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의 과정과 그 정당성: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봐야 할 것
최근 유튜버 ‘곽튜브’의 영상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영상의 내용은 기존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시청자들의 지적은 두 가지 핵심 이슈로 나뉜다.
첫째로 그룹 ‘에이프릴’의 멤버 ‘이나은’이 해당 영상에 출연한다는 점이다. ‘이나은’은 과거 학교 폭력, 그룹 내 괴롭힘 의혹이 제기된 적 있었던 인물인 만큼 곽튜브를 비판하는 일부 목소리는 이나은의 출연을 결정한 사실 자체에 대해서 신중해야 했다며 지적하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대다수 언론사가 앞다퉈 조명하고 있는 것처럼 곽튜브가 주요하게 비판받는 것은 이 부분이 아닌 듯하다.
시청자들은 해당 영상 속 곽튜브와 이나은의 저녁 식사 중 대화 장면만을 꼽아, 집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부분은 이나은의 의혹들에 대해서 곽튜브 자신의 사적인 오해를 사과하는 장면으로, 어찌 보면 큰 논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장면이지만 논란은 이나은의 의혹들과 ‘유 퀴즈 온 더 블록’에서 밝힌 학교 폭력 피해자로서 곽튜브의 과거가 교묘하게 충돌하며 발생한다.
아마도 곽튜브가 피해자와 너드(속칭 찐따)라는 이미지로 자신을 드러내 왔던 만큼, 이전에 제기되어 온 의혹들로 가해자를 대표하게 된 이나은이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장면
,특히 미안함을 느끼는 피해자와 이를 겸허히 수용하는 가해자의 모습은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있는 일반적인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적 이미지를 역전시키고 혼동을 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물론 이나은의 의혹들이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그리고 미디어 속에서 현재 곽튜브가 대표하는 이미지가 아픔을 이겨낸 피해자라는 사실에 비추어봤을 때에 곽튜브가 짊어져야 하는 짐은 결코 가볍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현재 그를 비판하는 몇몇 목소리가 그가 감당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보다 무겁게 보이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많은 언론과 시청자들은 현재 곽튜브의 행위를 ‘대리 용서’라고 명명하여 비난하고 있는데, 이 사안에서 ‘용서’라는 단어의 사용은 꽤 흥미로운 지점이다.
용서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용서 :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_(네이버 국어사전)
오로지 의미에만 집중한다면, 이번 사건에 용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마냥 어색하지만은 않다. 분명히 영상 속에서곽튜브는 이나은의 잘못을 벌하거나 꾸짖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용서의 특수성은 의미에서 벗어나, 우리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 드러난다. 용서는 당신이 나에게 끼친 부당함을 마땅히 수용하겠다는 일종의 선언으로 볼 수 있는데 이 선언적 성격은 용서에게 당사자성을 부여한다.
사전적 정의 속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용서는 오로지 부당함으로부터 당사자성을 부여받은 피해자만의 권리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당사자성을 갖추지 못한 자의 용서는 용서가 될 수 없을뿐더러, 피해자의 권리에 대한 침해로 여겨져 비난의 대상이 되기에 마땅해진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은 '용서'를 사용하기에 적절한 상황일까, 이는 이나은의 의혹이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더욱 이해하기 쉽다.
앞서 언급했듯, 이나은의 의혹은 학교폭력과 그룹 내 괴롭힘으로 나뉜다. 전자는 허위사실이라고 밝혀졌지만, 후자는 실제 판결문을 통해 문제시될 수 있는 행동이 존재하였음이 드러났다.
그 때문에 이번 사안에 대해서 시청자들이 비판하는 부분 또한 해결에 도달한 전자보다 후자에 집중되어 있다.
다시 영상으로 돌아와 보자, 영상 속 대화 장면은 전자(학교폭력)의 의혹이 있었을 때, 곽튜브 자신이 가졌던 오해에 대해 사과하는 장면을 비춘다.
당연히 이 점은 곽튜브의 대리 용서가 될 수 없다. 이 대화 속에서 곽튜브는 용서의 객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리 용서일까, 댓글과 언론을 통해 대부분의 사람은 전자의 사안에 대해서만 선별적으로 영상 속에서 언급한 것을 용서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과연 이것이 용서일까, 문제의 부분에서 곽튜브의 작위적 선언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는 후자에 대해서 그저 침묵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의 행위는 '대리 용서'가 아니라 '침묵'으로 명명되어야 옳은 것이 아닐까.
결론적으로, 곽튜브의 행동은 대리 용서라기보다는 침묵에 가깝다. 그는 이나은의 그룹 내 괴롭힘 의혹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며, 그저 이 사안에 침묵했다.
물론 침묵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다만, 권리 침해의 적극성을 동반하는 '대리 용서'는 부작위적인 '침묵'과는 달리 대상에 대한 비난을 용이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는 마땅히 부당한 전략이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질문은, 그가 이 문제에 침묵한 것이 비판받을 만한 행동인가, 혹은 그의 침묵을 용서할 수 있는가이다.
이러한 논의는 비판의 방향이 곽튜브의 책임감에 얼마나 정당하게 맞춰져 있는지에 대한 문제로 이어질 것이다.
직언이 참언으로 변모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간악한 비난이 아니라 정당한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비판의 내용만큼이나 비판의 과정 또한 정당하고 진실하여야만 한다.
이는 비단, 미디어의 영역에 한정될 뿐인 공리가 아니다.
그에 대한 무분별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새로운 가해자가 되어가고 있지 않은지 물어야 한다.
정당하고 적당한 비판이 이루어지기를, 비판의 과정에서 용서받을 일이 없어지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