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터 영화에 이렇게 페미니즘을 태울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요. 정확히 말하면 몰랐던 건 아닙니다. 도끼를 들고 있는 소녀가 포스터와 예고편에 등장할 때 예감하긴 했습니다. 다만 이렇게까지 본격 페미니즘 프로파간다 영화일 줄은 몰랐던 거죠.
프로파간다 영화는 서사나 아름다움 같은 내적 완성도보다 특정한 메시지를 영화라는 매개체 위에 태워 관객에게 전달하면서 제작자가 의도하는 특정한 방향으로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전쟁이나 혁명 기간에 가장 성행하죠. 괴상하게도 지금은 그런 격동의 기간도 아닌데 이런 넘쳐나지만 말입니다.
<프레이>를 페미니즘 프로파간다 영화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심지어 프레데터임에도 불구하고 프레데터는 무대의 중심에 있지도 않습니다. 외계에서 온 이 가여운 녀석은 그 어느 영화 속 괴물보다 불쌍합니다. 왜냐, 그 어느 용맹한 남자 전사들도 하지 못한 불가능한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한 소녀의 강함과 영웅성을 찬미하기 위한 희생양, 즉 도구로 밖에 쓰이지 않거든요. 혹자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프레데터 1>이 무대의 중심에 있었냐? 그 영화에서도 정작 프레데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까지 러닝타임이 한참 지나야 하지 않냐? 맞습니다.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나오는 <프레데터 1>도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까지 꽤 긴 시간이 소요됩니다. 하지만 <프레데터 1>과 <프레이> 간의 공백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프레데터 1>에서 관객은 프레데터라는 듣도 보도 못한 외계 괴물을 처음 접하게 됩니다. 영화는 이 외계 괴물이 어떤 특색을 갖는 지를 여러 측면에서 조금씩 드러내면서 맹수가 서서히 먹잇감에게 다가가는 듯 긴장감을 서서히 높여갑니다. <프레이>는 어떤가요. 이미 관객은 프레데터가 어떤 존재인지 충분히 압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프레이>에서만 보여주는 프레데터의 특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이 영화는 영화 초반을 온통 '소녀'에게 집중합니다. 그렇다고 이 소녀의 캐릭터를 단단하게 구축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소녀가 "여자라는 이유" 만으로 인디언 그룹에서 소외되는 지를 보여줄 뿐입니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남성과 여성 간 일종의 적대감, "내가 너희 남성들보다 강하다"는 밑도 끝도 없는 우월성 전시, 이런 뒤틀린 여성 주인공의 태도와 영화의 분위기는 페미니즘 프로파간다 영화의 전형입니다. 그 클리셰의 정점에 있었던 영화가 바로 <캡틴 마블>이었죠. 아무 이유도 동기도 없이 눈앞에 남성이 등장하기만 하면 일단 찡그리고 쳐다보던 브리 라슨이었죠.
비단 페미니즘뿐 아니라 모든 메시지를 중심에 둔 영화가 결국 싸구려 프로파간다로 전락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무조건적이고 순수한 선과 악의 대립. 그 선명한 이분법적 세계관은 영화를 지극히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만듭니다. 이런 영화는 그 목적이 너무도 분명하기에 현실 세계 대부분을 차지하는 회색 지대, 그 지대에 존재하는 복잡성과 미묘한 측면들이 필연적으로 거세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명백한 선', '선명한 메시지 전달'이 지상과제이기 때문에 복잡 미묘한 관계과 상황을 표현하면 메시지의 선명함, 즉 영화의 목적이 희석되기 때문이죠. 게다가 이런 영화들은 메시지를 주입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안 그래도 갈길이 먼데 복잡 미묘함은 거들떠볼 여유란 있을 수 없죠. 그러니 이런 메시지 영화, 프로파간다 영화들에는 관객 나름의/고유의 해석의 여지가 없습니다. 관객은 그저 일방적으로 '주입식 교육'을 받고 '설교'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프레이>도 이런 클리셰를 그대로 답습합니다. 소녀가 왜 그렇게 남자들을 적대시하는지, 왜 그렇게 전사가 되고 싶어 하는지, 왜 그렇게 사냥을 하고 싶어 하는지 등에 대한 동기가 전혀 없습니다. 애초에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는 주인공이 행하는 행동들의 주요 동기들이 부재하니 영화의 전체 서사가 납득이 될 리 만무합니다. 그래요, 동기는 그렇다 쳐봅시다. 곰 사냥은 언감생심, 기껏 토끼나 사냥하는 소녀가 곰 정도는 우습게 가지고 노는 외계 괴물을 이긴다는 설정이 와닿지가 않습니다.
그래요, 한국도 때로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를 때가 있습니다. 곰 앞에서는 숨도 못 쉬던 소녀가 곰을 가지고 노는 프레데터를 처치할 수 있다고 칩시다. 부족한 서사와 설정 모두를 차치하고 제가 가장 기분 나빴던 부분은 영화 마지막입니다. 영화 속 소녀가 속한 인디언 부족은 프레데터로 때문에 젊은 남성 전사들이 전멸해버립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어떠한 언급이나 슬픔, 추모도 없습니다. 그저 프레데터를 이기고 등장하는 소녀를 영웅으로 추앙할 뿐입니다.
저는 이런 뒤틀린 페미니즘적 세계관을 혐오합니다. 페미니스트들은 본인들을 약자, 차별받는 존재,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희생자에 위치시키면서 정작 사회 각계각층에서 차별받는 다양한 소수자들의 권익에 대해서는 "그들의 문제일 뿐"이라고 선을 긋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사회가 변해가면서 본인들이 회사의 사장, 부자, VIP의 위치, 즉 갑의 위치에서 수많은 남성보다 상위 계층에 서는 수많은 사회적 맥락, 그런 맥락에서 이뤄지는 차별에 대해선 함구합니다. 그들의 인식은 여전히 '시몬 보부아르'의 시대에 머물러있습니다.
<프레이>의 영화적 설정이 말이 되든 아니든, 어쨌든 소녀가 프레데터를 이길 수 있었던 건 수많은 남성 인디언 전사들의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소녀는 남성 인디언들이 죽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프레데터의 약점을 파악했습니다. 마을의 청년들은 모두 전사했습니다. 하지만 소녀도 마을 사람들 누구도 그 희생에 대한 어떠한 언급 없이 오직 소녀의 영웅성과 강함을 '숭배'하며 끝나는 영화의 결말은 페미니스트들의 뒤틀린 세계관이 영화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 같아 뒷맛이 쓴 부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