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인간의 완벽한 패배다.
경직된 살결을 포근하게 감싸는 바람, 살랑거리는 바람에 분명 내 몸뚱이도 살랑거렸다. 그리고 행여 그 살랑바람에 날아가버릴까, 한 손으로 선베드 팔걸이를 꼭 붙잡은 채 반대편 손을 스마트폰이 올려진 협탁 쪽으로 뻗는다. ‘따뜻하다. 어디서부터 날아온 바람일까? 여기가 정확히 어디지? 내가 지금 정확히 어디에 있는 거지?’ 구글맵을 열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스로 잡은 스마트폰을 들어 얼굴에 갖다대자, ‘Face ID’가 보이더니 금세 스마트폰의 잠금이 해제되었다. 아주 빠르게 말이다. 그러나 너무도 빠르게 풀려버려서일까, 그 순간 스마트폰이 내가 나라는 것을 ‘정말’ 확인한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의 의심은 한국을 떠난 지 132시간 전의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떠올리게 했다. Face ID는 얼굴에서 눈, 코, 입 등의 상대적 위치와 특징을 인식하는 기술이라고 한다. 안경, 모자, 수염 등이 있어도 대부분 문제없이 작동할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눈이 가려지거나, 얼굴이 크게 변형된 경우에는 인식이 되지 않는다. 그래, 오랜만의 여유다. 그렇지만 이 여유가 내 인상까지 바꾸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나는 워터백에 넣어둔 선글라스를 꺼내어 쓰고 있던 안경과 스위치 한다. 그러자 약간 흐려졌던 마음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기분 좋게 내리쬐는 햇볕, 어쩌면 약간 부담스럽다고 할만한 강한 햇볕. 그래서 웃통을 벗게 만드는 햇볕. 야외에서 웃통을 벗을 때면 약간의 자유 내지는 해방감 마저 든다. 어색하게 웃옷을 정리하고 선베드에 눕는다. 새하얀 피부가 눈에 들어와서, 괜히 양팔을 한 번씩 훑어본다. 딱 반바지, 반팔티 모양으로 타지 않은 내 몸. 고르게 태닝 되지 않은 몸뚱이 덕분에 다시금 이 여유가 흔한 일상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이 여유가 낯선 이유를 실감케 한다. 그러나 이제 굳이 신경 쓰지 않기로 한다.
다시 스마트폰을 열어 구글맵을 연다. 바로 지도 위에 작은 파란 원이 현재 내 위치를 표시했지만, 습관처럼 ‘현위치’를 한번 더 터치해 본다. 파란색의 원의 위치가 동일하다. 스페인 말라가. 내가 위치한 곳을 중심으로 엄지와 검지를 오므렸다가 벌려가며, 지도를 축소해보기도 하고 확대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나를 둘러싼 주변의 것들을 눈에 담아본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음을 실감하기 위해.
그런데 보인다. 시선은 스마트폰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윗편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흐릿한 형체, 예측불가능한 움직임의 그림자. 주변시가 보내는 경고는 더 이상 내가 지구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만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갈매기다. 나는 지금 해수욕장이 아닌 호텔 내 야외 수영장에 위치해 있다. 그 점은 방금까지 구글맵으로도 확인했다. 분명히 말이다. 그렇다면 저 갈매기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호텔에서 키우는 갈매기일까? 아니면…모르겠다. 나는 다시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단지 갈매기 한 마리였을 뿐이었다. 일단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눈앞에 놓인 세계를 관찰해보기로 했다.
주기적으로 수영풀에 들러 목을 축이고 가는 갈매기들, 비슷한 높이로 늘어선 야자수들, 야자수의 잎뭉치 속에 둥지를 튼 듯 뭉크 앵무새들이 드나드는 모습이 보인다. -파드득 파드득- 수영풀에 몇 마리의 비둘기들이 날아오기도 하지만 참을만하다. 자세히 보니 서울에 있는 비둘기들에 비하면 깨끗한 것 같아서 병을 옮길 것 같지는 않다. 물은 깨끗할까? 비록, 수영복을 챙겨 온 노고가 아깝긴 해도 저 물에는 들어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은 여행 일정이 아직도 많기 때문에 아프지 말아야 한다. 방향성 없이 부는 바람에 축 늘어진 야자잎들이 곡절 없이 하늘거린다. 마치 바닷속 산호초처럼. 살을 스치는 바람은 조금 서늘하지만, 햇빛이 강렬한 탓에 포근하게 느껴진다.
누구나 이곳의 왕이 갈매기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가끔은 참새나 비둘기 따위가 날아와 수영장 물로 목을 축이기도 하지만,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들면 모두 자리를 뜨고 만다. 그런데 모두 자리를 뜨게 만드는 존재는 왕일까, 불청객일까. 수영장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갈매기들은 익숙한 듯 고개를 아래위로 왔다 갔다 하며 물을 마신다. 마치 짭조름한 비빔밥을 물이나 국 없이 우걱우걱 먹은 후 얼음물을 한 잔 마시는 것처럼 벌컥벌컥 마신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앞서 어디선가 식사를 하고 온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녀석은 고개를 물속으로 처박기도 하고, 스테인리스로 된 수영장 손잡이를 부리로 물기도 한다. ‘으휴, 그게 물어지겠냐고.’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갈매기 지능에 대한 경계를 풀 수 있었다. 어떤 녀석은 사냥 연습이라도 하듯이 물 위에서 살짝 뛰어오르더니 이내 부리를 물속에 꽂아버린다. 나도 모르게 ‘에, 얼씨구?’라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어떤 녀석은 조용히 물만 먹고 가는 매너를 보인 반면, 어떤 녀석은 요란법석을 떨며 무아지경으로 몸을 씻는 녀석도 있다. 얼마나 요란한지 내가 누운 선베드 앞까지 튀기는데 그만한 민폐를 서슴없이 저지르고도 미안한 기색 하나 없다. 만일 저 갈매기들 중 누구라도 수영장을 둘러싸고 있는 이용객들에게 사과의 의미로 가벼운 목례라도 했다면 내가 이만큼 신경 쓰지는 않았을 거다.
미소가 멋진 가드 다니엘이 가끔씩 와서 박수를 치며 갈매기들을 쫓아내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잠시 후 갈매기들은 다시 돌아온다. 사실 다 똑같이 생겨서 다시 돌아온 갈매기인지, 간만에 들른 갈매기인지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만약 갈매기가 인간이었다면 그런 발언은 명백한 인종차별이었으리라. 그래서 잠시 갈종차별에 대해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들의 차별화된 개별성을 찾으려고 더욱 자세히 관찰해 보기로 했지만, 실패. 그냥 다시 돌아온 걸로 하자. 왜냐하면 이곳의 물맛이 하도 뛰어나서 한 번도 못 마셔본 갈매기는 있어도 한 번만 마셔본 갈매기는 없다고 했던 것 같다(도대체 누가?).
그런데 지금 공연이 한창이다. 수영장 가운데 자리를 잡은 갈매기들이 마치 공연이라도 하듯 날개를 퍼득거리며 몸을 씻는 중이다. 그 순간 나는 저곳에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래, 물을 마시는 것까지는 용납할 수 있다. 바닷물은 짜니깐. 물론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본 순간부터 애초에 저 물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건 종 간 매너의 문제이다. 비록 내가 수영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편함을 겪었지만 인간과 갈매기 간에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수영장 한가운데에서 단체로 퍼드득거리며 몸을 씻는 모습은 분명히 레드 라인을 넘은 것이다.
‘갈매기살’
사실 아까부터 입가에 맴돌던 단어였지만 이제는 나도 참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나는 호텔 체크인할 때 시설이용에 대한 여러 안내를 받았지만, 갈매기 혼탕이라는 안내는 받지 못했다. 애초에 내 영어실력에 갈매기니, 혼탕이니 하는 것을 못 알아들었을 가능성도 높지만, 그따위 것까지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수영장 입구에 갈매기와 사람이 함께 그려져 있는 표지판 하나 두었으면 될 일이다.
갈매기들이 아직도 무아지경으로 몸을 씻고 있다. 그 순간 잔인한 바람이 내 쪽으로 불면서 비릿한 향이 코 점막에 닿았다.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라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다. 여전히 갈매기들 중 날개 한쪽을 들어 미안하다고 제스처를 취하는 놈은 없는 상황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갈매기 친구들 이것만은 알아둬. 나는 이곳에 오기 위해서 이코노미석에 구겨 앉아 17시간을 걸려 왔어. 그리고 이곳은 무려 1박에 400유로가 넘는다고.’
그제서야 지금 수영장 주변 선베드 위에 누운 사람들이 모두 수영복을 갖춰 입고 있지만 아무도 저 사각링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인간의 완벽한 패배다.
2024.11.10, 말라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