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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May 23. 2020

사냥의 시간

한국 영화가 또 "한국 영화" 했다



말 많고 탈 많은 <사냥의 시간>.

좋지 않은 평이 너무 많고 이런 어두운 한국 영화는 이제 뻔하기 때문에 애써 거부하고 있었지만, 저도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결국 봤고, 결론은 "한국 영화가 또 "한국 영화"했다". 



총평


이 영화는 재미있고 신선한 영화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당히 떨어지는 완성도의 재미 없는 영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집중을 떨어뜨리는 쓸데없이 늘어지는 쇼트와 불필요하게 들어가는 대사들은 극의 긴장이 올라가려 할 때마다 번번이 발목을 잡습니다. 이것은 곧 영화의 리듬감 저하로 이어지죠. "뭔가 긴장감이 있는 것 같고 막 그런데 왜 이상하게 늘어지지?" 느끼신 분이 있다면 이것 때문이죠. 헬조선을 표현한다고 슬럼화 된 근미래의 한국을 표현한 프로덕션 디자인(<인랑>의 피상적인 것을 몹시 상기시키는)은 깊이 있는 고민은 전혀 없는 듯 보입니다. 극과 제대로 붙지 않는 진부하고 피상적인 배경. 이런 배경 설정은 영화의 핍진성을 심각하게 훼손합니다. 영화 내내 주인공들의 우정과 관계를 강조하지만 반대로 개별 캐릭터와 그들의 관계 구축은 상당히 빈약합니다. 이 모든 요소들이 결합해서 <사냥의 시간>을 재미없고 완성도 떨어지는 영화로 만듭니다. 이는 곧 하나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감독의 연출력 부족. 다만 이건 <사냥의 시간> 뿐이 아닌 최근 한국 영화가 지닌 문제의 연장이기도 합니다. 영화 리뷰에 들어가기 전 "요즘 한국 영화"에 대해 잠깐만 이야기해봅시다.




한국 영화의 위기


한국 영화의 위기라는 말, 참 진부합니다. 1990년대부터 이 말이 나왔거든요. 이렇게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아니,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4관왕을 한 지금, 뭐시 위기란 말이냐." 지금 한국의 영화계는 삼성은 잘 나가지만 그외 대부분 기업들은 내부부터 곯아가고 있는 현재 한국의 산업계과 판박이로 보입니다. 몇몇 극소수의 영화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 영화는 무슨 망령이라도 들린듯 해도 해도 너무 할 정도로 완성도와 재미가 떨어지거든요. 제작 환경은 전보다 훨씬 좋아졌는데 때깔만 그럴듯할 뿐 재미와 완성도는 예전보다 형편없는 아이러니. 거칠고 투박하지만 1990년과 2000년대 한국영화들의 재미와 완성도가 훨씬 뛰어납니다. 


예전 리뷰에서도 몇 번 이야기했지만 문제는 대부분 영화가 다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 같이 어둡고, 디스토피아적이고, 부정적이고, 우울하고, 조폭, 검사, 경찰은 나와줘야하고, 제일 중요한 마지막, 정치적인 교훈이 빠지면 한국 영화가 아니죠. 소재를 가리지 않고 결국은 고집스럽게 정치 얘기는 꼭 넣는 한국 영화. 요즘 한국 영화들의 공통된 특징들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원초적 본능


모든 게 직설적이고 자극적, 즉 원초적입니다. 이것은 폭력의 수위 만이 아니라 연기와 대사, 연출의 방식 등 영화 전반에 관한 문제입니다. 잔인한 폭력은 눈이 얼얼할 정도로 보여주고, 대사의 정제되지 않은 언어는 직설적이고 거칩니다. 하나하나 일일히 설명하는 거칠고 일차원적인 연출은 그 촌스러움이 못내 민망합니다. 관객의 상상이나 여유 따위는 아랑곳 않는 직접적인 연출은 감독 혹은 작가의 역량이 떨어진다고 밖에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아니면 치열한 고민없다는 것이거나). 모든 것이 원초적이고 자극적인 한국 영화. 보고 나면 불닭볶음면을 먹은 마냥 몸과 마음을 힘들게 만듭니다.


지극히 제 개인적 인상이지만 이렇게 난무하는 직설과 자극은 한국 사회 전반에서 느껴집니다. 작은 것 하나도 침소봉대하고 사용하는 언어와 행동이 매우 거칠고 자극적(사소한 언어에도 '발암' '씹' '개'가 접두어로 붙는 현상)입니다. 어느 하나에 우르르 저리 우르르, 유행이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모든 사이클에서 유행의 성격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자극적인 한국 사회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글로 옮기기 어렵지만 저는 이런 한국 사회 전반의 자극적인 분위기가 영화에 그대로 전사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자극적인 한국 사회라는 이슈와 관련해서는 언젠가 조금 자세히 풀어보는 걸로.



2. 빈곤한 캐릭터 구축


한국 영화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는 캐릭터 구축에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우 개인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며 이런 경향은 조연으로 갈수록 악화됩니다. 빈곤한 캐릭터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명품 조연'이라 부르며 카메오에 집착합니다. 매력적인 캐릭터, 관객이 함께 응원하고 안타까워하게 되는 캐릭터. 영화 속 이야기 이전에는 어떤 전사가 있었고, 영화가 끝난 후에는 어떤 삶이 펼쳐질지 상상하게 만드는 캐릭터, 그런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결국 이건 시나리오가 좋지 않다는 의미이겠죠(물론 이야기가 좋지 않아도 연출력과 배우의 개인기로 커버하는 영화도 있습니다만). 


그래서 한국 영화 전반에서 매력적인 캐릭터로 남게 되는 인물들은 대부분 그 인물을 연기한 배우 개인의 역량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물론 그 또한 영화와 잘 붙었기 때문이긴 하지만). 단지 배우 고유의 캐릭터와 역량 때문이 아니라 시나리오와 연출이 모두 좋아서 캐릭터가 잘 구축된 영화. 저는 <타짜 1>을 꼽습니다. 주인공뿐 아니라 대부분 조연까지 버릴 캐릭터가 없었던 영화죠. 모두 어딘가 정말 실존할 것 같은 인물들, 각각의 특징과 매력이 살아있는 인물들, 그래서 출연 분량이 적을수록 궁금하게 만드는 그들. 그런 인물들이 서로 부딪치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영화는 생동감 있고 풍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승우, 김혜수라는 대표 배우가 출연하지만 그 외 무명에 가까운 많은 배우들이 발견된 영화이기도 합니다. 반면 대부분 한국 영화 속 캐릭터들에서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영화는 완성도가 너무 떨어져서 캐릭터들이 모두 붕 떠있는데 배우들은 눈에 엄청 힘주며 살벌하게 열연(!)하는 통에 오히려 극 전반의 분위기와 배우의 열연이 붙지 않아 부조화가 벌어지는 현상을 흔히 봅니다. 미국의 자연스러운 연기나 일본의 억지스런 연기와는 또 다른 한국 특유의 과한 열연(!)에 대해서도 할 말이 참 많은데 이번 리뷰에서는 넘어갑시다.



3. 메시지와 교훈은 이제 제발 그만


많은 관객이 "고마했다, 마이 무어따 아니가" 느낄 겁니다. 최근 한국 영화를 망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의 근원이 바로 '메시지에 대한 집착'이 아닐까 합니다. 요즘은 포스터에서부터 뭘 말하려는지 뻔히 보여 '입맛'이 사라지게 만듭니다. 제작부터 '재미있겠다', '흥미롭겠다'가 아니라 '이걸 꼭 가르쳐야겠다'로 출발하니 영화에서 은유를 쓸 수가 없습니다. "이걸 꼭 가르치고 알려야 하는데 몰라보면 어쩌나" 메시지에 몸이 달아있는 불안한 감독이 쓸 수 있는 화법이란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예술적 여과를 거치지 않은 원초적인 직설법 밖에. 그리고 영화의 세계관 속에서 자유의지를 갖고 뛰어 놀아야(!) 할 캐릭터들은 번번이 감독이 개입하는 통에 영혼없는 아바타로 전락하고 맙니다. 더 큰 문제는 그나마도 관객에게 욱여넣으려는 이 교훈이라는 것이 <괜찮아요, 브래드>나 <트루먼 쇼>, <머니 볼>, <그녀>와 같이 다양한 삶의 관점과 사회적 화두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 똑같은 정치적 메시지라는 점입니다. 이쯤되면 관객의 정신 건강과 한국 영화의 다양성 장려를 위해 법이 필요한 게 아닌지...



4. 이 몹쓸 놈의 작가주의


이해합니다. 영화감독으로서 오손 웰즈, 히치콕, 스탠리 큐브릭이 되고픈 그들의 욕심. 네, 이해합니다. 대본부터 연출, 편집까지 전부 손아귀에 쥐고 자신의 비전대로 만들고 싶은 욕망. 문제는 모두가 천재적인 예술가가 되지 못해 안달이라는 것. 그리고 슬프게도 비극은 냉혹한 현실과 그들의 이상의 괴리가 태평양처럼 넓다는 것. 실력은 스탠리 큐브릭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데 비전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인 안타까운 현실.. 영화는 시나리오, 내러티브, 플롯 모든 게 엉망인데 망상에 허우적대며 "있어 보이는" 화려하고 긴 테이크에 매몰되기 일쑤. 이미 충분히 촌스러운 영화에 '예술적 자아' 폭발해주시는 롱 테이크 컷들 추가해주심으로써 범작 수준에서 끝날 영화가 '국적불명의 괴작'으로 거듭나는 웃지 못할 시츄에이션. (너무 말이 심한가요?)


더 큰 문제는 엉망으로 나온 최종 결과물이 세간의 비난을 받을 때면 보호 본능이 심하게 발동한다는 것. 비대한 자아의 거품 속에 갇힌 감독은 자신이 일을 그르쳤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은 채 모든 걸 타인의 책임으로 돌립니다. 잘못된 프로덕션, 낮은 예산, 짧은 기한, 의도와 다른 편집, '기레기' 언론, 예술적 안목이 없는 관객 등등.. 낙제 받은 초등학생의 받아쓰기 점수부터 시상대에 오르지 못한 국가대표 선수, 애프터 못 받은 소개팅까지 세상에 핑계 대려면 한도 끝도 없는 법이죠. 예산이 적으면 그 예산에 맞게 대본을 수정하고 프로덕션과 설정을 꾸리고, 스케줄이 빡빡하면 그에 맞는 촬영 횟수와 효율적인 연출 방법을 고민해서 주어진 제약조건 하에서 최고의 결과물을 내놓는 것이 감독의 임무이자 책임입니다. 세상에 감독의 입맛대로 주어지는 촬영 환경은 없고, 창의성은 오히려 제약된 환경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만약 환경이 너무 여의치 않으면 프로듀서를 협박하든 회유하든 구워삶아서 원하는 만큼의 예산과 기한을 확보하는 것 역시 감독의 몫입니다.


결과물에 대한 무한 책임. 그것이 촬영 현장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감독의 독재적 권리에 대한 의무이자 책임(가혹해 보이지만)입니다. 나의 결과물에 대한 책임. 그것은 비단 영화를 떠나 모든 일을 대하는 프로페셔널의 마음가짐이기도 하죠. 그런데 요즘 영화와 감독은 뭐 그리 구구절절 핑계와 뒷말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하고픈 말은 한참 더 많지만 이쯤에서 우선 일단락해봅시다.




<사냥의 시간>, 바보야 문제는 스토리가 아니야


이제 본격적인 <사냥의 시간> 이야기를 해보죠. 많은 이들이 "한국 관객들은 너무 스토리와 개연성에 집착"한다고 합니다. <사냥의 시간>을 비판하는 관객을 향해서도 윤성현 감독은 같은 이야기를 하며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한국 관객이 재미를 느끼는 스펙트럼이 조금 넓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확실히 "B급 영화 인지 감수성(!)"은 떨어지죠(엄연한 작품으로 보기보다 조롱과 비웃음의 가벼운 소재로 소비하죠). 한국 관객의 이런 태도는 "영화는 자고로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사냥의 시간>에 쏟아지는 비난은 윤성현 감독이나 다른 이들의 주장처럼 한국 관객이 스토리에 집착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스토리가 빈약한 영화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죠스>를 보세요. <죠스>에 무슨 대단한 스토리나 크리스토퍼 놀란 식의 복잡한 플롯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해변에서 사람이 죽으니까 마을의 경찰이 죠스를 죽인다는 내용이 전부에요. 그런데 재밌습니다. <존 윅>도 마찬가지. 스토리는 별 거 없는데 재밌습니다. 그 영화들을 한국 관객이 싫어하던가요?


스토리에 집착한다기보다 한국 관객은 "너를 살려두기엔 쌀 한 톨도 아깝다". 즉 자비나 관용이 부족하달까요. 한국 관객은 재미없는 영화(혹은 이상해 보이는 영화)에 무척 가혹한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익숙하게 보던 영화의 틀에서 벗어나면 "이게 뭐냐?" '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대세에 휩쓸리는 밴드 웨건 효과도 한 몫하는 걸로 보이고요. 특정 영화의 경우 비난의 수준이 조롱과 멸시까지 가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지.. 한국 감독과 스태프에겐 안타깝지만 이런 태도는 불공평하게 외화보다 한국 영화에 더 가혹한 측면도 있습니다(건전한 비판은 한국 영화를 성장시키지만 도 넘는 조롱은 창작 의욕과 다양한 영화의 제작과 투자를 위축시켜 한국 영화에 해를 끼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이 영화의 뭐가 문제인가. 저는 한 마디로 빈약한 연출력이라고 생각합니다.



1. 허술한 배경과 세계관

<사냥의 시간>을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 중 하나가 배경 설정인데, 저는 이 영화의 미숙하고 진부한 배경과 세계관 구축이 영화의 완성도를 꽤 저해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배경 문제는 생각보다 여러 층위에 걸쳐있는데 먼저 "헬조선"이 된 한국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 배경을 망해버린 나라로 설정한 이 원초적인 방식이 참 촌스럽고 진부한 설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녀유혼>에서 너무 아픈 마음을 표현하려고 피눈물을 흘리는 그 일차원적이고 원초적인 촌스러움이랄까요? 문제는 이 촌스러운 헬조선 배경의 톤 앤 매너이 일관성 조차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냥의 시간>의 조악한 세계관과 배경을 연출은 예전 <인랑>의 그것과 판박이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냥의 시간>은 주로 근미래의 슬럼화된 길거리 - 대부분 상점은 문을 닫았고 거리는 쓰레기와 걸인 천지에 벽은 그래피티로 가득(이런 표현 자체가 얼마나 진부합니까) - 를 보여줍니다. 거리를 표현할 때는 영락없이 영화의 컬러 팔레트도 어두운 회색이나 갈색으로 가죠. 문제는 시내는 잿빛인데 편의점 내부는 분위기가 딴판이라는 것입니다. 밝은 조명에 물건 가득한 선반들들. 뭔가 큰 괴리감이 느껴집니다. 이런 실내외 간 괴리감은 <인랑>에서도 똑같이 재연됩니다. 나라는 망해서 거리는 온통 잿빛인데 빵집과 남산 타워의 내부는 화사하고 말쑥한 옷차림의 손님과 직원들은 밝게 웃고 있어서 실내만 보면 이게 망한 나라인지 뭔지 혼동이 오죠.


<사냥의 시간> 속 세계는 물가는 폭등하고 원화는 휴지가 된 경제 상황. 당연히 대부분 사람들은 돈이 없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클럽과 도박장은 매우 성행합니다. 감독의 의도를 좋게 해석해서 만약 그 설정이 빈부격차를 표현하기 위한 장치라면, 그 설정에 걸맞은 연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클럽과 도박장에 온 손님들의 옷차림이라던지, 그들의 태도 아니면 적어도 "야, 다들 죽어가는데 얘네는 이렇게 잘 살고 있구나" 라는 식의 주인공들의 대사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겉으로 드러나는 배경과 영화의 내부적 세계관을 연결 지어야죠. 그런데 어디서도 그런 연결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분명 망한 국가인데 클럽이나 도박장에는 손님들이 가득하고, 그런데 그들이 막 엄청 잘 살아서 그런 곳에 오는 것 같지도 않고, 극 중 인물들도 돈이 없다고 하는데 자꾸 이 클럽에 가고. 자연스럽게 외적 배경과 내적 세계가 충돌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배경이 몹시 피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이런 충돌로 인해 피상적으로 인식되는 배경은 곧 핍진성의 훼손으로 이어집니다. 많은 관객이 핍진성과 개연성을 헷갈려하거나 어려워하는데, 핍진성 개념은 '있을 법한 일로 여겨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영화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합니다. 그리고 스크린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두 세트장에서 일어나는 허구라는 사실을 모두 알죠. 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그것이 실제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핍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실제 존재하는 사건처럼 인식되는 그 핍진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양합니다. 인물들의 옷차림부터 말투와 행동, 배경과 미술 등등.. 그런 것들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과 조화를 이루면 관객들은 허구임을 알면서도 실제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죠. 반면 핍진성이 떨어지면 그 핍진성을 저해하는 요소가 자꾸 눈에 거슬립니다. 그런 요소들은 스크린에 나타날 때마다 '이 영화는 가짜다'라는 기호로 기능하면서 관객의 몰입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영화로부터 관객을 분리시킵니다. 


<사냥의 시간>에서 서울이 배경인 씬은 모두 잿빛인 반면 동해는 매우 밝습니다. 거리엔 그 흔한 그래피티나 걸인 하나 없고, 가정집에 쏟아지는 빛은 매우 따뜻해서 모든 게 평화롭게 느껴지죠. 그럼 관객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만 망한 건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은 <인랑>이나 <사냥의 시간>처럼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배경으로 합니다. 두 영화와 비슷한 컬러 팔레트를 사용하고 도시를 구성하는 프로덕션 디자인도 매우 비슷하지만 대신 알폰소 쿠아론은 도시는 물론 숲과 바다에서도 일관된 컬러와 장치들을 유지함으로써 디스토피아적 분위기를 일관되게 연출합니다.



2. 캐릭터, 캐릭터, 캐릭터!

<사냥의 시간>의 가장 큰 문제. 캐릭터. 이 영화에서 캐릭터들은 서로 참 많은 말을 주고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많은 말들이 서사의 추동, 캐릭터 구축, 관계 연결 등 어느 하나 의미를 갖지 못한 채 그저 소모된다는 것입니다(의미 없는 대사의 나열,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화에서 나타나는 전형이죠). 그들의 시답잖은 잡담이 유대감과 우정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는 것이 너무 티 나서 어느 순간부터는 작위적으로 느껴집니다. 영화 마지막까지 틈만 나면 반복되는 이 부정적인 내러티브는 캐릭터 구축은 시키지 못하면서 오히려 영화의 집중력과 리듬감을 저해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컴퓨터와 CCTV 화면으로만 진행되는 영화 <서치>는 영화 시작 약 5분 남짓 엄마와 아빠, 딸의 몽타주 시퀀스가 펼쳐집니다. 화목한 가족, 암에 걸리는 엄마, 병마를 이겨내려는 가족의 노력, 엄마의 죽음, 건조해지는 아빠와 딸의 관계. 짧은 단 5분의 시간은 놀랍도록 강력하게 캐릭터와 관계를 구축시켜서 엄마가 죽을 때는 눈물이 찔끔 날 정도입니다. 단 5분 만에 가족의 아픈 전사와 현재 소원해진 아빠와 딸의 관계를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함으로써 관객을 극에 깊이 관여시킵니다. <서치>를 보지 못하신 분은 꼭 보시길, 연출이 정말 대단하거든요. 영화 <업>을 떠올려도 좋겠습니다. 초반의 짧은 몽타주만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깊은 사랑, 할아버지에게 할머니가 어떤 존재인지 관객에게 분명히 각인되죠. 그것이 연출력의 차이입니다. 연출에 따라 캐릭터와 관계의 구축은 5분 만에 완성될 수도, 영화 내내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하기도 합니다. 안타깝지만 이 연출력은 감독의 역량입니다. 윤성현 감독의 역량 부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3. Show, don't tell.

그렇다면 윤성현 감독이 부단히도 친구들의 우정을 그리려 했지만 실패한 이유가 뭘까. 간단히 말하면 "Show don't tell"을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서치>와 <업>의 몽타주 시퀀스와 <사냥의 시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행동과 말의 차이입니다(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서치>와 <업>의 몽타주는 대사가 없습니다. 대신 어떻게 기뻐하고 기념일을 축하하고 역경을 이겨가고 늙어가고 죽고 소원해지는 지 모든 게 행동으로 보여집니다. 반면 <사냥의 시간>에서 주인공들은 그들의 우정이 얼마나 깊은지 말로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극 중 우정을 과시하는 건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니면서 하는 시시껄렁한 대사의 나열뿐이죠. 


배우의 대사. 그것은 감독이 취할 수 있는 일차원적인 연출 방법, 그래서 가장 게으른 방법입니다. 내가 감독이라고 한번 생각해봅시다. 무언가를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할 때 가장 원초적으로 떠올리는 방법이 대사입니다. 그리고 배우의 감정이죠. "사랑해"라고 말하거나 "너무 슬퍼"라고 말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등.. 하지만 극을 추동시키고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대사의 나열이나 감정의 전시가 아닌 인물의 행동입니다. 인물의 행동에는 동기와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목적을 이루려는 인물은 난관에 처합니다, 고민하고,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른 노력을 하는 등 인물이 행하는 일련의 행위를 따라가면서 관객은 점점 인물에 몰입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물의 장점 혹은 단점에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모든 과정을 캐릭터 구축이라고 하며 인물의 대사와 감정은 바로 행동의 부산물입니다. 주인공이 흘리는 눈물이나 웃음, 고통 등의 감정은 행위가 수반될 때 비로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영화에서 인물이 행하는 일련의 행동, 그리고 각 인물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과 그 역학 관계에서 발생하는 결정과 행동을 디자인하는 것은 창작자에게 무척이나 많은 고민이 요구되는 작업니다. <사냥의 시간>은 인물들의 일련의 행동을 게으르게 대사로 치환해버림으로써 캐릭터와 관계의 구축에 실패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결국 한 마디로 <사냥의 시간>을 패기와 객기 넘치는 젊은이들, 그리고 그들의 우정에 관한 영화라고 볼 때 이 영화는 캐릭터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영화입니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관계 구축에 실패했다는 것은 곧 이 영화의 가장 근본이 무너졌다는 의미입니다. 관객이 <레인맨>에서 더스틴 호프만과 톰 크루즈에, <태양은 없다>의 이정재와 정우성에 공감할 수 없다면?




끝으로


윤성현 감독은 <1917> 같은 영화는 잘만 보면서 왜 내 영화에서는 스토리를 찾는가라고 반문 했습니다. 백배양보해서 <사냥의 시간>이 서사가 없는 영화라 해도 캐릭터 구축은 스토리나 내러티브, 플롯의 유무와 상관없는 것입니다. 내러티브도 캐릭터도 없는 단순히 '쿨'한 이미지의 나열은 애초에 영화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뮤직비디오 혹은 그저 동영상으로 불러야겠죠. 앞서 말한 <서치>와 <업>이 단 5분의 몽타주 시퀀스 만으로 영화적 체험을 주는 이유는 대사 없는 이미지 나열 만으로도 캐릭터와 서사를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1917>이 서사가 떨어지기는 하나 엄청난 촬영과 연출력으로 관객을 끝까지 긴장하고 몰입하게 함으로써 영화적 쾌감을 이끌어냅니다. <사냥의 시간>이 그런 몰입감과 "시네마"적인 쾌감을 주던가요? 


영화에서 스토리, 즉 서사가 없다는 것은 곧 관객이 따라갈 감정의 고저가 부재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직 감독의 연출력으로 몰입을 이끌어내며 러닝 타임을 버텨야 합니다. 감정의 기복이 없는 상황에서 연출 만으로 승부 봐야 하는 영화. 감독이 천상계의 연출력을 갖고 있지 않은 이상 관객의 집중과 몰입, 재미를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윤성현 감독이 그런 가공할 연출력을 갖고 있나요? 한국에서는 극소수의 감독을 제외하면 그런 감독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1917> 같은 이미지와 촬영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캐릭터 구축과 연출도 갖추지 못한 감독이 기획 단계부터 빈약한 서사의 영화를 생각한 거라면 <사냥의 시간>의 실패는 기획 단계부터 이미 예정된 당연한 결과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s.

윤성현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1917>과 비교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사냥의 시간>은 서사와 플롯이 단순할 뿐 명백히 존재하거든요. 안타깝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시나리오와 연출이 총체적으로 안 좋은 영화입니다. 배경적인 이야기나 '총포상 쌍둥이 형제', 악역인 '한' 등 할 이야기가 더 많지만 안 좋은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 관계로 이만 줄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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