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C의 2025 산티아고 프랑스길 순례일기
아내와 걷기운동을 자주 하는데, 1킬로미터 랩이 12분 정도로 나온다.
이를 기준으로 산티아고 일일 진행 거리를 28킬로미터로 잡았다.
한 시간에 4킬로미터를 걷는다.
새벽에 출발하고, 아침과 점심식사를 하며 1시간씩 충분히 쉰다.
하루에 7시간 건는다,가 기본 틀이었다.
그렇게 정하게 된 걷기 루틴은, 기상시간과 다음 숙박 마을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만, 이랬다.
6시~8시 : 8킬로미터 걷기. 휴식시간 포함.
8시~9시 : 아침식사 및 휴식.
9시~12시 : 12킬로미터 걷기. 휴식시간 포함.
12시~1시 : 점심식사 및 휴식.
1시~3시 : 마지막 8킬로미터 걷기. 그 날의 이동거리에 따라 다름.
모든 계획이 그러하듯, '한 대 쳐맞기 전까지의' 계획일 뿐이다.
다만 한 시간 4킬로미터, 하루 28킬로미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어제 아내와 함께 하루치 거리를 걸어 보았다.
아직 배낭이 준비되지 않아 '가볍게' 맨몸으로 걸었다.
시내를 걸으면 고도 변화가 거의 없기 때문에 중간에는 남산에도 올라갔다 왔다.
시내를 30킬로미터쯤 걸어 본 경험은 사실 작년 봄에도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종주는 그저 먼 미래의 꿈으로 상상만 하던 때여서,
'만약 우리가 산티아고를 간다면'이라는 순수한 가정만으로
장난처럼 북한산 둘레길에서 '하루 종일 걷기'를 해보려던 것이었다.
아무리 상상에 따른 연습이어도
북한산 둘레길은 등산이나 다름 없이 너무 험하고 오르막내리막이 심했다.
"이 길은 산티아고 순례길 연습이라기에는 너무 등산이야"
나의 이 말도 안 되는 포기 이유가 아내는 황당했을 것이다.
삼육대 쪽으로 내려 오며 어이없는 짜증과 고집을 만회할 대체제로 던진 게
"우리... 집까지 걸어가 볼래?"였고, 관대한 아내는 오케이를 해줬고,
북한산 자락부터 서울을 세로로 관통해서(세로질러?) 30킬로미터를 넘게 집까지 걸어왔던 것이다.
배가 계속 고프다.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왜 그렇게 먹고 마시는 장면을 자주 올렸는지 알 것 같다.
아침을 먹은 후 삐대다가 11시경에 출발했는데,
1시에 점심과 맥주 한 병을 먹고,
5시에 저녁과 소주 한 병을 먹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며 빵집을 털어 왔다.
빠바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사이, 길에서도 빵을 우적댔고,
편의점에서 기네스 네 캔과 프링글스를 사 와서 그 중 반을 해치웠다.
다행스럽게 작년 북한산 to 집 도보처럼 물집이 잡히진 않았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불룩해진 배 빼고는 알이 배기거나 못 쓰는 팔다리는 없었다.
하루를 마감하며 아내와 이구동성한 바는,
"우리 산티아고 가면 엄청 먹겠다"
왜 그렇게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지...
더 큰 문제는, 오늘도 하루종일 먹어댔다는 것이다.
팔다리는 멀쩡해서(멀쩡하다고 생각해서),
"오늘은 동대문 데카트론까지 걸어갔다 올까?"
"그럴까? 어디 보자... 거기까지 편도로 딱 14킬로미터네"
진담 섞인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였지만,
우리는 하루 종일 허기가 졌고, 나는 거기에 더해서 하루 종일 졸렸다.
"살은 빠지겠지만 뱃고래는 엄청 커져서 오겠다."
계란 후라이드 두 개씩을 얹은 김치볶음밥을 먹으며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던 점심 때의 아내가 말했다.
갑자기 밖에서 먹겠다고 연락이 온 아들의 밥공기를 끌어 당기며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두 그릇째를 시작한 저녁의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여유 이면에는 무서운 게 도사리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해피하게 '많이 먹게 된다'는 농담을 해도
그것이 누적된 피로의 다른 말이라는 것이다.
그 날의 피로는 그 날에 풀리지 않을 거야.
때려 먹어야 니 몸은 겨우겨우 버틸 거야.
하루 걸었다고 34일을 내리 걸을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
게다가 배낭 하나 메지 않은 가짜 30킬로미터였잖아.
그 날의 피로는 그 날에 풀리지 않을 거야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론세스바예스까지 갈 때 생긴 피로는
수비리라는 곳으로, 또 팜블로나라는 도시로 갈 때 생기는 피로에 얹혀지겠지.
그렇게 통상 34일로 나뉜 구간들의 피로가,
앞선 피로가 뒤로 생긴 피로에 등 떠밀려 가고,
그 피로는 또 더 나중에 합류한 피로에게 등을 떠밀리겠지.
피로는 고율의 이자가 더해지는 적금처럼 쌓일 것이다.
아마도 오후 세 시면 끝나는 일정의 남은 하루는,
그 피로를 어르고 달래며 어여 가라고 손짓하는 시간들이 될 것이다.
2025.3.16
산티아고 프랑스길 D-37
여담 - 24시간 동안 100킬로미터를 행군했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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