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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제인 Nov 09. 2022

구와 마젠타

1부-2장

2장




바닥에서 깜빡 잠이 든 두 사람 옆에 작은 물웅덩이가 고여 있다. 
 천장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져 고인 아주 작은 물웅덩이. 
 소정이 먼저 잠에서 깨 이마를 만진다. 

물이 튄 이마가 온통 축축하다. 
소정, 현관에서 우산을 가져와 펼치고 민서 옆에 둔다. 

쪼그리고 앉아 민서를 바라보는 소정. 


소정    민서야. 


 민서, 대답 없다. 


소정    민서야. 


 민서, 대답 없다. 


소정    바보.

민서    바보 아닌데. 

소정    뭐야, 안 자네. 

민서    우산은 뭐야? 

소정    너 비 맞을까 봐. 


 민서, 일어나 우산을 접으려다가, 티브이 더미에 씌워둔다. 


민서    티브이 가져오길 잘했다. 밖에 있었으면 고장 났을 거야. 

소정    밖에 비 많이 왔나?

민서    그러면 천장에서 북 두드리는 소리 나잖아. 그냥 고이기만 많이 고인 것 같아. 


 민서, 소정 함께 천장을 바라본다. 검지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구멍이 있다. 


소정     (구멍의 크기를 헤아리며) 좀…… 심하지? 그래도 이제 좀 있으면 장마철 지나니까, 괜찮지             않을까? 

민서    우리는 괜찮지만. 티브이 주워 온 것들은 고장 나지 않을까? 

소정    아. 맞네……. 

민서    어떻게 하지? 예전에 이것 때문에 주인 할아버지한테 전화해 봤는데.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거든. 

소정    어이없다. 

민서    주인이, 이 근방에 집이 두 챈가 더 있대. 그래서 바쁘다고 그랬어. 


 물방울이 계속해서 떨어진다, 규칙적으로. 


민서    구멍이 작년보다 더 커진 것 같애, 그렇지. 

소정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민서    긍정적으로…….


 민서 소정, 함께 웅덩이를 바라본다. 


민서    집만 아니었으면 꽤 예쁜 것 같기도 하고……. 

소정    호수라고 생각하자. 부자들 집 중앙 정원에 있는 인공호수 같은 거. 


 사이.


소정    이런 걸 꿈꿨었는데. 백화점 VIP, 멧 갈라에 초대받고 빌 게이츠랑 저녁 식사하는 그런 건 너무 부담스럽고. 소소하고 소박하게 정원 잔디 깎고, 인공호수 옆에 테이블 만들어서 너랑 꿔바로우 먹고…….

민서    유학도 가고?


 소정, 하하 소리 내어 웃는다. 


소정    유학이 소박한가?

민서    빌 게이츠보단……. 

소정    맞아. 그렇네. (사이) 응. 유학도 가고 싶었지. 


 민서, 무어라 이야기를 하려다 만다. 


소정    민서야, 눈 감아 봐. 보여줄 거 있어. 


 민서, 눈 감는다. 

소정, 말없이 침대 밑에서 상자 하나를 꺼낸다. 

먼지를 쓱 털고 뚜껑을 연다.
 상자 안에는 또 다른 상자가 있고 또 다른 상자 안에는 또 다른 상자가 있다. 

소정은 상자를 연다.

열고, 또 연다.


민서    뭔데.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정    베르나르 앙리 레비 말하는 거지? 

민서    그래, 그거. 그거 말하려고 했어.  


 안에는 물감 튜브가 여럿 들어 있다. 
 소정, 물감 튜브를 한가득 쥐고 다시 상자를 침대 밑에 넣는다.


소정    이제 눈 떠도 돼. 


 소정, 물감 하나를 꺼내 민서에게 내민다.


민서    이게 뭐야.

소정    물감이잖아. 


 소정, 민서 물감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소정    소박하게. 집에 인공호수 꾸미는 것부터 하는 걸루. 

민서    (물감을 받아 들어 튜브 옆면의 글자를 읽는다) 아쿠…… 아쿠아 그린…….

소정    파란색이야, 그냥. 

민서    아쿠아는 물이고. 그린은 초록색이잖아.

소정    파란색으로 퉁친 거야.

민서    파란색이면 안 되는데…….

소정    왜?

민서    그런 게 있어. 

소정    그럼 무슨 색이 좋은데?

민서    빨간색.

소정    없는데…… 그리고 (웅덩이를 가리키며) 호수를, 빨간색으로?


 사이.


소정    너한테 중요한 거야? 

민서    응!


 소정, 물감 튜브를 헤아리다가 하나를 더 민서에게 내민다. 


소정    빨간색은 없고. 대체품은 있어. 그것도 괜찮아?

민서    아쿠아 머시기보다 뭐든.

소정    (물감 내밀며) 자. 


 민서, 물감을 받아 들고 옆면을 읽으려다, 고민한다.


민서    마젠타네. 

소정    이 색 알아? 

민서    이 색을 잊을 수가 있어? 


 민서, 물감 튜브를 들어 올려 관찰한다.


민서    미쳐버린 분홍색이잖아.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소정, 잠시 생각한다.


소정    아……. 


 두 사람, 서로를 바라본다. 

마음이 통한 것처럼, 일사천리로 좁은 방 안을 뒤진다.


민서    (청경채가 든 봉투를 들어 올리며) 청경채도 올릴까?

소정    그래. 부자들은 나무도 가져와서 심으니깐. (서랍을 열어 이면지 뭉치를 꺼내며) 종이배 올릴래?

민서    나, 종이접기 자격증 있어. 


 민서, 종이를 접는 동안 소정은 청경채를 물웅덩이 주변에 둥글게 세운다. 
 어느새 민서가 접어둔 종이와 인공정원의 뼈대가 완성된다. 


민서 잠깐만. 


 민서, 마젠타 물감을 숭고하게 들어 올린다. 

인공호수에 한 방울, 두 방울을 풀어내고 물감이 퍼지는 동안 성호를 긋는 민서. 


소정    소원 빌지, 너. 무슨 소원이야?

민서    나중에 이뤄지면 말해줄게. 


 두 사람은 인공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다. 


민서    역시. 이 색깔, 참 이상하다. 

소정    나도 잘 안 써, 이건. 

민서    처음 봤을 때도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땐 더 심하게 생각했어. 진짜 못생겼다고.

소정    봉사 갔을 때 말하는 거지?

민서    그래. 벽화 봉사 갔을 때. (사이) 지금은 이 색 좋아. 이상한데 좋아서 더 기묘해. 네 그림 덕분인 것 같아. 

소정    그때 내가 (사이) 꽃 그렸던가. 

민서    응. 마젠타 색 장미를 그렸었잖아, 완전 더러운 벽이었는데, 네가 그림을 그리고 나니까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는데. 대충 그렸는데도 장미 꽃잎 같은 게 막 살아 있고. 아직도 그 미쳐버린 분홍색이 눈앞에 아른거려. 천재 같았는데, 너. 아니, 천재라고 생각했어. 

소정    그런 건 아무나 다 해. 

민서    천재라고 생각해. 


사이.


소정    넌, 그런 거 기억 잘하더라, 보면. 

민서    나한테 제일 좋았던 기억 중 하나니까. 이 색이 행운을 가져다줄 거 같아. 그때처럼. 

소정    민서야.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그때 소정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요란한 벨 소리에 소정이 핸드폰을 꺼내 든다. 

[푸푸 아트 아카데미] 

소정의 표정이 좋지 않다. 


소정    민서야, 나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 

민서    누군데 그래? 


소정, 도망치듯 밖으로 나간다. 


민서    통화 여기서 하지……. 


소정은 호수 옆에 웅크리고 앉는다. 

민서도 핸드폰을 꺼내고 손바닥을 펴 번갈아 확인한다. 


[화면에 영상이 송출된다.]

[화면에 마젠타 색 그래프가 요동치고 있다.]

[또 다른 화면에는 소정의 옆모습이 뜬다.] 
 [단조로운 컬러링 음악이 울리고 고민하던 소정은 전화를 받는다.]
 [소정이 듣는 라디오 디제이의 목소리와 똑같은, 차분한 음색의 전화를.]

[또 다른 화면에는 푸― 푸― 아카데미 홍보 영상이 연속 재생되고 있다.]
 [웃는 학생들, 합격자 명단, 외국 대학교 교정의 모습,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의 뒷모습.]

[다시]

[웃는 학생들, 합격자 명단, 외국 대학교 교정의 모습,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의 뒷모습.]


화면이 나오는 동안, 계속해서 대화가 진행된다.


 
[안녕하세요, 작년 미국, 캐나다, 벨기에, 프랑스, 독일 미대 총 오십 명의 합격자를 배출한 에프오유에프오유, 푸― 푸― 아트 아카데미입니다. 김소정 학생 본인 맞으실까요?]


소정    네. 제가 김소정인데요. 


 [문의해주셨던 포트폴리오 1회 무료 첨삭 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소정    지금은 구월이잖아요. 이월에 연락드렸던 건데. 


 [학원 규정상 선착순으로 연락을 드리다 보니 시간이 지체된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포트폴리오 상담은 부원장님이 진행하시고 있는데 전화를 바꿔드려도 괜찮으실까요?]


 소정, 대답 없다. 


 [전화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다시 한번, 단조로운 컬러링 음악이 이어진다. 


민서    (심각하게) 무슨 일 있나? 나가 볼까? 


 [안녕하세요, 부원장 김연서입니다.] 


민서    (손가락으로 번갈아 세며) 소정이 사생활을…… 지켜준다, 만다…… 지켜준다, 만다……. 


 [학생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소정    김소정입니다. 


 [아, 김소정 학생… (종이를 넘기며) 그림 배워 본 적 있어요?]


민서    지켜준다……. 

소정    입시 미술 했었습니다. 옛날에 잠깐……. 


 소정의 표정이 굳어 있다. 

목소리가 빠르게 지나간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할게요. 보내준 포트폴리오도, 기본기는 있어요. 살짝 어색하긴 한데, 구도나 비례 같은 건 사실 학원에 와서 한두 달 하면 금방 잡히는 거니까. 그리고 사실 요즘 외국 대학이 원하는 건 본인만의 스타일이지, 한국 입시 미대 스타일이 아니란 말이야. 그렇죠? 근데 본인은 입시 태가 너무 많이 남아 있기는 한데, 개성이야 학원에 와서 많이 그려 보면서 만들면 되니까. 학원에 오면 충분히 잡아줄 수 있는 스타일이다…. 그런 말을 하고 싶고. 근데 문제는, 이 그림 있잖아, 구의 증명, 이라고 이름 붙인 이거. 왜 흰색을 중앙에 올리다가 말았어요?]


 소정의 옆모습, 뭔가를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겨우 한마디를 꺼내는 소정. 


소정    저기, 근데요. 대체 왜 이제 와서 전화하셨어요? 


[소정의 옆모습과 학원의 홍보영상이 꺼진다.]

[마젠타색 그래프는 계속 요동치고 있다.]

[옆, 어두운 화면에 동영상이 하나 더 송출된다.]

[소정과 민서의 인공호수에 띄워둔 종이배가 붉은색으로 물들어 빠르게 식어가는 패스트 모션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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