사가 없었기에 사놓고도 난감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옷을, 딱 한 번 입게 되었다.

  작년 6월, 회사에서 일할 땐 조선의 마지막 여자인 것 마냥 오프숄더이지만 늘어진 어깨 라인을 내 승모근까지 꾸역꾸역 올려 입었고, 회사 밖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기 시작할 땐 과감하게 어깨를 드러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더 잘 안다고, 그런 옷도 많이 입어보질 않으니 어깨라인도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깨가 시작되는 부분까지 애매하게 내리면 어깨 깡패가 되는 것 같았고, 그렇다고 팔까지 내리자니 노출에 대한 부끄러움은 내 몫이었다.

  그날은 작정하고 친구와 함께 술을 (작심하고)마시기로 한 날이었고, 1차로 치킨을 배부르게 먹고 늘 가던 꼬치집으로 가기 전 적당히 소화를 시키고 가자하여 주변 먹자골목을 한 바퀴 정도 돌고 있었다. 순간 가로등 아래에서 벌레 한 마리가 내 눈으로 돌진을 해왔다. 걸음을 멈추고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앞서 가던 친구도 걸음을 멈추고 앞으로 오더니 내(오프숄더가 시작되는 그 지점) 어깨를 잡고 ‘어디 봐바.’ 라는 말을 하며 내 눈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순간엔 내 심장도 멎었고, 그땐 시간도 잠시 멈춘 듯 했다. 앞서 말한 (작심하고)의 의미는 짝사랑에 대한 마음을 고백을 위함이었다. 되든 안 되든, 이 깊어지는 짝사랑에 ‘멈춤’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실 가로등 아래에서 그런 다정한 행동에 어쩌면 이건 긍정적인 시그널일 수도 있겠구나를 생각했었다. 골목 한 바퀴를 다 돌고선 꼬치집으로 들어갔다. 하이네켄 생맥주 2잔을 시키고, 맥주잔을 앞에 두고 잔의 머리 위를 검지로 휘휘 젓기만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영 어색했는지 친구가 이야기 했다.

  

“오늘 왜 이렇게 예쁘게 입고 왔어? 그 옷은 또 어디서 샀대”


  좋아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데 어떤 여자의 마음이 요동치지 않을 수 있을까. (못 참지 그런 말…) 그 말에 볼이 살짝 발그레해졌지만 이내 다시 경직된 표정을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기만 했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을 지경으로 심장이 쿵쾅 거렸다. 심장이 쿵쾅 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릴 정도였으니 이 소리가 새어 나가서 친구에게 들리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침묵을 깨고 내가 입을 뗐다.


“얼마 전에 소개팅을 했어, 되게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을 몇 번 만날 때마다 네 생각이 나는 거야. 나도 잘 몰랐는데, 아니 아예 잘 모르고 있었는데. 좋아하게 됐어 너를. 좋아해.”


  그에 대한 답변은 거절이었다. 순간 타이트하게 허리를 죄던 무언가가 스르르하고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 뒤 그 날 입었던 오프숄더 블라우스는 장롱 속에서 일 년 째 화석이 되어가고 있다. 특별한 날에라도 입고 싶었는데 투머치해 보일까 두렵고, 그 특별한 날을 어떤 이유로든 실패로 만들까 두려운 마음에 꺼내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봄날을 맞이하고자 샀던 봄옷은 지금 곰팡이가 피어 갈 지경이다. 어쩌면 머지 않아 당근마켓에서 열심히 끌올을 하고 있지 않을까. 나에겐 실패로 끝난 옷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성공과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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