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피나의 음악노트 / 바로크 / 바흐

2.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by 조세피나

그 어떤 음악이라도 그 근본을 찾아 올라가면 바흐가 나온다.


클래식 음악에서 시조 격인 인물, 대위법을 완성한 작곡가, 독일의 3B(바흐, 베토벤, 브람스) 중에서도 단연 손에 꼽히는 바흐는 독일을 대표하는 작곡가다.

흔히 그를 ‘서양 음악의 아버지’(음악의 선구자라는 의미인데, 이는 표제 붙이기를 좋아하는 일본의 출판사에서 만든 말)라고 칭하기도 한다.


바흐의 음악은 시대를 아울러 21세기인 지금도 곳곳에 많이 등장한다.

TV, 영화, 영상물, 광고 등등.

성공회와 미국복음주의교회에서는 바흐를 그의 음악적인 업적으로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고 한다.

바로크 시대의 위대한 음악가인 바흐에서부터 서양음악의 큰 줄기가 시작되었다.

그를 빼고서는 서양음악을 논할 수가 없다.


바흐 하면 이름도, 초상화의 외모도 참 근엄해 보인다.

그의 곡의 제목을 굳이 떠올리지는 않더라도 그가 정립한 대위법, 푸가, 평균율, 무반주 합창곡, 오라토리오, 칸타타, 수난곡, 등 많은 작품이 떠오를 것이다, 바흐는 다양한 장르에서 1000여 곡을 작곡했다.


이는 그가 당시로서는 장수한 데다가, 소명의식(Calling)을 갖고 평생 성실하게 곡을 만들고 연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흐는 1685년 독일 중부 튀링겐 삼림지대의 소도시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나서, 1750년 7월 28일에 라이프찌히의 자택에서 사랑하는 부인 안나 막달레나와 가족들, 마지막 제자 뮈텔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참으로 복된 죽음이었다. (그의 유해는 성 요한교회의 묘지에 묻혔다가 후에 토마스교회에 이장이 되었다.)


그는 오르가니스트, 지휘자, 교회음악가, 작곡가로서 평생을 충실하게 살았다.

교회와 집을 오가면 부지런히 많은 을 작곡하고 신께 봉헌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음악은 거룩하고 경건하다.

그의 음악이 그의 기도이고, ‘거룩한 봉헌예물’이었을 테니까.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는 10월, 평일 미사의 영성체 후 묵상곡으로 바흐의 곡을 연주했다.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Jesus, Joy of Man’s Desiring)

‘바흐의 곡이기에’ 사람의 마음을 정화하고, 영혼을 씻어준다.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다. 그 영혼이 음악을 듣는다.


이 곡은 바흐의 칸타타 BWV147중 합창곡으로 독일어 원어 제목은 Herz und Mund und Tat und Leben(마음과 말과 행위와 생명)이다.

바흐가 1716년 바이마르에서 대림절 (크리스마스 전에 성탄을 준비하는 시기)을 위해 작곡했고, 1723년 라이프찌히에서 성모 마리아 방문축일(5월 31일)을 위해 지금의 형태로 개작해 발표했다.

본디 합창곡이지만 솔로곡으로도 많이 연주되는 곡이다.

나도 영성체 후 묵상곡이나 후주 등으로 오르간으로, 때로는 피아노로 연주하고는 한다.


조지 윈스턴(23년에 계한 미국의 뉴에이지 작곡가)의 피아노곡 중에 'Joy'라는 곡이 있는데,

이곡에는 바흐의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이 뭉근하고 재치 있게 숨어있다.

바흐 하면 무겁고 진지하고 종교적인 작곡가라고 생각하는데, 'Joy'에서는 제목처럼 그의 밝음과 기쁨,

사랑이 귀엽고 환하게 느껴진다.


바흐는 불우한 청소년이었다. 그는 9세 때 양친을 여의고, 큰형 요한 크리스토퍼(1671~1721) 집에서 살면서 독일 오르간 음악의 전통을 익혔다.

그는 교회의 오르간주자, 작곡가, 칸토르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기악곡과 성악곡을 작곡했고, 자식을 20명이나 두었다. (첫 번째 아내 마리아 발바라와 7명, 마리아와 사별하고 재혼한 두 번째 아내 안나 마리아 막달레나와의 사이에서 13명)이 중 세 명의 아들은 뛰어난 작곡가로 성장했다.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1710~1784), 차남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1714~1788),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1735~1785)가 아버지의 음악을 이었다. 이른바 '바흐의 아들들'이다.-


매주 칸타타를 작곡하고, 합창단을 지도하고, 칸토르로 27년간을 교회음악가로 봉직한 그는 도대체 언제 쉬었을까? 그 시대 사람치고는 오래 산 편이지만, 그의 삶이 얼마나 분주하고 녹록지 않았음을 예상할 수 있다.

그 와중에도 아내 안나 막달레나를 위해서 단순하고 귀여운 <안나 막달레나 위한 클라비어 곡집>, 장남 프리데만의 교육을 위한 <인벤션>도 작곡하고, 가족 사랑과 자녀 교육에도 힘썼다.

17세기 초엽부터 세상에 드러난 바로크음악의 총괄자, 대위법의 대가였던 그는 평생을 그의 고국인 독일을 떠나지 않고, 한평생을 독일에서 살았다.


음악가 바흐의 정신에는 ‘신앙’과 ‘장인정신’이 깊이 깃들여 있었고, 이는 그의 음악에 투영이 되었다.

그에게 음악은 하느님으로 받은 소명(calling)과도 같은 업이었으, 바흐는 그의 작품 끝에 ‘오직 하느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라틴어 문구를 서명처럼 남겼다. 그의 음악은 그의 '기도'였다.


바흐는 평생을 고국 독일 라이프찌히의 성 토마스 교회에서 수도자 같은 삶을 산 음악가였다.

(그는 라이프찌히의 수호성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성 토마스 교회는 대 작곡가인 바흐의 모태교회이지만 생각보다 작은 교회라고 한다.

이 교회는 종교개혁으로 세워진 루터교회이다. 라이프찌히가 속한 작센주는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본거지였다. 바흐가 집과 교회를 오가며 하루를 보냈을 그곳. 그가 지도했던 교회의 성토마스 소년 합창단은 지금까지도 명성을 누리고 있다.-


바흐의 B단조 미사, 마태수난곡 등이 유명해서 바흐가 가톨릭 신자였을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는 신실한 독일루터교 신자였다.

필자는 가톨릭도, 개신교도, 루터교도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종교이니, 이러한 교단과 종교색의 구분은 음악가에게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신에 대한 믿음, 희망이 그의 음악에 녹아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도, 그의 곡 제목이나 넘버를 몰라도, 들으면 그냥 느낀다.


“음악이 참 좋구나.” 그러면 된다.

그 순간, 음악으로 치유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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