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大濛》리뷰 / 제62회 대만 금마장 작품상 수상작
중화권 그리고 대만의 주요 영화제 중 하나인 '금마장(金馬奬, Golden Horse Awards)'은 1962년 시작된 오랜 전통을 가진 영화제이며 현재까지도 수준 높은 영화들이 참여하기로 유명하다. 올해 2025년, 제62회 금마장이 개최되었고 52개국의 190편의 영화가 참가했다. 영화제는 11월 6일부터 23일까지, 시상식은 22일에 열렀다.
그럼 올해 최우수 작품상 수상작은 어떤 영화일까? 그런 바로 개막작인《大濛(2025)》이다. 금마장의 상영되는 주요 영화는 티켓팅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아쉽게도 개막식 당일 해당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운이 좋게 사전 상영 행사인 口碑場 티켓팅에 성공해서 정식 상영 전에 미리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매년 금마장이 개최되는지 알고 있었지만, 언제인지는 잘 몰랐다. 기회가 되면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막연히 생각만 했었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 주요 발표가 끝나서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정말 우연히 영화《大濛》의 메이킹 영상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슨 영화지? 하면서 무심코 영상을 눌러봤는 데, 마치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연상케 하는 첫 장면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감성적인 기차의 경적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범상치 않은 작품이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영화의 배경은 1950년대 대만이며, 작중의 인물들은 대부분 대만어(臺語)*을 사용했다. 나는 시대극 중에서 특히 근·현대 시기를 가장 좋아한다. 그래서 대만에 오고 나서 비슷한 시기 배경의 시대극을 몇 번 찾아봤는데, 그러면 보통 작중 인물이 모두 대만어를 사용하기에 진입장벽이 높아서 보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중문 자막이 존재하긴 하지만..)
하지만 이번에는 영화가 보여주는 감성과 당시 대만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장면들이 너무 매력적이기 때문에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대만어(臺語)는 '대만민남어'라고도 하는데, 대륙 남부의 방언 중 하나인 민남어에서 파생되어 발전된 언어다. 흔히 번체 중국어를 '대만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엄연히 중국어와는 다른 언어이다. (중국어는 성조가 4개지만, 대만어는 7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포스팅 내용을 읽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https://blog.naver.com/joseph_kim_art/223518863465
1954년, 대만의 자이(嘉義)에 살고 있는 한 소녀, 아웨(阿月, 배우: 팡위팅方郁婷)에게는 오빠가 하나 있다. 그는 동생들에게 다정한 오빠였지만 왜 인지 경찰에게 쫓기고 있다. 그날도 사탕수수 밭에서 오빠와 함께 있었는데 경찰들이 들이닥쳐서 오빠를 체포해 갔다. 그 후, 아웨는 오빠가 총살형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내 고구마 두 개, 약간의 돈, 얼굴은 본 적 없지만 다른 곳에 입양(童養媳*)되었다던 언니의 주소가 적힌 서신, 그리고 오빠가 남겨준 시계를 챙기고 곧장 타이베이로 향한다.
*童養媳: 중국의 전통 결혼 풍습 중 하나로, 미성년자의 소녀를 다른 가정으로 보내거나 팔아서 그 가정에서 양육하고, 어른이 되면 해당 가정의 아들과 결혼시킨다고 한다. 대만에서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해당 풍습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고 함.
아웨는 타이베이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처음 마주하는 도시 풍경과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사람들까지,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 운 좋게 말투는 투박하지만 선한 인력거꾼 쨔오꽁따오(趙公道, 배우: 커웨이린柯煒林)를 만나게 됐다. 하지만 시신을 수습하는데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는데... 아웨는 오빠의 시신을 수습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영화의 제목인 중국어 '大濛'은 대만어 '罩雺(tà-bông)'를 음역 한 것으로 안개가 끼는 것(起霧)을 뜻한다. 감독이 해당 제목을 정한 이유는 메이킹 필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당시의 어두운 시대적 상황을 뿌연 안개에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작품의 배경이 되는 타이베이도 비가 자주 내리고 날씨가 흐른 편이다. 나는 현재 타이베이에서 산 지 1년 반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여름철을 제외하고는 해를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 지역적 특성도 반영된 제목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시의 어두운 시대적 상황을 이른바 '백색공포시기'라고 한다. 해당 시점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섬으로 이전한(일명 '국부천대') 이후부터 대만에서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이 시기에는 정부가 반대세력을 강하게 탄압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54년은 이 시기의 초반부에 해당해, 당시 분위기는 더욱 삼엄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에서 경찰이 등장할 때마다 일반 민중들이 두려운 눈빛으로 몸을 피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 이러한 모습은 비슷한 역사적 경험과 민주화 과정을 겪어온 우리나라 사람에게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라, 감정적으로 더욱 깊게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중요한 건 짙은 안개는 언젠간 걷힌다는 것이다.
영화에 여주인공 팡위팅(方郁婷)과 남주인공 커웨이린(柯煒林)은 내겐 익숙하지 않은 배우들이었다. 오히려 영화 속에 카메오로 등장하는 배우들이 조금 더 친숙했다. 하지만 두 배우가 보여주는 연기는 정말 대단했다. 특히 팡위팅은, 어린 소녀가 다정한 오빠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그리고 낯선 땅에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 그리고 노력 끝에 한계에 부딪힌 어린아이의 좌절감 등 복합적인 감정들을 놀라울 정도로 잘 이끌어 냈다.
솔직히 대사의 대부분이 '대만어'고 자막은 중문·영문이 있었지만, 때때로 대사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만으로 감정이 충분히 전달될 만큼 그녀의 표현은 뛰어났고, 자연스럽게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 팡위팅은 미국에서 태어난 대만 배우로, 영화 속에 장면을 보면 정말 중학생 정도로 어려 보이지만, 口碑場 현장에서 봤던 실제 모습은 조금 달랐다. 배우의 정보를 찾아보니 2006년생으로 올해 만 19세였다.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을 법한 나이임에도 이처럼 섬세한 연기를 펼칠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남주인공 커웨이린도 역시 이번 영화에서 처음 봤다. 대만 배우는 아니고 홍콩 배우이다. 口碑場 현장에서 영화 속 대만어 대사를 얼마나 기억하느냐는 질문에, 몇 가지를 즉석으로 들려주었다. 많은 관객들이 웃었고 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기본적으로 유쾌한 성격인 것 같았다. 커웨이린은 투박하지만 선한 인력거꾼 '쨔오꽁따오(趙公道)'를 훌륭하게 소화했다.
영화의 특성상 분위기가 계속 어두워질 수 있었는데, 캐릭터 특유의 코믹함과 유쾌함으로 관객이 숨을 돌릴 수 있는 장면들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다고 단순한 개그 캐릭터로 소비되지도 않았고, 영화에서 전달하려는 내용의 일부를 책임지는 역할도 충분히 수행했다고 본다.
두 배우는 각각 제62회 금마장 여우주연상(最佳女主角), 남우주연상(最佳男主角) 후보에 올랐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두 배우 모두 낯설었지만, 이번 작품 이후로는 두 사람의 필모그래피를 계속 주목해보려고 한다.
아쉽게도 제 62회 금마장 여우주연상은 배우 판빙빙(范冰冰), 남우주연상은 배우 장첸(張震)이 수상했다. 참고로, 해당 영화에서 아웨의 오빠 역으로 출연한 배우 정징화(曾敬驊)는 다른 작품인 영화《我家的事》로 제62회 금마장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영화《大濛》내용 특성상 많은 장면에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 초반을 단단히 받쳐주며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영화《大濛(2025)》은 대사 대부분이 대만어로 이루어져 있어서 한국어 자막으로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금마장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영화이자, 내가 느끼기에도 대만의 감성을 온전히 잘 담아낸 작품이다. 근래에 본 영화 중에서도 완성도가 매우 높은 수작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중국어 혹은 영어를 조금 할 줄 알고, 대만 영화 특유의 정서를 좋아한다면 기회가 있을 때 꼭 감상해 보기를 권한다.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뿐만 아니라, 감독의 섬세한 연출 또한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1950년대 타이베이의 생활상을 충실히 반영한 듯하여,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장면 하나하나 보는 재미로 충분히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화 《大濛(2025)》은 제62회 금마장에서 11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으며, 최우수 작품상(最佳劇情片), 각본상(最佳原著劇本), 미술상(最佳美術設計), 분장상(最佳造型設計) 등을 수상했다. 또한 비공식 부문인 '관객이 뽑은 최우수 작품상(觀眾票選最佳影片)'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