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1장
신이문에 위치한 옥탑, 원룸.
장마철 잦은 비로 덥고, 또 습하다.
이곳의 장점은 신이 노하더라도 물에 잠길 위험은 없다는 것이고
단점은 재개발을 앞두고 있어 집주인이 집 관리에 다소 소홀하다는 것이다.
소정과 민서가 이사 올 때부터 지붕 틈 사이로 전봇대 전기선이 조금씩 보이지만
두 사람은 이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소정과 민서의 원룸에는 아날로그 3 : 4 화면비의 티브이 대여섯 대가 큐브와 섞인 채로 배치되어 있다.
민서가 동네에서 하나둘 주워 오던 것들이다.
극 중 이 티브이 화면을 통해 이미지나 텍스트가 송출된다.
무대에 송출되는 텍스트와 이미지는 희곡 내에서는 분홍색으로 작성되어 있다.
무대 위 소정과 민서는 큐브와 티브이를 가구 대용으로 사용한다.
그 위에서 밥을 먹거나, 잠을 자기도 한다.
그 외 공간은 모두 사실적인 사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조잡한 페인팅으로 가득 찬 파란색 가벽들과,
쓰레기를 꽉꽉 채워 야무지게 묶은 이문동 전용 쓰레기봉투 더미,
송골매 신곡 모음 레코드판,
작은 자개 문짝 같은 것들.
하지만 2부 전까지는 조명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소정 그리고 민서.
두 사람은 서로를 끔찍하게도 아끼고 의심한다.
소정, 라디오를 앞에 두고 있다.
지직, 지지직, 지지직.
라디오가 장마철 폭우처럼 울며 드문드문 소리를 뱉어낸다.
라디오 소리 [신이문역…… 이문2동의 재개발을…… (앞두고―는 묵음 처리) 도시 재정비…… (위원회―는 묵음 처리)는 노후, 불량 건축물이 밀집해 열악한 주거 환경 개선이 필요한……]
소정은 심각한 표정으로 라디오를 몇 번 때리거나 높이 들어 올려 신호를 잡아 보려 한다.
소정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아이 캔 두잇.
소정은 의자 위로 올라가 발을 힘껏 딛고 라디오를 최대한 위로 올린다.
기적처럼 다시 신호가 잡힌다.
라디오 소리 [최근 주식 시장에 격변이 불어오며 남녀노소 다소 충동적인 투자를…… 정부는 이에 대해]
소정 아니야! 이게 아니라고!
소정, 있는 힘껏 라디오를 때린다.
라디오 소리 [꿈을 포기한 사람들, 작가, 철학가, 영화인……]
소정 됐다!
라디오 소리 [소설가, 수필가, 사업가, 극작가, 지식인, 칼럼니스트로 유명한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나는 내 젊은 날의 꿈을 서른 번도 넘게 배반했다 말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신 영화, 〈방가방가〉의 육상효 감독님이 하신 말이 기억나는데요. 꿈이 바뀐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부끄러운 건 꿈이 없어진 것이고, 더 부끄러운 건 꿈을 핑계로 삶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이옥섭 감독님의 단편 영화 〈플라이 투 더 스카이〉에 나오는 내레이션이죠. 감독님은 올해 신진 예술가 지원 사업을 하고 계시죠. 꿈을 포기한 사람들에서는 저번 주 사연 신청을 받아 감독님에게 전달했습니다. 감독님이 이번 주 사연 당첨자를……]
쾅 소리가 들린다.
소정, 놀랐지만 침착하고 빠르게 의자 위에서 내려와 라디오를 구석에 밀어 숨긴다.
라디오 소리 [선정하여……]
소정 (소정, 라디오를 발로 차며) 잠시만요!
소정, 달려가 문을 연다.
아날로그 티브이를 안고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민서.
민서 도와줘…….
소정 이마가 빨개.
민서 부딪혔어…… 이것 먼저…….
소정, 민서 힘을 합쳐 티브이를 올린다.
민서 어때? 쓸 만하지? 옆 옆 건물 할아버지한테 허락받고 가져왔어.
소정, 기억이 잘 안 나는 눈치다.
민서 왜, 우리 옛날에 콩국수 먹으러 간 날. 하얀색 러닝셔츠 입고 집 앞에 앉아서…….
(소정 보고) 아니다. 어쨌든 다음 주에 나가신다길래.
소정 어따 쓰게?
민서 봐서. 잘 고치면 당근 마켓에 팔 수 있을지도 몰라.
소정 저걸 다?
민서 다는 아니더라도. 버리면 아깝잖아.
소정 너는 꼭 저런 거에 집착하더라.
민서 저런 거?
소정 오래되고, 조금 낡고, 추억 같은.
민서 마음 아프잖아.
민서, 옷을 벗어 걸고 앉는다.
소정, 삐죽 튀어나온 라디오 끝을 발로 자연스럽게 밀어 넣고 민서 옆에 쪼그려 앉는다.
민서, 가방을 끌어와 비닐봉지 하나를 꺼낸다.
소정 뭐 가져왔어?
민서, 비닐봉지에서 초록색 청경채를 꺼낸다.
소정 꿔바로우가 좋은데…….
민서 나도 그래.
소정 사장님한테 얘기해 봤어? 난 꿔바로우가 좋다!―하구 당당하게.
민서 했는데, 알바가 꿔바로우를 가져가는 건 좀 사치래.
소정 저번 주엔가 한 번 줬으면서.
민서 너무 자주 그러면 버릇 잘못 든대.
소정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민서 (사이) 내가 웃긴 얘기 하나 해줄까? 오늘 일 하는데 사장이 와서 나한테 코딩 배워 볼 생각 있냐고 그러더라?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코딩을 배운대. 옆집 사는 초등학생도 코딩을 배우고, 회사원도
배우고, 주부도 배우고, 심지어는 대학 가서도 코딩은 배운다는 거야. 소정아, 진짜 대학 가면 코딩 배워?
소정 글쎄…….
민서 근데 알고 보니까, 사장 아들이 학원 연대. 코딩 학원. 수강생 유치, 그런 거지.
소정 헐.
민서 게다가 달에 얼만 줄 알아? 삼십오만 원이래.
소정 양심 없는 새끼.
민서 세상 사람들은 내가 바본 줄 아나 봐. 코딩 그런 거 배워서 어디에 쓰겠어.
소정 아니야, 그건. 분명 배워두면 어딘가 쓸 데는 있을 거야. 우리 좀 봐.
소정, 벌떡 일어나 한쪽 발로만 선다. 중심을 잡으며.
소정 모두가 쓸모없다고 했지만, 요가랑 공중곡예 배운 거 잘 쓰고 있잖아.
소정, 손으로 발을 잡고 위로 든다.
소정 자취할수록 스트레칭이 중요하다고. 신문에서 봤는데, 특히 원룸에 자취할수록 척추뼈가
자주 으스러진대. S자로 휘어버리거나, 아니면 다리가 굳어버리거나.
민서 그럼 공중곡예는?
소정 그것도 분명 어딘가 쓴다. 기다려 봐.
소정, 옆으로 쓰러진다.
소정 뭐든, 배워두면 도움이 되는 거야.
민서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민서, 소정을 일으켜준다.
민서 그럼, 나 코딩 배워?
소정 배우고 싶어?
민서 한 달에 사백만 원을 벌 수 있으면 배우고 싶을 것 같은데. (손가락으로 계산하며)
지금은 사십만 원을 버니까…… (고민하다) 배우기 싫다.
소정 아직 때가 아닌 거야. 기다려 봐.
두 사람, 어느새 마주 보고 바닥에 누워 있다.
둘 사이에는 어느 정도 사이가 존재하지만 방이 좁은 탓에 멀리서 보면 아주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서 고생했어.
소정 뭐가?
민서 원래 집에서 작업하는 게 제일 힘든 거래. 프리랜서 같은 거.
소정, 대답 없다.
민서 너, 살바도르 달리 알지? 그 사람, 유학파야?
소정 그럴걸.
민서 어쩐지. 그 사람이 그랬다며. 나는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혀에 가시가 돋는다…… 그래서 그 가시를 떼고, 아니 가시를 뗄 수 있나? 뽑고? 여하튼. 떼거나 뽑고 병에 보관하는 일은 귀찮기 때문에 매일매일 그림을 그린다. 매일매일 그려야 매일매일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할 수가 있다…… 기억해놨다가 너한테 얘기해줘야지, 했어.
소정 그런 건 또 어디서 봤어?
민서 우리 집. 책장에 있던데.
소정 맞아…… 그랬지.
민서 오늘은 뭐 그렸어?
소정, 고민한다. 아주 오래.
소정 ……베르나르 앙리 레비를 그렸어.
민서 나도 보여주라.
소정 아직 덜 그렸어. 사실, 거의 그리지 않은 것과 비슷해. 그리고, 미완 작품은 누구 보여주는 거
아니야.
민서 그럼 얼른 완성해라, 응? 그리고 제일 먼저 나한테 보여줘.
소정 완성하면.
소정, 뒤 돈다.
소정 넌 너무 좋은 애야.
민서 나 별로 좋은 애 아닌데.
소정 나 못 믿어?
민서 믿어야지. 난 네가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해도 믿을 거야.
민서, 소정의 등을 껴안는다.
민서 조금만 기다려. 내가 아주아주 부자가 되어서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게 해 줄게.
소정 (아주 작게) 안 그래도 되는데…….
민서 나는 좋은 애. 넌 멋있는 애. 이렇게 나눠 하자. 우린 환상의 룸메이트야.
민서 웃으면 소정 따라 웃는다.
소정, 웃다가 멈추고.
소정 달리 죽여 버리고 싶어.
민서 (놀라서) 헐. 그 사람 아직 살아 있어?
[사진 하나가 어두운 화면에 뜬다.]
[민서의 손바닥을 찍은 듯 보이는 사진이다.]
[수성펜으로 쓴 살바도르 달리-(발음 잘하기),]
[머나시아 항공이라는 글씨]
[그리고 붉은색 화살표]
[모두 다 땀에 조금씩 번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