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던 다프네는 아폴론의 손이 자기에게 닿을 것 같자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아름다운 내 모습 때문에 괴로워요. 제발 다른 모습으로 바꿔 주세요!" 그러자 다프네의 몸은 순식간에 월계수 나무와 나뭇잎으로 변해 갑니다. 하얗게 아름답던 얼굴도, 바람에 휘날리던 머리카락도 금세 굳어 딱딱하게 변했습니다.
그리스신화 동화책을 읽던 소녀는 책장을 넘기며 한숨을 폭 내쉰다.
'다프네는 참 좋겠다. 무서운 일이 생기면 나무로 변해 도망칠 수 있으니까.'
그때,
"손전등 어디 갔어? 도대체 너는 뭘 제대로 두는 법이 없어!"
문이 벌컥 열리고 엄마가 갑자기 또 소녀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소녀는 깜짝놀라 책을 덮고 엉거주춤 일어나며 말한다.
"...어,어디 있었는데? 난 본 적 없는데..."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다시 매서운 채찍처럼 말이 쏟아져나온다.
"네가 집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 관심 가진 적이나 있었냐? 책장 서랍안에 내가 분명히 두었었는데 없잖아. 그러게 내가 정리 좀 하고 살라고 했는데, 방은 항상 너저분하고!"
한두번 들어본 소리는 아니지만 언제나 처음인 듯 한마디 한마디가 소녀의 마음을 쿡쿡 찌르며 세게 박혀든다. 금세 눈에 눈물이 고이지만 우는 걸 보면 더 화를 낼 테니 침을 꿀꺽 삼키면서 간신히 참는다. 목이 바들바들 떠는 게 느껴진다.
"내가... 찾아볼게."
소녀는 엄마의 괴물처럼 매서운 눈길과 가시돋친 목소리를 피하려고 허둥지둥 방을 나선다. 마루로 나오자 위태위태하게 눈가에 걸려있던 눈물방울이 바로 뚝 떨어진다. 자주 있는 소녀의 일상이다.
소녀는 학교에서 사람 친구가 없다. 하지만 그리스신화 동화책을 보고 난 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호등 옆에 있는 가로수에게 '다프네'라고 이름을 붙여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꼭 매일매일 나무에게 이야기를 한다. 나무의 수피에 손을 얹고.
어느날은 좋았던 과거를 이야기한다.
"전에 살던 집에는 나무가 있었는데 돈이 없어서 집을 팔고 여기로 이사왔어. 지난번에 그집에 가보니 우리집 마당이 없어지고 큰 건물이 들어섰더라. 하얀 라일락 나무 여왕님을 난 참 좋아했는데. 그 애들도 다 죽었나봐. 나 슬퍼서 담장 아래서 한참 울었다?"
또 어느날은 엄마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늘도 엄마가 나한테 화를 냈어. 엄마는 화낼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어쩔수가 없을 거야. 아마 엄마도 나한테 화내기 싫을 거야."
어떤 날은 얼굴에 멍이 들어 이야기한다.
"어제 엄마가 집에 없을 때 오빠가 갑자기 내방문을 열더니 머리를 발로 차고 갔어. 진짜 아팠다. 아니야,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 학교에서 뭔가 화나는 일이 있었나봐. 또 때릴까봐 무서워서 얼른 나와서 뒷골목에 앉아서 엄마 기다렸는데 엄마가 되게 안오더라. 너한테 오고 싶었는데 엄마가 밤늦게 어디 가지 말라고 한게 생각나서 혼날까봐 못 왔어."
소녀가 하루 이틀 사흘 나무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신호등 옆 가로수는 이상하게 더 잎이 무성해지고 가지가 굵어진다. 그리고 소녀는 이제 나무와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지 않는다. 마치 나무와 텔레파시로 이야기를하듯 소리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다. 가끔 아침이나 저녁 늦은 시간에 혼자 나무옆에서 그러고 있는 소녀를 사람들이 보고 이상하게 여겨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나가기도 한다.
어느날은 소녀가 깜짝 놀라서 엉겹결에 입밖으로 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럴 순 없어. 아니 진짜로 나도 그러고 싶긴 하지만 그러면 엄마가 슬퍼할 거야."
그러자 마치 아니라고 하는듯 바람에 나뭇잎이 살랑살랑 흔들린다.
그러던 어느날, 한밤중 인적이 드문 도로 옆 플라타너스 가로수들 사이로 소녀가 나타난다. 겁을 먹었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의 소녀는 입가가 터져서 피가 나와있다. 뭐에 놀랐는지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나와 한쪽발은 맨발이다.
소녀는 친한 친구라도 찾아온 듯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나란히 서있는 플라타너스 나무들 중 가장 키가 크고 잎이 무성하게 달려있는 나무에게 다가가 손바닥을 얹는다. 마치 그 손바닥에 나무의 숨결에 따른 움직임이 느껴지듯 온주의를 기울여. 소녀는 잠시 그러고 서있다. 표정이 조금 편안해진다.
손을 떼고 이번엔 팔을 크게 벌려 처음엔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하지만 곧 힘을 주어 나무를 꼭 끌어안는다. 계속 꼭 끌어안는다. 떨어지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한결 안심한 얼굴이다. 뒤이어 소녀는 나무의 거칠거칠한 수피에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는 귀라도 달린 것처럼, 나무와 자신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조용히 속삭이기 시작한다. 역시 처음엔 조심스럽게 하지만 나중엔 빠르고 점점 분명하게.
속삭임이 계속 될수록 소녀와 나무 사이의 공기만 미세하게 파장을 이루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조용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소녀의 입술이 닿을 듯 말듯 닿으며 입김과 목소리를 불어넣던 곳에서부터 조금씩 작은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작은 틈은 금세 마치 귤껍질이 까이듯 떨어지더니 소녀 한 사람쯤은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벌어졌다.
소녀는 속삭임을 멈추고 벌어진 틈 앞에서 조용히 서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지만 표정은 평온하다.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마저 떠오른다. 드디어 결심한 듯 나무껍질의 끝을 잡아 양쪽으로 더 크게 벌린다.
갈라진 나무 틈으로 들어가기 전, 소녀는 뒤를 돌아본다. 검은 밤하늘에는 멀리서 아주 작은 별이 희미하게 빛나고, 인적이 끊긴 도로 위에는 자동차 대신 바람이 지나간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지막 풍경. 숨을 한번 들이쉬고 소녀는 성큼 발을 들여놓는다.
훅, 벌려졌던 따뜻하고 촉촉한 나무의 속살들이 소녀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드럽게 감싼다. 순식간에 소녀의 몸은 나무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다. 점점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소녀는 마지막으로 생각한다. 아, 나무는 정말 따뜻하구나... 다정해. '진짜' 엄마 같애... 잠시후, 나무의 틈이 다시 스르륵 메워지고 이제 밖에는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