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코스프레, 진짜 나쁜 걸까?

서민은 항상 신성해야 한다는 외침의 공허함

by 호세

여느 때처럼 유튜브를 표류하다, 지금 당장 누르지 않고 유튜브 알고리즘의 바다로 떠내려 보낸다면 후회할 것만 같은 제목의 영상을 접하게 되었다. ‘SK 대기업 재벌 3세의 하루'

JTBC 드라마_재벌집 막내아들

일주일 전 영상도 오래전 영상이 되어버리는 유튜브 환경을 생각하면 조금 연식이 있는 영상이었지만, 대기업 재벌 3세의 하루를 방구석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어디인가.


영상을 클릭하기 위해 손을 올리는 순간, 그 출처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릿속에는 어느새 깔끔한 정장을 입고 비서를 대동하며 직원들에게 호통을 치는 청년이 한 명 서 있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내 환상은 영상 속 인물의 추레한 회색반팔과, 돈가스를 자주 먹는다는 말에 의해 하나씩 벗겨져 나가기 시작했고, 영상이 끝에 다다를 때쯤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 그도 나와 같은 생명체일 뿐인데 나는 그에게서 어떤 모습을 기대하고 있던 것일까, 갑작스레 숨겨둔 날개를 펼쳐 날기를 원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도마뱀과 같은 눈동자를 비춰주기라도 기대한 것일까.


영상의 댓글 창은 ‘내가 생각했던 재벌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의구심과 안도감 그리고 불만 섞인 말투의 것들이 가득 채웠다.


내가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대체 우리는 그들에게서 어떤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댓글을 살펴보던 중, 누군가의 한탄이 눈에 들어왔다. “돈 없는 서민들 코 묻은 돈 가져갈 생각하지 말고.” 나는 이 말이 마치 너희는 서민이 될 수 없고, 내 것을 감히 넘보지 말라는 말처럼 들려왔다. 그리고 그 배타성에 강하게 꽂혔다.



[서민]

1. 아무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

2. 경제적으로 중류 이하의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


단어의 뜻에서 드러나지 않던 ‘서민’의 모순성은 그 단어가 발화될 때 여실히 드러난다. 서민은 위에 제시한 것처럼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신분제가 사라진 현시대에 우리는 모두 1번의 서민이 될 수 있지만 2번의 서민은 누구나 될 수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서민의 뜻은 2번에 편재되어 있다. 위 댓글의 ‘서민’이 ‘돈 없는’이라는 표지를 동반하는 것과 선거가 가까워지면 고가의 상품이 진열된 백화점과 대조되는 시장을 찾아 ‘서민 음식’으로 대표되는 것들을 먹는 사람들을 보며 “사실은 강남구에 자가를 가지고 있을 만큼의 재력을 갖추고는 서민 코스프레하고 있네”라고 비판하는 우리에게 서민은 경제적으로 중류 이하라는 뜻이 더욱 일반적으로 사용됨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오로지 이 뜻만을 취사선택해 서민과 서민이 아닌 자를 구별한다. 이때 서민이 아닌 사람의 자리는 주로 재벌과 거대 기업의 총수 혹은 정치인의 몫이 된다.


적과 동료가 확실히 구별되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그 사람이 어떤 행동과 말을 하든 서민이라는 우리의 신성한 영역을 침범한다고 생각되면 ‘서민 코스프레’라는 이름을 붙여 무자비한 공격을 가한다. 그들은 서민이 아니라 단지 서민 행세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난을 하는 이유의 전부이다.


그렇다면 서민 코스프레는 왜 비판받아 마땅한 것일까, 이 행위에 도의적인 이유가 있을까? 대다수의 사람은 행위 너머의 ‘이면성’을 그 이유로 지목한다. “그들은 평소에 그러지 않으니까, 당연히 비판받아야죠.”


과연 그럴까, 지금 우리는 추레한 회색 반팔을 입으며 돈가스를 즐겨 먹는다고 말하는 재벌 3세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들의 이면성을 먼저 확정 짓고 혀를 차며 비판하기 전에 그 이면성이 어쩌면 현실의 것이 아닌, 오로지 우리 환상의 부산물이 아닌지 먼저 의심해 봐야 한다.


이러한 전제에서 시장에서 구입한 것들을 귀가 후 쓰레기통에 버리는 정치인의 모습을 상상하며 “분명히 버렸을 거야, 한심하다”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는 그들에게 신성한 영역이라고 간주되어야 하는 서민의 영역을 더럽히는 메아리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왜 ‘서민 갑부’는 별 다른 잡음 없이 본받고 싶은 대상이 될 수 있고, 재벌과 거대 기업의 총수 그리고 정치인은 그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일까.


그들에게도 부여될 수 있는 서민의 1번 뜻을 사회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언어적으로 역설인 2번의 서민과 갑부의 합성어를 숭상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현실은 우리가 서민이 아닌 사람이어야만 하는 자들을 신성한 우리만의 영역에서 얼마나 밀어내려 애쓰고 있는지를 방증한다.




어쩌면 그들은 항상 조금 더 나빠야만 한다.


어느새 대중은 서민이 아닌 사람으로 간주되는 자들의 추악한 모습을 찾아내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


때로는 우리의 모습이 마치 방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방 밖을 어지럽히면 된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도 뉴스 스탠드는 영부인과 대통령의 얼굴, 여당과 정부의 독선 그리고 야당의 광기에 대한 비판만이 가득 차 있을 뿐, 자식을 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몇 달 전,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2024년 06월 즈음, 평소와 같이 뉴스 스탠드에 들어간 나는 정체 모를 공허함을 느낀 적이 있다.


그 당시 나의 눈앞엔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기업 총수의 이혼 소송에 관한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중 몇 개를 클릭하고 읽어보니 네티즌들에 의해 그는 벌써 ‘오너리스크 덩어리인 망해야 하는 배신자’로 판결 내려진 후였다.


2019년 기준 아시아 이혼율 1위, 모 박사의 조사에 따르면 외도 경험(성매매 포함)이 3명 중 한 명 꼴로 있다는 대한민국에서 아무리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이혼, 외도가 갑질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오너리스크였는지 되묻고 싶다. 필자는 결코 외도가 바람직하다고 그를 두둔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서민의 영역을 신성하게 지키려면 서민의 영역 내부에더욱 주목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것이다.


정말 우리가 서민의 정의로움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서민의 영역 밖에서 일어난 그의 이혼보다 그 당시 발생했던 훈련소에서의 만행과 같이 서민의 영역 안에서 자행된 부당함에 더욱 주목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과도하고 부당한 훈련에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해야만 했던 자와 그 부모님의 이야기, 즉 서민의 이야기는 오늘도 서민의 경계 바깥의 잡음에 의해 공허한 곳으로 유리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서민은 서민이 아닌 자들의 추악함을 통해 더욱신성해질 수 있다는 전략을 한껏 의심해봐야 한다. 쟤보다는 내가 더 깨끗하다는 식의 신성함은 결국 상대적인 껍데기일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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