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se Jul 20. 2019

386 세대유감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386과 적당히 거리 두기




저는 대학로 근처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살던 지역 일대는 주변에 많은 대학교들이 있었기에 최루탄 냄새를 맡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집집마다 항상 양초를 구비해놓았고(양초를 켜면 최루 냄새가 없어진다는 말이 있었지만 효과는 항상 없었던 기억입니다), 저와 친구들은 물안경을 갖고 자주 등교했습니다(물론 최루탄 앞에선 소용없지만). 자랑스럽게 학교 깃발을 높게 치켜세우고 의기양양하게 도로를 점령한 채 경찰을 향해 행진하는 대학생 형, 누나 사이에 껴서 초등학생인 저와 친구들은 멋도 모르고 괜히 어깨에 힘을 넣고 같이 행진을 하기도 했습니다(위험이 가까워 오면 이제 가라고 돌려보냈지만요). 주말의 대학로는 대학생의 낭만과 멋이 넘치던 공간이었습니다. 과거 대학로는 주말에 차량 통행을 금지했습니다. 도로 곳곳에서는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시를 읊고 사물놀이를 하고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상점의 벽과 화장실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판하고 조롱하는 낙서로 가득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줄 곧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제게 대학생 형 누나는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2006년 언젠가 중고 책방에서 우연히 눈에 들어 읽게 된 최장집 교수님의 저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사회의 불만과 반동끼 가득하던 제가 어릴 적부터 내면에 각인되어 있던 '대학생 이미지', 진보 세력의 달콤한 낭만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책이었습니다. 진보의 사상적 거두였던 최 교수님은 이미 2000년 초반부터 민주화 세력의 퇴행적 행보에 일침을 가했지만 찻잔 속 태풍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386 세력은 교육, 문화, 사회, 경제, 정치 전방위에 걸쳐 헤게모니의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고, 최 교수님은 변절자로 낙인찍힌 채 그저 보수의 자장 안에서 간헐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근근이 존재를 점멸시킬 뿐이었습니다.



386 세력은 민주화 이후 변화한 사회와 시대에 걸맞은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비대해지는 권력을 자신들의 세력 확장과 사적 이해 추구에 이용했습니다. 그들은 성취에 비해 너무 많은 과육을 따먹었고 여전히 그 과육을 독차지하고 있지만 최 교수님이 이십여 년 전 문제를 제기한 후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사회 현상에 대한 진지한 담론이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386 세대는 자신들이 전복시킨 산업화 세대의 '정의롭고 도덕적인' 대안을 자처하며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지만 그 권력을 시대에 맞는 철학을 만들고 건강한 담론을 형성하는 대신 사회의 모든 '적폐'를 산업화 세대의 탓으로 돌리는데 유용했고, 인터넷과 팟캐스트 등 대안 매체를 통한 그들의 우회전략은 매우 탁월하게 사회에 먹혀들었습니다.



그 어느 정권도 악화되는 한일관계를 자신들의 지지율 반등의 기회로 착취하지 않았습니다. 현대사에서 한일관계는 주기적으로 경색되기를 반복해왔지만 그 어느 대통령도 지금 정권처럼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내세우며 사회 긴장과 양국 간 갈등을 악화시키는데 앞장서지 않았습니다. 외교적 사건에 민족주의를 결부시켜 '애국'이란 이름으로 나와 너를 가르고 국가 안에 개인을 메몰시키는 지금의 386 세대는 누가 봐도 퇴행적입니다. '애국'이란 이름으로 개인보다 국가를 내세우던 군사 정권에 화염병을 던지던 그들이 지금은 아주 교묘히 군인들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386 세대유감>은 십 년도 전에 나왔어야 할 책입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감아왔던 두 눈을 뜨고 뒤틀린 386 세력을 똑바로 응시하며 '현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공론화의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노스탤지어 혹은 신화에 사로잡혀 여전히 그들을 '정의의 투사'로 보는 망상에서 벗어나 권력과 이권을 독점하고 있는 '기득권'으로서 그들을 냉철하게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 이념적 환상이나 신화적 망상에서 벗어나 그들이 진정으로 이룬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지, 맹목적인 비난이 아닌 건강한 담론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양 날개를 건강하게 갖출 때 훨훨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싫든 좋든 산업화와 민주화는 근대 이후 지금의 대한민국이라는 성취를 이룬 두 개의 거대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386 세력은 권력과 기득권의 헤게모니를 잡은 후 자신들이 전복시킨 산업화라는 가치를 훼손시키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민주화는 비정상적으로 비대하게 커져버렸습니다. 그 둘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 그 시작은 '정의'라는 신화 속에서 권력을 독점한 386 세력을 객관적이고 입체적으로 조망해 그들이 만든 수많은 신화를 건강하게 벗겨내는 것입니다. 늦었지만 이 책 <386 세대유감>이 그 전기를 마련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이긴다"는 이들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