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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 우산 Nov 08. 2023

한바탕 꿈인 듯

뉴욕 마라톤 관람기


초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함께, 방과 후, 서대문에서 신촌까지 뛰어가곤 했었다. 차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므로, 달기기 하는데,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고 계속 뛰려면, 인도가 아니라, 차라리 차도에서 뛰는 것이 수월했었다. 그런데, 달리기는 별로 힘이 안 들었지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매연이었다. 특히 당시에는 버스의 매연이 심했는데, 특히 아현동 언덕을 올라가노라면, 버스가 내뿜는 시커먼 연기를 바로 버스 뒤에서 뛰어가며 그 연기를 들이마시면서 따라가다 보면, 코 주위가 시커멓게 될 정도로 심했었다.


뉴욕에 와서 살면서, 젊었을 시절, 학교 선배님이신, 내과 의사 선생님이 건강 검진 후, 상담을 하면서, 나처럼 맥박이 빠르지 않은 사람에게는 정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장거리, 말하자면 마라톤 같은 운동을 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신체구조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어렸을 적에, 그리고 군대에서도 구보를 할 때는, 주위의 친구들에 비해, 별로 힘들어하지 않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딸네미가 나의 그런 말을 들어서 그랬을까? 고교 시절 방과 후 특별 활동으로 장거리 달리기를 선택했었다. 그런데, 너무 많이 뛰다 보니, 한 때는 무릎이 아파서 고생한 적도 있었다. 장거리 달리기가 결코 쉽지는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언젠간 나도 마라톤을 한번 뛰어보고 싶단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과 실제로 결행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마라톤 코스 전 구간을 여러 번에 걸쳐서 동영상으로 찍어서 유튜브에 올려보았다. 덕분에, 내가 직접 뛰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구간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로 먼 거리이다. 그 구간 전체를 뛰어서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는 공원에 갔다가 나오는데, '엇?' 길을 건널 수가 없게 생겼다. 어느새, 경찰 저지선이 쳐져있고, 길을 못 건너가게 하는 것이다. 곧 하프 마라톤이 시작된단다. 기대도 안 했었지만, 그래도 모처럼 진귀한 구경을 하게 생겼다. 마침 나한테 셀폰이며, 고프로 같은 카메라도 갖고 있으니, 차제에 겸사겸사 동영상도 찍어 보기로 했다. 구경 나온 동네 사람들은 각종 크고 작은 카메라나, 아니면 셀폰 정도는 모두 하나씩 손에 들고 있다. 드디어 선도 경찰차가 두 번 지나가고, 선두 그룹이 나타났다. 그런데....


난데없이 듣기 싫은 소리가 터져 나온다. 대부분의 구경꾼들은 환호를 지르거나 박수를 쳐주는데, 내 옆에 있는 중국인 무부는 '쏼라 쏼라' 중국어로 떠들며, 특히 여자는 '짜이오!'를 외치기 시작한다. 얼마나 그 목소리가 큰지, 차라리 내가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을 정도다. 근데, 옮길 수가 없다. 옮겨서는 안 되는 것이, 내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은 바로 90도로 꺾어지는 부분에서 양쪽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최고 꼭짓점이기 때문이다.

역시 중국인은 남자보다 여자가 극성스럽다는 것을 또다시 증명이라고 하듯이, '짜이오!' '짜이오!' '짜이오!'.... 염치도 없고, 예의도 없이 계속 질러댄다. 여자 목소리가 왜 또 그리도 큰지 모르겠다. 아니, 하프 마라톤이 국가 대항 시합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국인들이 특별히 많이 참가한 것도 아니다. 아시아인들이 가끔 보이기는 해도, 한국인, 일본인, 동남아인, 인도인들도 모두 섞여 있구먼, 저 여자 눈엔, 온통 중국인으로만 보이는가 보다. 주위에 있는 미국인들에게는, 같은 동양인으로서, 내가 다 창피하다. 나도 도매금으로 중국인으로 보일까 봐. 참다못해 나도 크게 한 마디가 터져 나오려고 한다.


'야!' '시끄러워!' '니 눈엔 중국 사람만 보이냐?' '이게 국가 대항 시합이냐?'...라고 했다간... 한바탕 싸움이 날 건 뻔할 정도로, 그녀의 기세가 당당하기가 시진핑은 저리 가라일 정도다. 내가 그냥 참고 말지. 그보다도 더 큰 문제는, 내가 망했다. 편집을 할 생각을 하니 끔찍하기 때문이다. 동영상 제작에 있어서는, 촬영은 쉽고, 금방 끝나지만, 편집은 힘도 들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돌아와서 편집을 하려는데, 그놈의 '짜이오!'를 지워야 하는데, 너무 많이 떠들어대서, 편집하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일일이 지우는 것도 문제지만, 그 삭제된 음향을 대신 다른 것으로 메워야 하는데, 하다 하다 너무 일거리가 많아서 내팽개쳐야 했다.


 

차제에, 하프 마라톤이 아니라, 정식 마라톤을 찍어야겠다 싶어서, 길을 나섰다. 지난해에 마라톤을 처음으로 구경해 본 경험을 살려서, 이번에는 기획 단계부터 잘 짜보았다. 즉, 무조건 구경할 것이 아니라, 어디서 무엇을 볼 것인가를 궁리해 보았다. 뉴욕 마라톤에는 5만 명이 참가하기 때문에, 모두가 한꺼번에 스타트하는 것은 아니고, 마라톤 선수들을 뺀 일반 주자들은 Wave 1, Wave 2 이런 식으로 뛰기 때문에 하루 종일 마라톤 대회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선두 그룹을 보는 것일 것이다. 그러면 그 선두 그룹을 어디서 볼 것인가?.

선두그룹을 보려면, 시간을 정확히 계산해서, 그 시간에 맞춰가면 된다. 하지만, 작년에는 내가 왜 선두 그룹을 놓쳤냐면, 주말에는 지하철이 자기 맘대로이기 때문이었다. 노선도 그렇고, 시간은 물론이고... 그래서 작년에는 갑자기 바뀌어버린 전철 노선 때문에, 돌아오는 전철로 갈아타고 그것도 모자라 걷고 하는 바람에 내가 계획한 시간보다 훨씬 지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차를 끌고 가는 것은? 더 위험천만한 것이, 도로가 이곳저곳이 통제되기 때문에, 지각은커녕 아예 참관도 못할 수가 있다. 그러면? 물길을 이용하는 것이다. 물길에서는 Traffic이 안 걸린다. 그래서?

페리를 두 번을 타면 된다. 어차피, 마라톤이 있는 날에는 내가 살고 있는 스태튼 아일랜드를 빠져나가려면, 페리 만한 것이 없다. 페리 선착장에 도착해 보니, 음악 소리에 박수갈채며, 환호성 소리가 요란하다. 주체자 측 봉사 인원들이 보내주는 격려가 열렬하다. 작년에는 몇몇 봉사요원이 개인적인 응원을 해 주었는데, 올해는 많은 인원이 도열해서, 마치 올림픽 때, 선수단 입장 때처럼 해준다. 벌써부터 축제분위기이다. 마라톤 주자들이 함박웃음에 결기들 또한 대단해 보인다. 맨해튼에 도착하고 다시 두 번째 탈 페리를 기라리면서 보니 스태튼 아일랜드 페리가 평소보다 뻔질나게 들락날락한다. 맨해튼에서 스태튼 아일랜드로 주자들을 모두 실어 나르기 위해서이다. 5만 명이 된다 하니, 엄청난 인원이다. 그도 모자라서, 다른 노선의 Seastreak 같은 큰 페리까지도 동원되었다. 한바탕 큰 잔치가 벌어진 듯하다. 그러면, 

어디서 볼 것인가? 두 군데서 보면 제일 좋을 듯싶다. 마라토너들이 제일 힘들어한다는 오르막길, 뉴욕에서는 그것이 바로 현수교인데, 그것도 중간 지점을 지나고 난 직후에 있는 퀸스보로 브리지란다. 그래서 그 브리지를 힘겹게 지나고 난 후에 1번가 쪽으로 회전하는 그곳에서 응원을 제일 많이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에서 마라토너의 선두 그룹을 만나보는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페리는, 루스벨트 아일랜드 가는 노선을 택했다. 루스벨트 아일랜드에서는 맨해튼으로 들어가는 케이블카가 있는데, 노선이 변경될 리도 없고, 자주 운행하기 때문에, 절대로 지각할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케이블카 도착점이 바로 내가 가려고 하는 퀸즈보로 브리지 만나는 바로 그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럼 두 번째 장소는?  

첫 번째 장소에서 본 그 선두그룹은 맨해튼의 1번가를 따라 뛸 것이다. 그것도 한참을... 그리고 브롱스에서 조금 뛰고는 다시 맨해튼으로 들어와서 5번가를 또 한참을 뛰어야 한다. 그들이 그 길들을 뛰는 사이, 나는 서쪽으로 6 블록만 걸으면 된다. 그러면 센트럴 파크의 남단이면서 59가가 만나는 곳에 당도하는데, 그 코너 부분이 좋을 듯싶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두 지점에서 모두 선두 그룹을 제대로 볼 수가 있었다. 그것도, 여자들과 남자들 그룹 모두를 말이다. 구경 내내 미국인들이 질러대는 소리와 그리고 주체자 측에서 마련한 밴드의 음악과 어우러져 한바탕 흥겨운 축제 분위기이다. 

더군다나 더 좋았던 것은 그 '짜이오!'를 외치는 중국 여자가 없어서도 좋았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로변에 나와서 구경을 할까? 뛰는 마라토너들이야, 본인의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완주를 하게 되면, 또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는, 도로변에 나와서 남 뛰는 것 구경하는 것도 힐링이 되는 것 같다. 자기가 아는 친구나 가족을 위해 피켓 들고 나와서 응원하는 사람들은 물론이지만, 아무 인연이 없는 사람들도 나와서 구경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그런 기쁨이 보인다. 그러다 갑자기 함성이 두 배, 아니 세배로 높아졌다. 

지체장애자들도 휠체어로 참가하는데, 물론 그들이 제일 먼저 스타트를 한다. 그런데 뒤쳐지는 주자들은 마라톤을 뛰는 이들과 함께 움직이기 마련인데, 함성을 받는 주인공은 가녀린 한 젊은 백인 여자였다. 그런데, 내가 있는 그곳까지 와서 기력이 정말 다 했는지, 속도가 줄기 시작한다. 그러자 주위 시민들이 더 열렬히 응원을 보내주는 것이다. 그러자, 다시 있는 힘을 다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인간승리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한 뜻으로 박수를 쳐주며, 또는 흥겹게 웃고 떠들며 응원하는 한쪽 구석에는, 잠시 잊고 있었던 어쩌면 잊고 싶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들이 뒤편에 도열해 있었다.

유태인들이다. 어느 지역에서건, 멸시 천대의 대명사처럼 따라다니는 민족,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늘 마주 대하는 그들, 이스라엘 인들이다. 이스라엘 기를 여러 곳에 꽂아놓고는, 하마스에 납치된 사람들의 사진이며, 하마스에 대한 비난등의 피켓들을 들고 서있는 것이다. 나도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이 있어서 그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그 피켓을 일일이 내 카메라로 찍어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 주었다. 침통해 있던, 그들이 고맙다고 하며,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바람에 내가 그만 또 오버하고 말았다.

내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는, '우리도 너희와 함께 한다. 우리도 너희 편이다. 우리 코리아는...' (그리고 혹시 오해할까 봐, 한마디를 더했다) '우리 사우스 코리아는....'이라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니까, 심각해 있던 그들 얼굴에 함박웃음에, 박수까지 터져 나왔다. 내 속의 나는 눈물까지 나왔다. 돌아오면서, 생각해 보니, 내가 글쎄, 윤 대통령한데, 양해 내지는 허락도 안 받고 오버 발언을 해버린 것 아닌가? 내 맘대로 나라 전체를 도매금으로 넘기고 말았으니...

다시 전철 타고 페리 타고 오면서 생각해 보니, 오늘 하루 마라톤 구경 한 것이 한바탕 꿈을 꾼 것만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페리 선착장에서부터의 박수와 환호소리, 그리고 퀸스보로 브리지에서 보았던 많은 숫자의 선두그룹, 그리곤, 끝나는 지점의 센트럴 파크에서는 띄엄띄엄 달리는 선두 그룹, 그리고 그들에게 보내는 환호와 박수 소리, 그 뒤편에서 우울하게 피켓 들고 있던 유태인들... 돌아오는 페리에서 바라보는 맨해튼의 황홀경... 이 모든 것이 마치 한바탕 시끄러운 꿈이 지나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이 우리네 인생도 일장춘몽이라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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