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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May 16. 2020

전 스파이가 아니에요

늦은 <하우스 오브 카드> 이야기



"전 스파이가 아니에요."

"나도 압니다. 요즘 누가 그런 용어를 쓰기는 하나요?"



<하우스 오브 카드>가 처음 나왔을 때 시즌 2까지 보고 그만뒀었습니다. 당시까지 여전히 <웨스트 윙> 만을 유일한 정치 드라마로 숭배(!)하는 원리주의자(!)였던 저에게 <하우스 오브 카드>는 꽤 흥미롭고 유려한 영상을 자랑하지만 음모와 배신 위주여서 이건 '사짜'라고 여겼거든요.


얼마 전 다시 생각나서 처음부터 보고 있는데 새롭습니다. 예전보다 더 재밌게 느껴지네요. 중간중간 터져 나오는 촌철살인 대사, 그리고 유려한 영상은 눈을 즐겁게 합니다. 의상, 조명, 촬영 뭐 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고 동선, 대사, 컷 빡빡하고 촘촘합니다. 프로덕션 디자인은 정말 끝내줘서 정치 드라마의 핍진성을 한껏 높여줍니다(정치 드라마에선 의외로 상당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프로덕션 디자인 하나는 모든 정치 드라마를 통틀어 가장 좋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장센 연출도 정말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게 컷마다 느껴집니다. 다만 시즌이 거듭될수록 영상은 끝까지 일관성을 유지하는 반면 그 빡빡하던 연출과 설정, 이야기의 응집성, 인물 간 관계가 느슨해지고 헝클어지는 순간이 자주 드러납니다.




참고로 많은 사람들이 '미장센'을 단순히 화면에 보이는 '룩'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물론 미장센은 화면을 채우는 모든 요소, 배우부터 의상, 소품, 배경, 영상의 색감까지 종합적으로 어우러진 영상미가 맞기는 하지만, 좀 더 좁고 정확하게 말해보자면 미장센은 대사나 연기 없이 영상과 분위기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우스 오브 카드>는 단순히 아름답고 유려한 영상미를 떠나서 영상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미장센에 꽤 능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크게 아쉬운 점 중에 하나는 언더우드 부부가 재선에서 승리하는 과정입니다. 정치 드라마에서 대선은 억지스러운 사건이나 사고를 만들지 않아도 되는 매력적인 소재인데 <하우스 오브 카드>는 그 부분이 못내 아쉽습니다. <웨스트 윙>에서는 마지막 시즌 전체를 오직 대선 캠페인에 할애하는데 정말 끝내주거든요. 그 드라마틱한 전개를 떠나서 이상을 추구하던 대선 후보가 어떻게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현실의 문제와 끊임없이 마주 하는지, 어떤 내적 갈등을 통해 이상을 접고 때로 현실을 이겨내는지 드라마가 효과적으로 잘 그려집니다. 그뿐 아니라 미국의 주요 주들이 지닌 특징과 그에 대응하는 후보들의 태도 등 경선과 대선 전반에 대한 디테일이 상당해서 그 시즌만 유심히 봐도 미국 대선에 대한 전반적인 공부가 될 정도입니다. 괜히 <웨스트 윙>이 모든 정치 드라마의 바이블이 된 게 아니죠. 




다만 <웨스트 윙>의 인물들이 꽤 평면적인 반면 <하우스 오브 카드> 속 인물들은 조금 더 입체적입니다. 그리고 순간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선과 뉘앙스를 섬세하게 잘 캐치하는 장점이 있죠.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지지만 각 인물의 캐릭터는 대부분 잘 구축되어 있고 나름의 독특한 특징과 매력이 잘 살아 있습니다. 모두 각각의 자리에서 나름의 역할을 충실히 잘 이행합니다. 의미없이 존재하다 사라지는 인물이 거의 없습니다. 허투루 만들어진 드라마는 분명 아니라는 거지요. <웨스트 윙>이 정책과 협상 과정에 대부분을 할애하는 본격 정치 드라마여서 살짝 지루한 면도 없잖게 있는 반면, <하우스 오브 카드>는 흥미의 요소를 상당히 가미해서 더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투박한 <웨스트 윙>에 비해 확실히 <하우스 오브 카드>는 세련되고 현대적이랄까요.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촌철살인 대사가 꽤 있는데, 어디에 메모라도 해둘 걸 그랬습니다. 한국 정치에도 해당되는 부분이 상당히 있어서 흥미롭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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