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경주 APEC 정상회의와 대만
나는 사실 경주 APEC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한미정상회담과 한중정상회담이 개최될 예정이라고 하나, 전문가들도 해당 회담으로 큰 결과가 있진 않을 것이라 분석했다.
나 역시 3,500달러 수준의 대미 투자방식이나 반중 정서가 최고조로 달하는 시점에서, 그저 한국이 두 나라와 크게 얼굴 붉히지 않고 다음 협상을 준비할 수 있다면 나름 선방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두 회담의 내용은 예상을 벗어난 것이라 놀랐고, 그 외 엔비디아의 젠슨황의 깐부치킨 치맥 회동이나 트럼프 대통령에게 선물한 금관 등 여러 화제의 순간들이 있었다.
그즈음 나는 'APEC에 대만도 참석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실 대만용으로 쓰는 유튜브 계정이 있는데 주로 대만 언론사를 구독하고 있다. 그래서 그 계정으로 들어가니 모든 대만의 언론사가 주목하는 일이 있었다.
APEC 정상회의 개막 당시, 이재명 대통령이 각국 정상들을 맞이했다. 대만은 총통의 대리인 자격으로 린신이(林信義) 고문이 참석했다.
각국은 APEC 회담에 '경제권을 대표'하여 참여하는것이기에 대만도 참가국 중 하나이다. 다만 대만(臺灣, Taiwan)이나 정식 국호인 중화민국(ROC, Republic of China)이 아닌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해당 명칭은 올림픽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APEC 당시, 대만을 호명할 때 "Chinese Taipai"라고 했지만 국제미디어센터 스크린 영상에는 "Taiwan(타이완, 대만)"이라고 되어 있었고 국기도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해당 사건을 대만 주요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심지어 어떤 기자는 APEC 공식 자료(?) 같은 곳에도 국명이 '타이완'으로 되어 있고 국기도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는 사실을 매우 기뻐하며 보도했다.
우리에게는 나라 이름과 국기가 표시된 게 무슨 큰일인가 싶겠지만, 대만 사람들에게는 꽤나 아픈 손가락이다.
1971년, 유엔 총회 결의에서 "합법적인 '중국(China)'의 대표는 오직 중화인민공화국(현 중국) 정부 대표임을 인정하고 장제스 정권(중화민국, 현 대만)은 즉시 추방하기"로 결정됐다.
대만은 결의안이 가결되자 자진 탈퇴 선언했다. 그 이후 대만과 수교한 주요 나라들이 단교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현 중국을 '중공(중국공산당)'으로 대만(중화민국)은 '자유중국'으로 부르며 여전히 수교하고 있었지만, 1992년 한중수교를 끝으로 주요 국가 중 거의 마지막으로 대만과 단교하게 되었고, 이후 자연스럽게 '중국'이라는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뜻하게 되었다.
대만 사람들 국제무대에서 본인들의 영향력이 상실했던 여러 사건들에 큰 아픔을 가지며, 현재까지 국명과 국기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APEC이라는 중요한 국제무대에 대만(Taiwan, 타이완)이라는 명칭과 국기가 쓰인 것에 대해서 굉장히 호의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도된 신문이나 유튜브 영상 댓글을 읽다가보면 눈에 띄는 문구가 보인다. 그건 바로 "저건 '대만 국기'가 아니라 '중화민국 국기'이다."라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맞는 말이긴 하다.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 대만의 정식 국호는 "중화민국" 이기 때문이다. 사실 "대만(타이완)"이라는 이름은 대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섬의 명칭, 즉 지명이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해당 국기는 '중화민국 국기'이지 '대만(타이완) 국기'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몇몇 대만 언론사에서도 '대만 국기(台灣國旗)'라고 표현했다.
지금까지 읽었다면 이게 지금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헷갈리는 게 당연하다. 왜냐하면 대만 사람들 스스로도 대만인지 중화민국인지, 사람마다 의견이 나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현 중국 정부가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오해가 없길 바란다.
해당 유튜버는 주로 정치 혹은 사회문제에 대한 의견을 시민들에게 물어보고, 스티커로 표시하는 콘텐츠를 운영하고 있다. 해당 사진은 대만 사람들이 본인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대만인, 중화민국인, 중국인" 중에서 선택하는 콘텐츠다.
시민들의 답변은 흥미로운 점이 많다. 영상 기준으로 다수는 '대만인'을 선택했지만, '중화민국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적지 않으며, '중화민국인이자 대만인이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아울러 대만의 은행이나 대학교, 기업명에 '중국'이라는 명칭이 붙은 경우가 왕왕 있는데, 이런 경우 중화인민공화국(현 중국)이 아닌 대만(중화민국) 일 가능성이 높다.
해당 유튜버 말고 예전에 다른 비슷한 영상을 본 적 있는데, 거기에는 '대만이면서 중화민국이다', '중화민국이 대만에 있다(中華民國在台灣)' '중화민국=대만(中華民國是臺灣)', '대만은 중국(중화민국)이다' 등 정말 다양한 의견이 존재했다.
지금 대만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일 경우 '중화민국'보다는 '대만'이라는 정체성이 강하며 대외적으로도‘중화민국’보다는 '대만(타이완)'이라는 명칭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물론 그 이유 중 하나로 현 중국 정부가 '하나의 중국'을 외치면서 난리 치는 것도 있다) 그런데 실생활에서 '중화민국'을 여전히 잘 만날 수 있다.
올해 대만 여행을 한 사람이 있다면 영수증에 "114年"을 봤을 것이다. 이걸 민국기년이라고 하는데, 중화민국 건국연도를 기원으로 해서 114년까지 이어졌다는 뜻이다. 관공서나 주요 공식 행사에서는 여전히 해당 연도표기법을 사용한다. (민국 114년 = 2025년)
또 10월 10일은 흔히 쌍십절이라 하는데, 정식 명칭은 국경일(國慶日) 중화민국이 탄생할 수 있었던 신해혁명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날은 또 "중화민국 생일축하(中華民國 生日快樂)"라는 문구를 대표적으로 사용한다. 아울러 당연하게도 정부 홈페이지, 신분증 등에 있는 국호는 '중화민국'이다.
다만 현재 사용하고 있는 대만 여권을 보면, 한자로 中華民國(중화민국)은 맨 위에 있지만, 'Taiwan'은 중앙에 있어서 쉽게 '대만 여권' 임을 알 수 있다. 2003년까지는 중화민국이라는 명칭만 있었다는데, 현 중국과 혼동될 수 있다는 점도 있겠지만 '대만인'이라는 정체성이 점점 커지는 것을 반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도 한중수교(1992년) 이전까지는 대만을 '자유중국'으로 불렀으나, 지금은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외적으로도 대만 내부에서도 '대만(타이완)'이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럽게 됐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과거에는 "중화민국이 대만에 있다." , 지금은 "중화민국=대만"이며, 미래에는"대만"만 남게 되지 않을까라고 추측해 본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나 같은 외부인이 아닌, 대만 사람들 스스로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는지 결정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