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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共鳴)이 일어나는 순간들(2)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같은 창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니깐요.

by 조쉬코쉬

https://brunch.co.kr/@joshcosh/11



말씀드렸다시피 공명은 물리학적인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종종 어떤 영화나 책을 볼 때 또는 어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중에 감명을 받고는 가슴이 벅찼던 순간들이 있습니다. (편의상 영화나 책을 비롯한 모든 예술작품들의 제작자를 작가라고 통칭하자면) 바로 그 순간이 작가와 나 사이에 공명이 일어난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 순간 정말 작가와 내가 한 공간에 있어서 손뼉이라도 세게 맞춰보고 싶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작가를 내 앞에 두고 작품을 감상할 만큼의 호사를 누려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책을 읽거나 그림을 감상할 때 내 앞에 앉아 있는 작가에게 존경을 가득 담은 엄지를 척! 하니 꺼내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가끔은 ‘작가님 여기 오타 찾았어요.’라고 말해주고 싶기도 하고, 내가 감명 깊게 느낀 바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현실적으로 내게 그런 기회는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작가의 진짜 속마음이나 의도 같은 것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작가의 본래 의도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도 의문입니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분도 있으시겠지만 말입니다. 나로서는 적어도 자신만의 순수한 감상을 충분히 즐기는 것에 있어서는 방해가 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진짜 의도를 포함한 그 어느 의견도 작품을 보기 전까지 의도적으로 피하는 편입니다. 누구도 영화를 보기 전에 결말을 미리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듯이 말입니다.


나는 예전에 영화 ‘식스센스’를 보기 전에 어떤 친구로부터 영화의 중요한 반전을 스포일러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는 누가 듣든 상관없다는 듯이 큰 소리로 반전을 말해버렸죠. 모두가 다 아시다시피 그 영화는 반전 영화의 대명사가 됐을 만큼 반전이 차지하는 영향이 매우 큰 영화입니다. 나는 그 친구가 평소에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버린 탓에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생각도 해봤지만, 평소에도 인과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친구가 아니라서 심한 말을 몇 마디 해주고 그냥 안 들은 것으로 치고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납니다.


예전에는 스스로 인지를 잘 못했던 부분이지만 나는 그런 외부 요인이 내 고유한 의견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에너지를 많이 쓰는 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고유한 감상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분야에 대해서는 누구의 의견이든 사전에 피하려고 합니다.


작품이 만들어진 본래의 의도도 나름의 중요한 의미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작품은 어떤 세계를 향해 작가가 내놓은 하나의 창 같은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작가는 멋지게 그 창을 만들어준 존재이지만 그 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입니다. 조심스럽지만 창을 낸 작가조차도 그 창이 완성된 이후부터는 하나의 독자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더 이상 그 창은 작가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가가 저 멀리 아름다운 산을 보라고 창을 내었음에도 누군가는 정작 창틀에 살포시 자리 잡은 나비 한 마리에 감동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창은 크거나 작을 수도 있고, 원형이거나 삼각형일 수도 있습니다. 또 그 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독자 중 누군가는 작가와 비슷한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작가가 의도한 바와 비슷한 감상을 즐길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키가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서 창을 통해 작가가 의도한 세계 자체를 바라보는 게 불가능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키라는 속성은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현실의 세계처럼 다소 비가역적이거나 반영구적인 속성을 지닌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큰 키가 작아질 수도, 작아진 키가 다시 커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가끔 목적성 없이 서점에 들러 책을 구입하곤 하는데, 그 책들 중 바로 읽기 위해서 구입한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나는 책을 들고 집에 와서는 책장에 고이 꽂아두고는 ‘숙성의 시간’을 거칩니다. 그러다 지나가다 시선에 걸리면 꺼내서 몇 번 읽기를 시도해 보는데, 어떤 책은 바로 잘 읽히는 반면 어떤 책은 몇 번을 시도해도 잘 읽히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아, 잘못 샀구나’하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독서 경험이 많지 않다 보니 자신감이 없었던 탓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도저히 이 책은 나와 맞지 않다 싶은 책들을 제외하고는 항상 다시 책장에 꽂아두고 몇 번을 다시 시도를 해봤습니다. 그렇게 몇 번의 반복되는 경험이 쌓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책도 저마다 고유한 진동수를 갖고 있구나, 내가 지금 이 책이 읽히지 않는다면 아직 내가 이 책을 읽을 때가 되지 않았을 뿐, 다른 큰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구나. 때로는 나의 경험과 성장에 의해, 때로는 내가 처한 어떤 상황에 의해 나와 그 책의 고유한 진동수가 서로 일치할 때 자연스럽게 읽힐 날이 오겠지. 그렇게 공명이 일어날 날이 오겠지.’


내 책장의 오래된 책들과 몇 번의 공명을 경험한 후에 느낀 점입니다.


그렇게 창의 모양이나 독자들의 키에 따라 창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의 다양성은 무궁무진할 겁니다. 그래서 나는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작가의 의도라는 것이, 비평가들이 낸 높은 수준의 비평이라는 것이, 다른 대단한 이들의 의견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니깐요. 또한, 그 점은 비단 작품이라는 예술 범주에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세상에 대해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이 세상에 정답이라고 할만한 것이 사실은 그렇게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정답이 없는 문제들까지 정답을 만들려고 하니 갈등과 불행이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힘의 논리에 의해, 때로는 허영심과 열등감에 의해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는 진짜 의도니 가짜 의도니 같은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같은 창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니깐요. 애당초 정답이 있고 말고가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자신만의 고유한 감상을 자신감 있게 마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내 눈으로 바라본 바가 무엇인지 명확해야 비로소 누구와도 깊고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해서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물리학적인 측면의 공명의 의미와는 달리 작품과 독자와의 공명은 반드시 작가의 진짜 의도와 나의 해석이 ‘정확히’ 일치하여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점은 확실합니다. 누구도 작품을 통해 깊게 감동받은 그 순간, 작가가 옆에서 ‘지금이야, 지금! 이 사람아 정신 차려! 정확히, △△△ 이런 점을 의도했네’라고 해서 받은 감동이 아닐 테니깐 말입니다. 나는 이 포인트를 정말 좋아합니다. 책이든, 영화든, 그림이든, 어떤 예술작품이든 내가 작품을 통해 작가와 공명하는 그 순간, 작가는 이곳에 없습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명을 일어난 그 순간 나와 작가는 ‘모든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어떤 곳’에서 분명 ‘어떤 연결’이 가능해집니다. 정신적으로 어떤 연결이 된 것이죠. 비록 내 관념 속의 현상일지라도 말입니다.


이 점은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라는 내 인생의 지향점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인간은 항상 영생이나 장수를 꿈꿔왔습니다. 애초에 나는 영생이나 장수를 바라지도 않을뿐더러 생물학적인 어떤 전문 지식도 있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육체적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후세에 전해지고 있는 수많은 고전들은 여전히 독자들에게 감흥을 불러 일으키고 있고, 그 작가들과 독자들은 여전히 공명을 일으키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정신적으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현상이 인간이 가진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영생을 달성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반드시 영생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어떤 기록이 시공간을 초월한 공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내가 글을 쓰려고 마음먹은 데에 충분한 동기가 됐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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