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후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프랑스의 지성계는 폭력적이었습니다. 어떠한 비판이나 반대 의견도 듣지 않았죠. 그들은 소련과 중국의 만행에 눈 감았고 심지어 북한의 남침도 믿지 않았습니다. 사르트르는 마오와 김일성을 부던히도 두둔했죠. 프랑스 지식인 사회는 그들과 각을 세우는 이들은 모두 낙인찍고 몰아갔습니다. 카뮈 같은 대표적인 지성 역시 프랑스 사회주의 전위부대에게 낙인찍히길 피해 그들의 사상에 침묵해야 했습니다. 프랑스 지성계는 심지어 2차 대전 중에도 프랑스의 독립을 위해 비시 정부와 대립하며 자유 프랑스를 만든 드골이 우파라는 이유로 그를 지지하지 않았죠.
사상의 자유, 비판의 자유가 용납되지 않던 경직되고 폭력적인 사회에서 프랑스 지식인의 '교황'이라 불리던 사르트르에 정면으로 비판한 이가 레몽 아롱입니다. 프랑스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심지어 아롱이 100% 맞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사르트르와 함께 하겠다" 공개적으로 표방했죠. 하지만 아롱은 때론 사르트르와 연대하고 때론 척지며 비판적인 사고를 견지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과 비판적 사고였습니다. 프랑스 사회의 압제 속에서도 그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어떤 비인간적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는지 끊임없이 폭로하고 이데올로기에 눈과 귀를 막고 있는 프랑스 지성계가 뒤틀린 꿈에서 깨어나도록 노력했습니다. 결국 공산주의 이상과 사회주의 간 괴리에 더 눈 감을 수 없었던 프랑스 지식인들은 아롱 사후의 그들이 공산주의라는 어처구니없는 환상에 빠져있었음을 인정했고 레몽 아롱의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은 적은 물론이고 우리 편의 피해 역시 '불가피한 희생'으로 규정짓는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들의 대의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모두 혁명 완수를 방해하는 적입니다. 그들은 매우 쉽게 적과 아군을 구분 짓고 혁명이라는 당위와 목적을 위해 적과 아군의 희생을 강요하며 수단을 정당화합니다.
자본가의 압제로부터 인간과 개인을 되살리겠다는 공산주의가 오히려 개인을 도구화시키고 희생을 강요하고 죽음을 정당화했죠.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수백만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도 '혁명 완성'이라는 대의로 슬퍼하지 않는 이유, 오히려 당당한 이유입니다. '정의'를 수행하고 완성한다는 미명 하에 개인을 전체에 매몰시키며 폭력을 정당화시킵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성은 사라집니다. 공산주의는 판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이전 단계인 사회주의가 어떻게 인간성을 말살시키는지 역사를 통해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어쨌든 프랑스는 돌고 돌아 자신들의 과오, 이데올로기가 도그마가 됐을 때 사회가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인정했습니다.
전 세계가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였고 수백수천만 명의 개인이 희생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마르크시즘은 자본주의가 극으로 치닫던 시기 일어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반동이었을 수 있습니다. 기계와 자본으로부터 인간을 지키겠다는 그 이데올로기는 너무도 달콤한 꿈이자 예언이자 약속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과 그것을 완수하기 위한 레닌의 혁명 사상은 전 세계의 지성계를 휩쓸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서구사회에서 그 혁명 사상의 최전선이었습니다. 그러니 왜 그렇게 프랑스 사회가 이데올로기적 '다름'에 등 돌리고 폭력적이었는지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과오를 인정했습니다. 실수를 인정하는 행동, 내가 틀렸고 내가 그토록 공격하던 이가 결국 옳았음을 인정하는 행동, 그것은 매우 큰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자 고귀한 행동입니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요. 한국의 정치가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사안을 공론화시키고 있나요. 한국의 지식인들이 동 시대성을 갖는 담론을 제시하고 있나요. 아니, 어떤 담론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기는 한가요.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용감한 사회인가요. 점점 철학과 도덕은 사라지고 물질과 권력만 남는 껍데기뿐인 사회가 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 우려스럽습니다.
(전략) 실제에 있어서 그들 생전의 영향력이나 명성은 결코 50대 50이 아니었다. 철학서 《존재와 무》, 소설 《구토》로 2차 대전 직후 프랑스에 실존주의를 대대적으로 유행시킨 실존 철학자, 평론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로 참여 문학의 새로운 장르를 열었고 소설과 희곡에서 두루 성공을 거둔 작가, 그리고 군중 데모, 항의 시위, 공개장 서명 등에 빠지지 않고 모습을 나타냈던 극좌파 투사로서의 사르트르는 정말로 전후 30년간 프랑스 지식계의 교황이었다. 첨예한 정치적 갈등이나 이념의 분쟁 속에서 모든 사안에 대해 사람들은 오늘 사르트르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에 비하면 레몽 아롱의 명성은 보잘것없었다. 명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치욕스러운 보수파의 상징이었다. (중략) 평생 온건하고 상대주의적인 논조를 유지했던 레몽 아롱은 프랑스의 지식 사회에서 완전히 따돌림을 받았다. 1955년 소르본 대학에 교수로 들어갈 때는 그가 우익 인사이며 우익 신문인 피가로의 논설위원이라는 이유로 대대적인 반대 캠페인에 부딪치기도 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레몽 아롱은 마르크시즘이 세계를 해석하는 절대적 인식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기본 사상을 깔고서, 전후 프랑스가 상당한 정도의 근대화를 이루었고, 생활 수준이 신장되었으며, 사회적 불평등은 축소되었고, 교육 제도도 민주화되었다고 생각하며 과연 좌익이 정권을 잡았을 때도 그런 근대화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을지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정치란 선과 악의 투쟁이 아니며 좀 더 바람직한 것과 좀 덜 바람직한 것 사이의 선택이라는 것, 그리고 정치를 하는 것이 곧 선을 행하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소련에 대해서는 강제 수용소, 전체주의, 팽창주의를 경계했고, 이와 같은 오류가 스탈린의 개인적인 잘못이 아니라 이미 공산주의의 이론 속에 배태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반공주의자는 개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비앙쿠르(르노 자동차 공장이 있던 파리 교외)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다시 말해서 노동자들의 사회주의 의식을 약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소련의 수용소 현실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68년 5월 혁명 때는 비앙쿠르로 달려가 공장 노동자들을 앞에 놓고 선동연설을 하기도 했다.
결국 사르트르와 레몽 아롱의 포폄이 갈린 것은 마르크시즘이라는 유행 사조를 채택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전후 30여 년간 프랑스는 내각이 수시로 바뀌던 불안한 제 4공화국과 드골의 강력한 지도 체제 등을 경험하며 계속해서 부르주아 우익 세력이 정권을 담당했지만 지식층의 헤게모니는 마르크시즘 진영이 잡고 있었다. 레몽 아롱이 당했듯, 추악한 보수 반동이라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 그 누구도 자신이 우익임을 표방하지 못했다. 카뮈나 메를로-퐁티가 그랬듯이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도 그렇다고 반공주의자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한 시대, 한 사회의 주류 사상을 거스르기는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1975년을 전후해서 5월 혁명 때 고등학생ㆍ대학생이던 세대가 갑자기 마르크시즘의 한계와 소련의 죄악을 깨닫고 인류의 영원한 주제인 인권 문제를 들고 나와 소련 체제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새롭게 발견한 것이 레몽 아롱이었다. 그들은 마르크시즘이 진보의 사상을 독점한 데 대해 반기를 들었으며, 우익과 좌익의 참모습이 무엇인가에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들은 "레몽 아롱이 옳았으며, 사르트르는 틀렸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레몽 아롱 개인으로 보면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는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후략)
박정자(朴貞子) 상명대 명예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