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급 박사 Jun 17. 2020

출발선에 서다.

준비#5 합격

사람 좋아 보이는 Dr.K의 미소와 함께 나는 드디어 연구자를 양성하는 코스의 출발선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너무 쉬웠다. 약 한 시간가량의 스카이프 면접만으로 합격이라니 말이다. 내가 어떻게 고생하고,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고, 맘을 졸였는데... 허무했다. 곧 학교에서 합격 통지서를 보내준다는 Dr.K를 굳게 믿고 있었는데 이틀, 사흘이 지나도 깜깜무소식이다. "어? 혹시 뭐 잘못된 거 아냐?" 하며 영어 공부를 다시 해야 하나 싶어 책도 뒤적거리고, 이력서도 다시 수정하고, 이런저런 일로 새벽까지 사무실에 남아있는데, 낯선 주소를 가진 이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Dear Mr....로 시작하는... 그래, 합격이다. 만감이 교차했다. 하던 걸 그대로 다 접었다. 차를 몰고 집으러 오는 길, 뭔가 기념할 것이 필요했는데, 다 닫았다. 홀로 쓸쓸히 문을 열고 있는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술도 먹지 않는 사람이 뭘 사랴? 새우깡 하나와 콜라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무렴 어때? 합격인데...


아들과 아내는 깊은 잠에 빠져 있고, 불이 꺼진 방 안에서 홀로 새우깡 봉지를 뜯어 젖혔다. 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과자를 꼽으라면, 바로 이 새우깡 아니겠는가? 짭조름한 새우깡 하나에 콜라 한 모금.. 이 맛이지? 새우깡에는 콜라지?


잠이 안 온다. 오늘을 어찌 잊으랴? 일찍 출근하는 아내가 일어나서는 새우깡 봉지와 콜라병을 보더니 한마디 한다. "꼴값을 떠는구나!" 이런 꼴값이라면 수백 번에 수천번이라도 더 하겠다.


기쁨의 강도로 따지자면 박사학위 수여가 최종적으로 결정된 순간보다 합격이 결정된 순간이 훨씬 더 기뻤다. 준비하는 과정의 고통 때문이었을까? 꿈꿔왔던 세월의 무게 때문일까? 


그렇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 출발선을 떠나고 나서 도착점에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말이다. 누구 하나 가르쳐주고 끌어주지 않는 곳에서 길을 찾아 돌고 돌아야만 겨우 보이는 그 점, 숟한 밤을 새우고 매일 같이 별을 보고 집에 들어가도 희미한 그 점, 그렇지만 나 혼자 힘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야만 하는 그 점... 그것을 위해 나는 그것이 무언지도 모른 채 출발점에 섰다.  


이전 05화 주사위 던지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