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라면서 몸으로 부딪쳐가며 조금씩 깨달아온 것 같다. 어렸을 적엔, 왜 그리도 시간이 안 갔던지.... 앞으로도 주~욱 계속, 아니 평생 어린아이로만 살 것만 같았다. 어른들은 좋겠다. 공부 안 해서 좋고, 숙제 안 해도 되니까. 근데, 어린 나는 왜 그리도 해야 할 것이 많던지, 숙제하느라, 손가락이 부르터가며(지금도 오른손 가운뎃손가락 끝이 굵다), 정말로 그 짐이 버거운데, 그런 세월을 앞으로도 한없이 가야 할 것 같은... 참으로 힘들고 참담한 세월을 어떻게 보내누 하며 살았었는데...
얼마 전 동기 동창의 카톡방에 난데없이 이런 글이 올라왔다. '우리 나이 이제 75세를 넘어 한국인의 평균 수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가 움직이고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다닐 수 있을 때 다니고 움직일 수 있을 때 마음껏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엥? 아니 벌써? 언제 내가 갑자기 그렇게 나이가 많이 먹었단 말인고?
군대에 들어가서 훈련받을 때도 마찬가지였었다. 훈련의 스케줄이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훈련도 끝나리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지긋지긋한 훈련이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상황이 나를 숨 막히게 했었다.
예전의 실미도 사건도 결국은 이런, 수감자들 입장에서 볼 때는 끝도 없이 훈련만 이어질 것 같은 숨 막히는 상황이 그런 끔찍한 극단적인 결말로 치닫게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암튼, 그러다가, 결국, 장교 훈련을 모두 마치고, 임관하고, 동기생들과 함께 서울로 향하는 그 길은 지금 생각해도 마치 꿈만 같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니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란 것은 상식적으로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나에게는 꼭 그렇게 적용되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곤 했었다. 매일매일 살다 보면, 내일도 오늘처럼 그럴 것이고, 또 모레도 똑같을 것만 같은 틀에 갇혀서 하루하루를 살아낸 것이..., 나만 그런 것일까?
공부하거나, 일하고 살아오다가, 이제 드디어 나도 은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결국엔, 나도 그 끝에 다다랐다는 얘기다. 그 끝의 뒤에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먼저 은퇴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루하루가 그렇게 재미있거나, 절대 행복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평생 일해온 나로서는 기다려지는 행복의 시작이 나에게 올 것만 같아서 기쁘다. 가장 큰 변화는, 이제는 출근을 안 해도 되는 것이다. 그것도 교통 체증을 뚫고 꼭 나가야만 하는 출근길을...
주위의 어떤 이는, 나더러 은퇴하고 갑자기 일에 손을 놓고는 무얼 할지 몰라서,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또 그래서 건강이 나빠질 수도 있으니, 무엇이라도 계속할 일을 찾아야 한다고 권고하는 이도 있는데, 난 꼭 그럴 것 같지만은 않다.
몇 년 전, 코로나 사태가 터졌을 때, 모처럼 출근도 안 하고 집에서 빈둥거리며 놀고, 맛있는 것 많이 해 먹고, 보고 싶은 것 실컷 보며(그래봤자 텔레비전였지만) 행복해했었던 시간을 떠올려보면, 은퇴 후에도 그런 행복한 시간의 연속이 나를 기다려 줄 것만 같아서, 나는 사실 설렌다.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그리고 바빠서 못했던 것, 영화도 많이 보고, 영상 촬영도 실컷 하고, 또 글도 많이 쓰고, 그림도 그리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그렇게 그 끝의 다음이 난 기다려진다. 죽음도 결국 마찬가지일까? 평생 고생하며 마음 졸이며 살아온 내가, 마음 편히 천국에서 더 이상 고생 할 것도 없이 행복하게만 지낼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 있는 것은 내가 정상일까? 아니면 나만의 착각일까?
암튼 그래서 내 장례식 때, 부를 찬송은, 슬픈 찬송이 아니라, 새 출발의 경쾌하고, 신나는 찬송으로 이미 주문을 해 두었다.
그런데... 이제 은퇴를 하게 되면, 당장 수입이 끊어지게 될 판인데, 이 철딱서니 없고, 대책 없는 노인네는 그래도 마냥 좋기만 한 것이다. 사실은 일 년 전에도 은퇴하고 여행을 다니려고 Mini Van도 장만했었는데, 건물주의 상황과 요청에 따라서 은퇴를 일 년 더 연장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나를 또 기쁘게 해 주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내 고객들의 반응이었다.
"왜 Business를 관두려 하느냐? 혹시 건물주가 Rent 비를 비싸게 받아먹으려고 그러지? 어디 옆에다 또 차리면 안 되겠냐?" 등의 위로와 떠나지 말라는 얘기들을 해 주었다. 그때마다, 난, 내 나이가 이제는 은퇴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하다며, 건물주와의 문제보다는 은퇴해야 할 나이 탓으로 돌렸다.
그런 얘길 듣고는, "은퇴를 축하한다"라는 예기도 많이 해주었다. 그러면서, 아쉬움의 표시로, 카드랑 그리고 꽃 선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돈까지 주는 손님도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받고 있었는지 정말 몰랐다. Business 했던 보람까지 느끼게 해 주니, 정말로 감사한 일이다.
내가 매일 해오던 일을 완전히 내려놓게 되니, 시원섭섭하고, 홀가분하다. 그러면서 한편 기쁘기에 한량없다. 돈은 더 이상 못 벌어도 상관없다. 그동안, 온 식구가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 아닌가? 그런데...?
막상 은퇴하고 보니, 꿈과 현실 사이에는 역시 괴리가 있었다. 동네 사람이 나에게 물어왔다. 은퇴했다더니만, 맨날 어딜 그렇게 나가 돌아다니느냐고.... 그 사람이 모르는 게 있다.
은퇴하자, 나보다도 사실 더 신바람 난 사람은 바로 집사람인 것 같다.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더 바빠졌다. 장가 안 간 아들 녀석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신나게? 두 집 살림하는 것이다. 아니, 아들 녀석이 운영하는 치과 병원의 뒷바라지까지 모두 세 군데 살림이다.
살림이 취미이고, 전공? (대학에서의)이었으니, 이제 자기 세상 만난 것이다. 고로? 내 처지는...? 완전 짐꾼이요, 개인 운전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뿐이랴? 원치 않아도, 이 집, 저 집, 그리고 병원까지, 살림하는 여자의 보조원이 되고 만 것이다. 만일, 앙탈을 부렸다간....?
맛있는 것 대신에, 홀로 라면에다 김치나 먹게 생겼으니, 맛있는 것 좀 얻어먹으려면, 말 잘 듣고, 졸졸 잘 따라다녀야 한다. 그래도, 여느 은퇴한 남편보다 조금 나은 점도 있다. 그건....
그동안 같이 Business를 운영해 오다 보니, 늘 24시간 함께 붙어 있어 버릇해서, 남들처럼 은퇴하고는 그동안 혼자 출퇴근하던 남편이 갑자기 마나님 옆에 껌딱지처럼 딱 붙어있기 시작하면서, '삼식이'라는 소릴 듣는 그런 밉상의 대상이 되는 상황은 면했으니, 이 또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