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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제 Dec 13. 2022

이무도 못 봤어

집에 오니 또 엄마가 없었다. 아무도 없는 집은 어둡고 으스스하다. 빈집에 들어올 때, 은수는 그냥 들어오지 못한다. 먼저 열쇠로 현관문을 따 와당탕! 큰소리를 내며 활짝 열어놓고, 뒤로 재빨리 물러선다. 그래야 빈집 안에 있는 ‘그들’이 은수가 온 것을 알고 숨을 테니까. 보지 못하면 그들도 은수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은수는 일부로 큰소리로 말하면서 들어왔다.


“나는 아무도 못 봤어! 모두들 안심해!”


목소리는 크지만 발걸음은 조심스럽기만 하다. 살금살금. 창문이 꼭 닫힌 집안은 조용하고 어둡다. 어둠 속의 빈집을 샅샅이 둘러보면서 은수는 한 걸음 한 걸음 집안으로 들어온다. 부스럭! 신발 벗는 소리도 왠지 크게 들린다.


천천히 마루로 올라선다. 집안에서는 다행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니, 시계 초침 소리는 굉장히 크게 들린다. 똑딱 똑딱 똑딱!


이제 두 번째로 힘든 일이 남아 있다. 은수는 가지고 있는 모든 용기를 모아 마루를 재빨리 가로질러 달려 자기 방과 오빠 방, 욕실과 안방 문을 한꺼번에 쾅, 열어젖힌다.


후다다닥! 은수는 다시 현관문 앞에 서있다. 다행히 방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아무도 없네! 모두들 잘 숨었구나. 난 정말 아무도 못 봤어!”


이제는 조금 더 안심이다. 은수는 아까보다는 덜 머뭇거리며 집에 들어와,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한 마루와 안방에 불을 환히 켜놓는다. 배가 고파 냉장고를 뒤졌지만 물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꼬르륵, 은수는 심심하다. 피아노를 치고 싶다. 하지만 피아노를 치면 등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잘 알 수가 없다. 소리가 들리는 데도 알아채지 못 하면, 그들은 나를 해칠 수도 있다. 그들을 화나게 하지 않으면서도 피아노를 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좋아, 난 이제부터 피아노를 칠 거야! 듣기 싫으면 나한테 표시를 해줘. 무서우니까 목소리를 들려주진 말고 책장 위에 있는 책을 하나만 넘어뜨려!”


조용.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 나 이제 피아노 친다!”


은수는 피아노학원에서 배웠던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백조’를 치기 시작한다. 연미 언니가 처음 치는 걸 듣고 정말 좋아서 배우게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노래다. 쉬우면서도 노래가 정말 ‘아름다워서’ 치고 있으면 기분이 참 좋아진다. 쉬우면서도 ‘아름다운’. 이 단어는 배운지 얼마 안 되었지만 처음 들었을 때부터 은수 마음에 꼭 들었다. 예쁘다는 말보다 더 어른스럽게 느껴졌으니까.


따라라 따라라 따아 따라라라.


은수는 ‘백조’의 처음 한 소절을 조심스레 치고 혹시 무슨 소리가 나나 들어본다. 뒷덜미가 서늘해서 돌아보고 싶지만 혹시 그들을 보게 될까봐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한다. 뒤를 돌아보고 싶다. 하지만 돌아볼 수 없다. 돌아보고 싶다. 하지만 돌아볼 수 없다... 눈이 마주치면, 그들은 아빠에게 한 것처럼... 내게....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떠오르려 해 은수는 황급히 고개를 흔든다.


똑딱 똑딱 똑딱,

시계 초침이 돌아간다. 은수는 숨을 죽이고 몇 초를 더 기다려본다. 다행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들이 피아노를 치는 걸 싫어하진 않나보네.’


안심이 된 은수는 좀 더 자신 있게 페달을 밟으면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피아노 선생님은 음을 하나하나 똑바로 치라며 페달을 못 밟게 하지만 지금은 혼자이니까 괜찮다. 페달을 무겁게 밟아주면 피아노 소리가 크게 울려 훨씬 멋지게 들린다.


‘백조’ 노래가 점점 커지면서 작은 백조 한 마리가 나타나 하얀 건반 위를 유유히 헤엄치기 시작한다. 은수가 손가락을 좀 더 부드럽게, 마음을 좀 더 물결치듯 흘려보내면 백조는 좀 더 ‘아름답게’ 헤엄친다. 곡에서 더 강조해주고 싶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 되자 은수는 발을 더 힘껏 내려 페달을 밟았다.


띵-!

아뿔사, 음이 하나 어긋났다.


“또 틀렸다! 꼭 이 부분에서 그러더라!”


여기가 제일 멋진 부분이라 항상 더 신경 쓰는데 이상하게 그럴수록 자꾸 더 실수한다. 건반 위의 백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흥이 깨진 은수는 악보집을 꺼낸다. 파르륵 악보집을 넘기는 은수에게 갑자기 뒤에 무언가 있는 듯 곤두서는 느낌이 든다.


‘내가 실수해서 ‘그들’이 화가 난거면 어떡하지?‘


은수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 한다. 뒷덜미의 따가운 느낌이 점점 강해진다. 겁이 난 은수는 악보집을 꼭 껴안고 말한다.


“거기 있는 것 알지만 제발 내 앞에 나오지 말아주세요! 부탁이에요! 더 열심히 피아노 칠 게요!”


조용. 은수는 더 이상 뒤를 안 보고는 견딜 수 없어진다.


“뒤돌아볼게요! 제발 숨어주세요!”


텅-.

다행히 은수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휴…….”


은수는 다시 악보집을 파르르 파르르 급하게 넘긴다. 더 쉽고 더 잘 칠 수 있는 노래를 어서 찾아야 한다. 안 그러면... 그들이 내게.


'아, 이거야!'


노래를 고른 은수는 짐짓 혼잣말처럼 그들에게 제목을 알려준다.


“이제부터 젓가락 행진곡을 쳐야지! 정말 재미있는 노래야!”


띵- 은수가 ‘젓가락 행진곡’의 첫 음을 조심스럽게 친다. 쉽고 제일 좋아하는 노래라 많이 연습해 다른 노래들보다 훨씬 잘 연주한다. 워낙 쉬워서 문제 없을 것이다. 아마도.


딴딴딴 딴딴딴, 딴딴딴 딴딴딴

딴딴딴 딴딴딴 딴딴딴 딴딴따


시작부터가 좋았다. 다섯 손가락을 다 쓰지 않고 양 손의 검지 손가락만 하나씩 써서 건반을 치는 젓가락 행진곡은 멜로디도 리듬도 쉽다. 대신 쉽기 때문에 방심해서 실수하기도 쉽다. 은수가 학원에서 재미삼아 칠 때는 그래서 자주 엉뚱한 건반을 누르기도 했다.


학원에서는 틀려도 큰일날 게 없기 때문에 괜찮았다. 하지만 집에선 특히 엄마가 없을 때 혼자 있는 집에선 틀리면 안 돼. 그러면 나는... 은수는 갑자기 머릿속에 또 어떤 장면이 떠오르려 해서 머리를 거세게 흔들었다. 생각하지 마, 피아노를 쳐. 피아노 만 쳐. 피아노만 쳐. 은수는 주문처럼 자기 자신에게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연주가 이어질수록 은수의 조심스럽던 피아노 소리가 점점 가벼워진다. 빈집은 점점 경쾌한 피아노 소리로 가득 찬다. 신이 난 은수는 피아노를 치면서 콧노래를 부른다. 피아노 위에 이번에는 작은 젓가락들이 나타나 타닥타닥, 건반 위 은수의 손가락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다. 젓가락들의 춤이 빨라지는 멜로디에 따라 점점 격렬하고 신나게 변한다.


피아노 위 은수의 손가락은 이제 바람을 일으키며 빛이 나기 시작한다. 멜로디에 맞춰 반짝반짝 은수의 손가락에서 빛의 공들이 하나 둘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피아노 소리가 계속 될수록 빛의 공 숫자는 늘어나 집안은 이제 빛으로 온통 가득 찬다. 어둠은 어둠이 숨어있을 수 있는 구석들에만 남아 있다.


젓가락 행진곡이 끝나갈 무렵 은수는 문득 옆에 누군가 살포시 앉는걸 느꼈다. 보이지는 않지만 팔의 솜털이 오스스 솓으며 팔 근처의 공기가 묵직하게 출렁 흔들렸다. 원래 젓가락행진곡은 연탄곡으로 많이 쓰인다. 연탄이란 두명의 연주자가 한대의 피아노를 함께 연주하는 것. 주로 검지 손가락 2개로만 연주하는 젓가락행진곡은 그래서 더욱 다른 한명의 손가락이 더해졌을 때 신나고 재미있는 연주가 가능하다. 은수도 물론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좀처럼 그럴 기회는 없었다.


'띵-'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은수가 놀라서 쳐다보자 다시 한번 '띵-' 하고 피아노 건반이 눌렸다. 그리고 '딴따따 딴따따' 젓가락 행진곡 연탄 연주의 낮은음 자리쪽 멜로디를 연주했다. 어느새 건반 위의 젓가락은 4개로 늘어나있었다. 새로 생긴 젓가락은 검은색이었다. 은수가 멍하니 있자 재촉하는 듯 한번더 '딴따따 딴따따' 건반이 눌렸다. 그소리에 은수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젓가락 행진곡 연탄 연주의 높은쪽 멜로디를 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손가락은 은수의 연주를 따라 함께 연주하기 시작했다.


딴따따 딴따따 딴따따 딴따따

딴딴딴 딴딴딴 딴딴딴 딴딴딴


연탄으로 처음 쳐보는 젓가락행진곡은 너무나 신나고 즐거웠다. 은수는 모든 것을 잊고 연주에 몰두했다. 너무 신나서 웃음마저 터졌다. 까르르 대는 은수의 웃음소리가 빈집에 울려퍼졌다. 젓가락 4개도 즐겁게 춤을 췄다. 은수의 손에서는 더욱더 많은 빛의 공들의 멜로디에 맞춰 뭉게뭉게 흘러나왔다. 빛의 색깔은 더욱 밝고 다채로웠다.


문득 집안 여기저기에서 술렁술렁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와 침대 밑, 문 뒤 아직 어둠이 남아있는 곳들에서. 술렁대는 소리는 점점 커져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은수의 귀에도 들렸다.


은수는 그들이 왜그러는지 알것 같았다. 은수는 인심 좋은 듯 말했다.


“내 뒤에서라면, 내 눈앞이 아니라면 너희들도 춤춰도 돼. 하지만 내가 뒤돌아볼 것 같으면 빨리 제자리로 가야 돼!”


빛으로 둘러싸인 은수의 마음속엔 이제 두려움이 스며들지 않는다. 등 뒤의 서늘하던 느낌들도 이제 간질간질한 정도뿐이 안 된다.


딴딴딴 딴!

영원히 계속되면 좋을 것 같은 젓가락행진곡이 끝나고 마지막 음이 울러퍼지는 순간 은수의 옆자리의 기운도 갑자기 순식간에 삭, 사라졌다. 건반위의 젓가락들도 사라졌다.


빈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은수는 뒤를 돌아본다. 뒤는 조용할 뿐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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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가락 행진곡 연탄 연주하는 모습은 아래를 참고해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gQ7dy1fstl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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