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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코 Oct 28. 2021

핸드폰을 바꾸며 든 생각들

나이듦과 지혜로움에 대해 생각하다.

핸드폰을 바꿨다.


어느 날 핸드폰을 보면서 생각했다. 2019년 1월에 구매했던 흰색 아이폰XR. 특별히 고장이 난 적도 없었고 큰 불편을 느끼지도 않은 채로 잘 사용했지만, 이 날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 핸드폰을 쓴지도 어느새 3년이 다 되어가는데, 한번 바꿔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 뭔가 적극적으로 변화를 주고 싶은 시기이기도 했고, 핸드폰을 수도 없이 자주 들여다보고 항상 손에 쥐거나 곁에 두면서 사는 세상에서, 핸드폰을 바꾸는 것은 즉각적으로 큰 변화를 이끌어내줄 것만 같았다.


앱등이까지는 아니더라도 핸드폰은 아이폰을 선호하기에, 다음 기기도 당연히 아이폰이었다. 마침 시의적절하게 아이폰13과 아이폰13프로가 출시되었기에, 아이폰13과 아이폰13프로 중 우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사람들에게 어떤 것을 사면 좋겠냐고 물어보기도 했지만 사실 답정너였다. 맥시멀리스트보단 미니멀리스트 기질이 다분한 편이기에, 아이폰13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13프로의 성능이 당연히 더 좋겠지만, 이미 충분히 좋은 기기에 20만원 이상 더 주고 오버스펙이라고 느껴지는 기기를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 다음은 색상을 정해야 했다. 아이폰13에서 선택 가능한 색상은 5가지다. 핑크, 레드, 블루, 스타라이트, 미드나이트. 스타라이트는 흰색이고 미드나이트는 검은색과 남색의 중간 정도 된다. 솔직히 말해 나는 흰색을 좋아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용해온 아이폰들이 죄다 흰색 계열이었기에, 이번에는 색상을 바꿔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다른 색을 샀다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내가 질려버리면 문제가 아니겠는가? 결국 프리스비에 실물을 보러 갔다. 미드나이트 색상은 생각보다 더 멋지면서도 오묘한 느낌을 주었다. 실물을 보고, 이번에는 블랙 계통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내 성격에 절대 핑크, 레드, 블루는 살 수 없었기에 결국 흰색 대 검은색이었는데, 소심하게나마 일탈하는 느낌도 들고 좋았다. 


그 다음은 구매처를 정해야 했다. 약정으로 구매하는 방법이 있고 자급제로 구매하는 방법이 있다. 더 이상 통신사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아 자급제 폰을 구매하기로 했다. 자급제 폰은 애플 공홈 또는 오픈마켓에서 구매가 가능했는데, 애플 공홈은 정가를 그대로 다 받을 뿐더러 실제로 배송되는 시점도 늦었다. 쿠팡에 가보니 내가 찾는 모델은 기본 할인이 들어가 있을 뿐 아니라, 카드 할인을 추가로 8%까지 해줬다. 결과적으로 공홈 대비 거의 20만원을 아낀 셈이 되었다. 여기에 로켓배송까지 되어 다음 날 바로 받을 수 있었다. 쿠팡을 칭찬하게 되는 순간이자, KB국민카드를 만들어 놓은 나를 칭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큰 돈이라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망설이고 있었는데,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서 과감히 질러 버렸다.


그 다음은 케이스를 사야 했다. 이건 네이버 쇼핑에서 대충 구매했다. 기기의 색이 잘 보여지는 것이 중요했기에 투명 케이스로 핬고, 강화유리까지 주는 곳에서 구매했다. 강화유리까지 따로 구매하는 것은 좀 귀찮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이폰13 기기와 케이스가 같은 날에 도착했고, 야심한 밤에 언박싱을 시작했다. 신제품 아이폰13 실물은 정말 영롱했고, 외관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 후에 조심스럽게 강화유리를 붙이고 케이스를 씌웠다. 아이폰XR을 아이폰13 곁에 두니, 자동으로 데이터 옮기기가 시작되었고, 50분 정도 지나자 모든 데이터가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기술이 충분히 발전하면 마법과 구분 불가능해진다." 아서 C. 클라크의 명언이다. 나는 그저 폰을 나란히 두고 몇 번 버튼을 누르기만 했을 뿐인데 데이터가 자동으로 옮겨진다니, 마술같은 경험이었고 정말 너무나 편한 세상이구나 생각했다. 아이폰XR에서 유심을 꺼내서 아이폰13에 넣으니, 그것으로 끝이었다. 유튜브에서 보았던 각종 테스트를 해보니 양품이었다. 기념으로 사진을 몇 개 찍고는 잠을 청했다.


마지막으로 요금제를 바꿀 차례였다. 원래 폰은 LTE만 되었었고, 새 폰은 5G폰이기 때문에 요금제를 바꾸었어야만 했다. SKT를 쓰는데, 찾아보니 '언택트 요금제'라고 5G에 데이터 100GB를 주는데 요금이 월 52000원인 요금제가 있었다. 이 정도면 알뜰폰에도 뒤지지 않고, 각종 할인혜택 등등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요금제를 바꾸어 보았는데, 생각해보니 좀 어이가 없었다. 이전에 쓰던 요금제는 LTE였고, 데이터도 무제한이 아니었는데 이것보다 10000원 이상 비쌌기 때문이다. 내가 호구였구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 SKT가 도대체 그동안 얼마를 남기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SKT 주식을 찾아보았는데, 회사 분할을 한답시고 거래가 정지된 상태였다. 한 달 후에 다시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핸드폰 바꾸는데 이렇게 많은 과정이 필요했다. 그렇게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영롱한 새 아이폰13 미드나이트 256GB가 내 것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사용을 해보니, 생각보다 감흥이 덜했다.


평범한 일상은 계속되었다. 핸드폰이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하더라도 믿을 정도로, 일상은 똑같이 반복되었고 감동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성능은 비교가 안되게 좋다. 무려 현존하는 최고의 프로세서를 탑재했다는 폰이 아닌가. 전반적인 속도가 훨씬 빠르고, 프로가 아닌 일반 모델임에도 카메라 성능은 아이폰XR과는 비교가 미안할 정도로 발전했다.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써는 꽤나 감흥이 클만도 한데, 별 감흥이 없었다. 아, 성능이 좋구나. 아, 멋지구나. 그냥 이렇게 생각하고 마는 것이었다. 일상에 특별한 변화를 주고자 기기변경을 단행한 것인데,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예전 생각을 해보았다. 피쳐폰을 쓰다가 처음 아이폰4를 구매했을 때에는 너무 설레서 거의 주접 수준이었다. 첫번째로 직접 사용해본 아이폰은 정말 혁명과도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없어지는 느낌이지만, 그때의 나는 페북에 폰 산 것 자랑하는 글을 올렸을 뿐 아니라 카톡아이디도 올려서 카톡에서 이야기 나누자고 사방팔방 이야기하고 다녔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찌만 아이폰 6S를 구매했을 때에는 이전보다 더 커진 화면에 또 한번 신세계를 접한 느낌이었고 페이스북에 자랑은 안했지만 주변인들에게는 엄청 자랑을 하면서 다녔다. 그로부터 거의 4년 후 아이폰XR을 구매했을 때에도 사진을 엄청 찍고 다니기 바빴고 역시 주변인들에게 자랑을 하면서 다녔다. 그런데 이번엔 그냥 그랬다. 말 그대로 그냥 그랬다.


그러자 또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왜 이럴까? 인생에서 써본 폰들 중 제일 좋은 폰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도 왜 별 감흥이 없을까?


첫 번째 가능성은 내가 그저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내 인생에 있었던 여러 첫 번째 순간들과 첫 번째 경험들을 생각해 본다. 첫 번째로 합법적으로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 마셨던 날, 첫 번째 해외 여행을 떠나기 위해 탑승구 앞에서 탑승 시간을 기다리던 설렘, 첫 번째로 월급을 받던 날의 뿌듯함, 첫 차가 출고가 되었다는 소식에 달려가서 타보았을 때의 감동. 모든 첫 번째 경험들은 환희 그 자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을 수록 이런 것들은 일상이 되어가고, 더 이상 그와 같은 기쁨을 주지 못한다. 맥주를 사서 마시는 것은 전혀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고, 내가 어떤 여행을 떠나더라도 2014년에 떠났던 첫 해외 여행의 설렘을 주지는 못할 것이며, 월급날은 변함없이 기다려지기는 하지만 월급을 받는 것 자체는 루틴이 되어버렸으며, 차를 운전하고 다니는 것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익숙해지는 것'은 나이듦의 가장 확실한 징표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뇌는 자극에 익숙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야만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며, 그 과정에서 생존과 번식의 가능성을 최대한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듦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비슷한 경험, 동일한 경험들을 더 많이 하게 되고, 이에 따라 그런 경험들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즉, 익숙해진다는 것은 나이듦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바꾸어 말하면 익숙해지는 것이 많을수록 더 나이가 들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듦에 따라서 새로운 핸드폰을 손에 쥐는 경험도 여러번 해보았고, 기술이 주는 혜택들도 누릴 만큼 누려보았으니, 새로운 핸드폰으로 인한 감흥도 덜 했을 수 있다.


두 번째 가능성은 내 인생에서 다른 중요한 것들이 많이 생긴 것이다. 더 좋게 말하면 단순 '소유'나 '자극' 보다는 더 중요한 가치들이 많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이전보다 더 지혜롭고 현명해졌다는 것이다. 살아보니 인생에는 소유와 자극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았다. 일상에서도 더 좋은 물건을 소유하고, 더 좋은 자극을 얻는 것보다 더 유의미한 것들이 많았다. 그렇다보니 삶이 점점 미니멀리즘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완전한 미니멀리스트라고 할 수는 없지만 소유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되었다. 단순히 말초적인 자극보다는 더 높은 층위의 경험들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핸드폰이 주는 감흥이 크지 않았을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더 지혜로워졌고 현명해졌기에 새로운 핸드폰을 소유하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된 것이다.


시간은 그야말로 쏜살같이 흘러가고, 나이는 시나브로 한두살씩 더 먹어간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영원히 육체적인 젊음을 유지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은 공평하게 똑같이 늙어간다. 그런데 늙는다고 꼭 성숙해지는가? 살아보니 또 그렇지는 않더라. 나이와 성숙함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나이가 든다고 꼭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많아도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있고, 안타깝지만 죽을 때까지 성숙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도 있으며, 나이는 어리지만 누구보다 성숙한 사람들도 있다.


성숙함에는 또 여러 측면이 있겠지만, 지혜로움과 현명함을 꼽아본다. 나이가 듦에 따라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더 지혜롭고 현명해지기 마련이다. 기본적으로 더 많은 경험들을 축적하고, 더 많은 생각들을 해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발전의 기울기는 사람마다 현저히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더더욱 지혜롭고 현명해지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별 차이 없이 한두살씩 나이를 먹어간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을 알게 되고 가치의 우선순위를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전자는 늙어 가는 것이고, 후자는 지혜로워지고 현명해지는 것이다. 내가 아이폰13으로 큰 감동을 받지 못했던 것은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더 중요한 가치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전혀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앞으로도 내 인생에 있을 자극들과 소유들이 주는 감동과 감흥이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게 내가 늙어서 그런 것인지, 지혜로워져서 그런 것인지는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연말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고, 이제 또 순식간에 새해가 찾아올 것이다. 다시 한번 나 자신에게 질문을 해본다.


나는 늙어 가고 있는가? 나는 지혜로워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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