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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Apr 12. 2023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소설이 시간 낭비가 된 사회 모습에 대해서



상상해 봅시다. 당신은 미국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미국에 대해 아는 건 뉴스와 영화로 접한 것이 전부입니다. 미국에 대해 얼마나 아는 걸까요? 미국을 얼마나 이해하는 걸까요? "알렉스"라는 가상의 인물이 있습니다. 알렉스는 변호사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 시카고라는 큰 도시에서 자라고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수재입니다. 당신은 알렉스와 친해졌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미국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제 당신은 미국에 대해 아는 걸까요? 이번에는 두 명의 가상 인물을 더 만들어봅시다. 같은 시카고에서 자라고 비슷한 명문대학을 졸업한 "에미미", 또 한 명은 미시시피주에서 나고 자라서 고등학교도 졸업을 못하고 맥도널드에서 일하는 '맥스'. 우린 이번에는 에이미가 아닌 맥스에게서 미국 이야기를 들어본다고 해봅시다.



여기서 중요한  우리가 알렉스와 에이미에게서 정보를 취득한 것이 아니라, 알렉스와 맥스, 즉 전혀 다른 주, 전혀 다른 성장 배경을 가진 두 사람에게서 정보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린 두 명에게서 상당히 다른 이야기를 접할 것입니다. 알렉스로부터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중산층, 고학력자 중심의 세계관을 통과한 미국 이야기를 듣는다면, 맥스에게선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확률이 큽니다. 우리가 오직 알렉스에게서만 미국 이야기를 듣는다면 우리의 미국에 대한 이해는 꽤 얕고 평면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맥스의 이야기를 통해 1차원에서 2차원으로 확장되어서, 좀 더 입체적으로 미국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번에는 중부지역, 오하이오에서 옥수수를 키우는 "레이첼"에게서 이야기를 듣는다면? 우리의 이해는 2차원에서 3차원으로 더 확장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아무 이야기도 안 듣는다면? 혹은 비슷한 성장 배경과 삶을 지닌 사람들에게서만 이야기를 듣는다면? 이해가 거의 없거나 편협한 정보를 갖게 되겠죠.






이제 미국이 아닌 인간으로 와봅시다. 우린 타인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요? 인간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요? 아니, 나와 상관없는 타인을 알아서 뭐할까요? 내 삶 사는 것도 바쁜데 그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소설을 읽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아는 것, 이해하는 것, 공감하는 것



저는 우선 관계 안에서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을 구분 짓고 싶습니다. 사전의 정의는 미뤄두고, 제가 생각하는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차이는, 아는 것은 단순히 어떤 사람의 객관적 정보만을 갖고있는 것입니다. 나이, 직장, 경력, 사는 곳, 결혼 유무 등. 반면 이해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 헤아리고 그 사람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아픔이 조금이라도 내게 전해지고, 그들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뉴스나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사람, 혹은 새로 간 모임에서 잠시 인사하고 스쳐간 사람들을 우린 "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안다고 해서 그들에게 사고가 생기거나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들이 얼마나 속상할지, 어떤 힘든 상황에 처해있을지 마음을 헤아려보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만나서 조금 더 길게 사적인 이야기들을 나눈다고 해봅시다. 어느 부모님 사이에서 자랐고, 어떤 아픔이 있었고,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등등 이야기들을 나누고 호감이 생기면 우린 그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거나 사고를 크게 당했다거나 사기를 당했다는 등의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당황스럽고 힘들지 조금이라도 마음을 헤아려보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감정을 느낄 여지가 생깁니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함으로써 그들에게 공감합니다. 우리가 단지 알고만 있었던 타인의 객관적 정보는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함으로써 그들에게 공감합니다. 우리가 단지 알고만 있었던 타인의 객관적 정보는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가집니다.




관계의 부분집합과 전체집합



우린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하고, 그들을 이해할까요. 우리가 직접 만나 사적인 대화를 나누고 이해하는(매우 좋아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사람의 수는 매우 제한적일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성장 배경이나 직업 또한 제한적일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나이를 먹을수록 비슷한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게 되니까요.



그렇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인간들의 집합은 한국, 더 나아가 지구라는 인간의 전체집합에 비하면 극히 작고 제한적인 부분집합입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인간들의 집합, 즉 친구/가족/지인으로 구성된 부분집합을 제외한 사람들, 즉 여집합에 있는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매우 매우 적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뉴스, SNS, 유튜브, 커뮤니티 포스팅 등을 통해 보고 듣고 "알" 뿐입니다. 단순히 알기만 하는 사람, 혹은 아무런 정보도 없는 사람, 즉 타인은 게임으로 따지면 NPC, 게임 공간 안에서 프로그램에 따라 돌아다니는 캐릭터, 더 단순히 말하면 "배경"과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길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은 배경과 다름없습니다. 버스 옆좌석에 함께 앉아있다 같은 정류장에서 내리는 사람조차 우리는 NPC 혹은 배경으로 인식합니다. 그들은 나에게 완전한 타인입니다. 이해하지도 않고 공감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습니다. 



이 사회는 그런 무관심한 타인들로 채워져있습니다.

 



부분집합에서 전체집합으로



그럼 소설을 읽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저마다의 많은 의미부여와 정의가 있을 것입니다. 많은 한국사람에겐 "시간 낭비"입니다. 그 시간에 자기계발하거나 자격증을 따라고 채근하죠. 누군가는 지식을 쌓는다고 생각하고, 누군가에게는 순수한 재미를 추구하는 행위이며, 누군가에게는 '지적 허영'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소설을 읽는 것은 사적 대화입니다. 비록 내가 말을 할 순 없는 일방향 대화이지만 그 대화를 통해 우리는 "나의 관계의 부분집합 바깥에 있는 타인, 즉 소설 속 인물의 지극히 내밀하고 사적인 스토리텔링"을 듣게 됩니다. 그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통해 그 인물을 깊이 이해하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 타인, 즉 소설 속 인물은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합니다. 중세시대, 대항해시대, 일제강점기, 산업화시대, 그리고 미래까지, 시공을 초월한 다양한 직업과 배경, 생각을 가진 인물들이 겪는 무수히 많은 사건을 통해 그들의 고통, 기쁨, 슬픔, 절망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게 됩니다.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아픔과 기쁨의 과정을 함께 하면서 그들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고 그 모든 정서와 생각에 공감하게 됩니다. 심지어 그 소설 속 인물이 악당이라고 해도, 그 배경과 선택들, 정서를 따라가다보면 잘못된 선택 조차 이해하게 되고 공감하게 되죠. 그들이 비록 가상의 인물이기는 하지만(논픽션일 경우는 실제 인물) 그들이 가상이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설을 통해 다양한 시대와 장소에 존재하는 타인들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공감하게 되면, 그 이해와 공감은 책을 벗어나 현실로 확장됩니다. 만약 방금 경비원의 희노애락에 대한 소설을 마쳤다고 해봅시다. 내가 그 소설 속 인물의 고난, 고통, 절망, 기쁨을 이해하고 공감했다면, 이제부터 길 위에서 마주치는 경비원은 더 이상 "NPC"나 "배경"이 아닙니다. 현실의 경비원을 볼 때 우린 자연스럽게 상상해보게 됩니다, "저 분도 내가 읽은 소설 속 그 인물과 비슷한 경험을 했을까? 그들도 비슷한 애환과 정서를 가지고 있을까?" 조금이라도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이해하고 공감한다면 경비원은 나의 관계의 부분집합에 포함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직접 현실에서 경비원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소설을 통해 우리는 어쩌면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그들의 애환과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네, 그래서 소설을 읽는 행위를 "간접 경험"이라고도 말합니다. 



소설은 현실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해서 나의 작디 작은 관계의 부분집합을 확장시켜줍니다. 그 영역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학벌, 배경, 직업의 사람들, 만나기 힘든 다른 국가의 사람들, 절대 만날 수 없는 과거와 미래의 사람들까지 무한히 확장됩니다. 그렇게 다양한 소설을 통해 다양한 배경의 타인을 만나고, 경험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면 우리의 부분집합은 확장을 거듭하며 결국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고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 즉 인간/인류라는 전체집합에 대한 이해와 존중, 공감으로 발전합니다. 왜냐하면 한 명의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국 국가와 시대, 직업과 나이에 상관없이 결국 나와 같이 힘든 삶 속에서 슬퍼하고 기뻐하는 한 사람이자 나와 같이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 딸이자 엄마, 아빠, 누군가의 친구이자 부인, 남편이라는 점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타인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온전히 나의 인식에 따라서 나와 전혀 상관없는 "배경"에 불과할 수도, "또 다른 나, 또 다른 나의 가족, 또 다른 나의 친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소설 속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행위는 곧 "내 관계의 부분집합 바깥에 있는 타인"을 향한 이해와 공감입니다. 그리고 나의 관계 밖에 존재하는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곧 인간이라는 전체집합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시작입니다. 




타인에 불과한 세월호 희생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한 이유



왜 우리는 때로 나와 전혀 관계없는 타인의 재난/고통에 슬퍼할까요? 세월호 사건 당시 많은 이들이 슬퍼했던 이유는 우리 모두 한 때 고등학생으로서 즐겁게 수학여행을 가봤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그 나이 또래의 부모이고, 누군가는 곧 그 나이 또래가 될 부모이고, 누군가는 그 나이 또래의 아이를 가졌었던 부모이고, 누군가는 그 또래이고, 그런 오빠와 누나, 동생을 가진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과거, 현재, 미래의 어느 한 때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동일한 존재"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떻게 배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그들이 마지막까지 어떻게 행동했는지 "이야기"를 전해들었기 때문입니다. 전혀 일면식없는 아이들이 타인이 아닌 "나" 혹은 "나의 가족", "나의 친구"로 인식되고, 이해되면 우리는 아픔과 슬픔에 공감합니다. 세월호에서 숨진 아이들, 그 가족과 친구들이 타인이 아닌 '나의 부분집합'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히 그 슬픔과 절망을 공유했던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공감이 세월호에만 국한될 뿐인가요. 다른 사건에도 그런 이해와 공감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매일 뉴스와 인터넷에는 수많은 사건, 사고들이 넘쳐납니다. 한국에만 국한될 이유도 없습니다. 미국에서 발생하는 총기 사건, 콩고에서 발생하는 내전, 중동에서 발생하는 테러 등의 무고한 피해자들은 결국 세월호 사건 때처럼 나와 똑같이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 딸, 엄마, 아빠, 누나, 오빠, 동생, 친구입니다. 나의 삶이 힘든 만큼 그들의 삶 또한 힘들고,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에게 소중하고 가치있는 만큼 그들의 존재 역시 소중하고 가치있습니다. 세월호 피해자가 나에게 완벽한 타인인 만큼, 다른 나라의 이름 모를 누군가 역시 동일한 타인입니다. 모두 동등하게 소중하고 가치있는 존재가 받는 슬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소설을 통해 만날 수 있는 타인의 이야기, 그 간접 경험을 통해 나의 이해와 공감의 영역이 확장 되면 확장 될수록 그 영역은 나의 지인과 친구로 이뤄진 작은 관계의 집합을 넘어 세월호 사건처럼 타인에게도 이해와 공감이 가능하게 해 줍니다. 버스 옆자리에 앉은 타인이 그저 잠시 지나가는 배경이 아닌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자 딸, 친구 임을 인식합니다. 퇴근길 지하철 안 내 앞에 서있는 사람이 정말 많이 피곤해 보이면 그 사람이 노인이나 임산부가 아닌 20대 청년이어도 자리를 내어줄 수 있습니다. 힘든 직장 생활이 주는 피로가 얼마나 큰지 모두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충분히 서서갈 여력이 된다면, 우리는 피곤해보이는 타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한국이 조금 더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회라면



만약 우리 모두가 조금씩 더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부자들이 빈자들을 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정치인들이 더 깊은 이해와 공감 능력을 갖고 있다면 그들이 내놓을 정책은 어떤 모습일까요. 윗층에 사는 사람이 아랫층 사는 사람을 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남성이 여성을, 여성이 남성을 조금 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사장이 직원을, 직원이 사장을 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진보가 보수를, 보수가 진보를 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2021년 통계로 한국 성인의 무려 52.5%가 일 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인 한 명의 평균 독서량은 2019년 7.5권에서 2021년 4.5권으로 3권, 즉 거의 절반 가까이 떨어졌습니다. 그마저도 저 4.5권 대부분은 직무 관련 혹은 자기계발 관련 책일 것입니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 소설을 읽지 않는 사회, 우리는 어디서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능력을 얻고 있는 걸까요. 물론, 소설이 전부는 아닙니다. 아는 사람을 통해 구전(!)으로 들을 수도 있고, 다큐멘터리를 볼 수도 있고, 영화를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 만큼 타인을 깊이 이해하고 나의 정서를 투영하게 만드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점 한국 사회가 각박해지고 차가워지는 이유, 전세계에서 사회구성원 간 신뢰도가 가장 낮은 나라가 된 이유, 가장 행복하지 않은 나라가 된 이유, 가장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 물론 여러 경제적인 이유들이 있겠지만, 경제적인 이유로만 설명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전세계에서 해외여행을 가장 많이 다니는 나라, 럭셔리한 자동차와 명품들이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 또한 한국이기도 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 빠짐없이 항상 "죽겠다"를 입에 달고 살지만 거의 매주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골프를 치고, 여행을 다닙니다. 저는 경제보다 어쩌면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합니다. 그 중 하나는 한국 사회에서 개개인의 '관계의 부분집합'이 급격히 작아지기 때문은 아닐까요. 개인의 삶에서 가족, 친구, 지인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내 주변의 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모두를 타자화시켜버리기 때문에 모두가 모두에게 배경인 사회, 그래서 누구에게도 관심도, 이해도, 그래서 공감도 하지 않는 사회.



거대한 전체집합 속에서 모래알 만큼 부분집합들이 서로 유리된 채 살아가는 사회. 지금의 한국이 그런 모습은 아닐까요.



미국에서 가장 각박하다고 악명 높은 뉴욕에서 조차 대중교통에서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서로가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을 흔하게 봅니다. 카페나 공원에서 타인에게 흔쾌히 인사와 말을 주고받는 광경을 봅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노숙자들에게 돈은 주지 못하지만 먹을 것과 마실 것이라도 주겠다고 하는 사람들, 앞에 앉아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심심치않게 볼 수 있습니다. 뉴욕에서는 여전히 종이로 된 책을 읽는 이들을 공원, 지하철, 거리의 벤치, 계단 등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노숙자들 조차 두꺼운 책을 읽는 모습을 어디서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을 볼 때마다 참 많은 생각이 들고 한국 사회가 겹쳐 떠오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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