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 타당함을 의심해보기
지난 대법원 판례(2020스616)에는 다소 상경한 단어가 등장했다
"그들을 호모 사케르 상태에 방치하여서도 안된다"
호모 사케르, 이는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사용을 통해 다시 사회에 얼굴을 드러낸 단어로 직설적으로 풀자면 '살인이 승인된 자'를 의미한다. 사회학적으로 어떠한 담론에서도 배제된 채로 존재하는 자들을 의미하는 때에도 자주 사용 되곤 한다.
법을 배우는 학생인 필자에게 황금들녘(2006나1846) 이후로 이러한 판례가 다시 와닿은 것은 다소 생소한 일이라, '호모 사케르'에 관련된 사회적 이슈를 다뤄보고자 이 글을 작성한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이제 주관적 진실만이 존재하는 사회이다. 객관적 사실은 사라졌고, 누군가 언급한 바와 같이 '화합'은 이미 가치를 잃어버렸다. 이제 승리를 향한 유일한 전략은 나의 주장이 그의 주장보다 조금 더 타당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나의 주장의 진실성을 증명하지 않으면서도 타당성을 증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나에게 동의하는 다수를 동원하는 것이다. 내 입장이 일반적이며, 보편적임을 반복해서 드러내면 대중은 그의 주장에 쉽게 굴복한다.
최근 뉴진스의 긴급 유튜브 방송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작점 부근에 있는 하이브와 단월드의 연결점에 관련된 음모론 또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것도 드러난 바 없지만, 모두가 그러하니 나도 그렇게 믿어보자는 식이다.
물론, 집단지성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만큼, 다수는 종종 겉보기에 아름다운 진실성을 제공하기도 한다. 다만, 우리가 항상 품어야 하는 것은 과연 그 다수가 진실한 다수인 지에 대한 의문이다.
지난 6월 반갑기도, 미안하기도 한 '고(故) 변희수 육군 하사'라는 이름을 언론을 통해 오랜만에 접하게 되었다. 유족의 신청이 최종 결정되어 그녀를 대전현충원에 안장할 예정이라는 기사였다.
변희수 하사와 관련해 이슈가 되던 시절, 시사에 밝지 않은 고등학생에 불과했던지라 기자회견이 있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다.
다만 당시의 분위기는 피상적으로 양분되어 있었지만, 사실 한쪽으로 다소 쏠려있었던 것은 명확히 기억난다. 신실한 기독교 가정인 필자의 가정 또한 그러했다.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다양한 언론사들의 관련 기사를 읽던 도중,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일부 기독교 언론사의 항변 기사였다.
기독교 신문인 만큼 당연히 비판적인 목소리가 있겠거니 예측은 했지만, 그 표현이 담은 과도한 적대감은 내가 지금껏 접해온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을 외치신 분의 교리를 따르는 목소리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특히 이 기사에서는 일반 국민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자신의 주관적 진실을 '우리'의 범위로 편입해 설득력을 얻고자 하는 전략이 다분하게 드러났다.
전략의 타당함을 살펴보기 전, 우리는 일반 국민이라는 단어가 지닌 성격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일반 국민은 강력한 다수성을 가지는 단어이다.
특히 '일반'(usual)이라는 말은 '특수'(unusual)라는 반의어를 내포해 나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너는 그저 특수 사례에 해당할 뿐이라는 배재성을 완연히 드러낸다.
이 기사의 입장에 반대하는 나는 과연 특수한 사례일까? 타 언론사 보도의 댓글 창을 가득 채운 변희수 하사에 대한 애도의 물결은 그녀가 특수하지 않은 만큼 나 또한 특수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근 성 정체성에 대한 담론이 반복되면서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레거시 미디어에도 종래에는 무감각적으로 터부시 되었던 성전환자가 등장하는 등 과거로부터의 변혁을 시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성전환자도 우리와 다를 바 없다는 진실과, 성전환은 죄라는 진실 두 가지 진실이 충돌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자신의 목소리는 보편적 진실일 것이며 상대방의 목소리는 그에게만 귀속되는 진실로 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사실은 내가 맞다는 식의 목소리가 첨예하게 충돌하고 대립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그 담론에 끼어들 수조차 없는 호모사케르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