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부정, 그저 모든 게 꿈이길

by 김성현

삶을 지탱하는 끈들이 모두 끊어지자 나는 절벽에서 떨어지기 시작했고 나의 세상은 무너졌다. 하지만 다음날 여전히 나는 눈을 떴다. 아니, 정확히는 눈이 저절로 떠졌다. 온전히 깨어난 게 아니었다.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곧 기억이 밀려왔다. ‘아, 맞다.’ 순간 숨이 막혔고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았다. 몸 전체가 무거워졌다.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진심으로 꿈이길 바랐다. 그저 악몽이었길 바랐다.


<양해말씀 드립니다>
저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경험했습니다. 이 시리즈는 그 당시 제가 느꼈던 감정과 고통들이 담긴 이야기라 다소 표현과 감정들이 격할 수도 있고 과격할 수도 있어서 미리 양해말씀드립니다. 최대한 그런 표현들을 지양하고자 했으나 이 시리즈의 취지에 맞게 기록을 남기고 싶어서 작성하게 되었으니, 혹시 읽으실 때 불편하시더라도 이런 마음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꿈이었으면."

어쩌면 이 모든 게 꿈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악몽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매일 생각했다. 꿈이길 바랐다. 여전히. 숨 쉬는 모든 순간, 꿈이길 간절히 바랐다. 눈을 감을 때마다, 눈을 뜰 때마다,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조금만 더 버티면, 깨어날 거라고. 그러면 어제까지의 모든 것이 사라질 거라고. 아침마다 스스로 되뇌었다. 눈을 뜨면 전으로 돌아가 있길 바랐다. 눈을 뜨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와 있길 바랐다. 하지만 눈을 뜰 때마다 같은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끈이 모두 끊어진 그 현실. 텅 빈 어둠 그 속에 나.


다시 잠들고 싶었다. 눈을 감으면 꿈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긴 악몽이고, 잠에서 깨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계속 잠들려고 했다. 하지만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그냥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깨어 있는 건지 자고 있는 건지 경계가 흐릿했다.


부정.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현실 감각을 마비시키고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아니, 다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었다. 이게 진짜 내 시간 속에, 내 인생에 일어난 일이라고.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잠에서 깨어나도 그대로라는 것을.


하루가 시작되었지만 시간의 개념이 있었던가. 어제와 오늘 사이에 경계가 있었던가. 시간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면, 내게는 그 시간은 의미가 없었다. 그저 눈을 뜨고, 숨을 쉬고,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있을 뿐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몸이 납덩이처럼 무겁고, 침대가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일어나면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움직이면 이게 진짜가 된다. 발을 바닥에 내딛는 순간, 나는 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무너진 세상을, 끊어진 끈을, 사라진 의미를. 그래서 움직이지 않았다. 침대는 중립지대였다. 현실도 아니고 꿈도 아닌 곳. 여기서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아도 됐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아도 됐다.


부정은 고요했다. 많은 사람들이 부정을 격렬한 거부로 상상할 것이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라고 소리치는 것으로. 하지만 내가 경험한 부정은 그렇지 않았다. 소리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 고요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한 고요함. 시간도, 감정도, 생각도 멈춘 것 같은. 마치 세상의 볼륨을 0으로 줄인 것처럼. 나는 그 고요 속에 있었다.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언제 뭘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제? 그제? 그보다 전? 모르겠다. 목이 마른 것 같기도 했다.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물을 마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과 행동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생각은 공중에 떠다니다가 사라졌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면 기쁨도 느낄 수 없다. 슬픔을 차단하려면 사랑도 차단된다.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멀리하는 것, 모든 감각을 줄여버리는 것. 그렇게 모든 감각이 희미해지고, 멀어지고, 결국 사라졌다. 나는 조금씩 투명해지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나'를 현실로부터 떼어놓으려는 것 같았다. '나'라는 존재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는. 그래야 현실의 고통이 직접 닿지 않으니까.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았다.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멀리하는 것.


나는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 없었다. 마치 오래된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텅 빈 얼굴. 겉모습만 남고 안의 사람은 사라진 얼굴. 나는 누구인가. 거울 속 그 사람이 나라면, 여기 서서 그를 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둘 다 나일까. 둘 다 나가 아닐까. 아니면 진짜 나는 이미 사라지고, 지금 여기 있는 것은 껍데기뿐일까.


시간이 망가져 있었다. 시계를 보지 않았다. 며칠째인지, 몇 주째인지. 하루와 하루 사이에 구분이 없었다.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되는 것 같았다. 시간은 원을 그리며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나는 그 원 안에 갇혀 있었다. 같은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는. 이것이 지옥이라면, 지옥은 불타는 곳이 아니었다. 차라리 불이 있다면 뜨거움이라도 느낄 수 있을 텐데. 그 시간 속에서 나에게 시간은 그 의미를 잃었다. 방은 계속 어둡게 느껴졌다. 그게 편했다. 어둠 속에서는 현실이 조금 흐릿해졌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여 있었다. 어제 일인지 오늘 일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한 시간이 하루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하루가 한 시간처럼 지나가기도 했다.


물리적 시간. 객관적 시간. 하지만 내가 경험하는 시간은 달랐다.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 멈췄다가 갑자기 점프했다. 마치 고장 난 시계처럼. 어제와 오늘이 구분되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인지, 어제저녁에 일어난 일인지, 그저께 일인지. 모든 순간이 하나로 뭉개졌다. 시간이라는 강물이 얼어붙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그 얼어붙은 강 위에 서 있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이.


일상이 멈춰 있었다. 어떤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미래를 상정하는 것이다. 이 옷을 입으면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게 될 것이라는. 하지만 나는 미래가 없었다. 그러니 선택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선택이 없는 삶은 그저 멈출 뿐이다.


이것이 부정의 모습이었다. 격렬한 저항이 아니었다. 강렬한 거부가 아니었다. 그냥 멈춤이었다. 정지. 모든 것이 멈춰버린 상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모든 기능이 최소화된 것 같았다. 느끼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결정하지 않으면, 현실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까. 자신과 세상 사이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이었다. 감정적으로나 인지적으로 현실로부터 분리되는 것. 마치 유리벽 너머로 세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 볼 수는 있지만 닿을 수 없는. 들을 수는 있지만 의미는 전달되지 않는.


나와 세상 사이에 유리벽을 세웠다.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차 소리, 사람들의 목소리, 새가 우는 소리. 하지만 멀었다.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흐릿했다. 소리는 내 귓가를 스쳤다. 하지만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과 세상 사이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이었다. 감정적으로나 인지적으로 현실로부터 분리되는 것. 마치 유리벽 너머로 세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 볼 수는 있지만 닿을 수 없는. 들을 수는 있지만 의미는 전달되지 않는.

나는 여기 있었다. 세상은 저쪽에 있었다. 투명한 벽이 우리를 갈라놓았다. 나는 그 벽 너머로 세상을 봤다. 사람들이 걸어갔다. 차들이 달렸다. 삶이 계속되었다. 그들에게 시간은 흘렀고, 그들에게 현실은 존재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유리벽 안쪽에 있었다. 세상을 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일부가 아니었다.


마치 수족관 속 물고기 같았다. 유리를 통해 밖을 본다. 사람들이 움직이고, 말하고, 웃는다. 하지만 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세계와 내 세계는 분리되어 있다. 나는 물속에 있고, 그들은 공기 중에 있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세계에 산다.


"오늘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주문처럼 되뇌었다. 마법의 주문. 내일이면 나아질 거라고. 모레면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이 상태가 영원하지는 않을 거라고. 내일이 오면 달라질 거라는 믿음,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나아질 거라는 기대. 하지만 그것은 환상이었다. 내일이 왔다. 똑같았다. 다음 날이 왔다. 또 똑같았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내일이면..."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내일은 결코 오지 않았다. 아니, 내일은 왔다. 하지만 그 내일은 또 다른 오늘이었을 뿐이었다. 같은 무감각, 같은 정지, 같은 유리벽. 마치 같은 날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며칠째인지, 몇 주째인지. 하루와 하루 사이에 경계가 없었다. 모든 날이 하나로 뭉개졌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원이었다. 같은 지점으로 계속 돌아왔다. 나는 그 원 안에 갇혀 있었다.


공기가 무거웠다. 짓누르는 것 같았다. 세상이 적대적으로 느껴졌다. 저 밖에는 현실이 있었다. 내가 부정하려는 현실이. 무너진 세상이, 끊어진 끈이, 사라진 의미가. 집 안에서는 부정할 수 있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고, 꿈이라고 믿으면. 하지만 밖에 나가면 마주해야 했다. 두려운 것을 피하면 일시적으로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 회피가 불안을 더 키운다. 피하면 피할수록 두려움은 커진다. 악순환. 나는 그 악순환 속에 있었다.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시간이 멈추고 주인공만 움직이는 장면. 나는 그 반대였다. 나만 멈추고 세상은 움직였다. 모든 게 계속되고 있었다. 나만 그 시간 속에 멈춰 있었다.


세상이 온통 검은색으로 보였다. 공기와 바람마저 살갗에 닿을 때면 아팠다. 모든 게 날카로웠다. 모든 게 차가웠다.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았다. 다시 침대에 누웠다.


침대는 피난처였다. 유일하게 안전한 곳.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둠 속이 편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어둠 속에서는 현실을 마주하지 않아도 됐다. 시간도 멈췄고, 세상도 사라졌고, 나도 사라졌다. 그게 편했다.


"이게 정말 현실일까?" 그 질문만이 어둠 속에서 맴돌았다. 답은 없었다. 아니, 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이게 현실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물었다. 이게 꿈일까, 현실일까. 알면서도 물었다. 현실이라는 걸 알면서도 꿈이길 바랐다.


두 개의 모순된 믿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세상이 무너졌다는 것을, 끈이 끊어졌다는 것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믿고 싶었다. 이게 꿈이라고, 곧 깨어날 거라고,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거라고. 그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앎과 믿음, 현실과 소망. 그 사이에서 나는 찢어지고 추락하고 있었다.


부정. 나는 현실이라는 사실을 점점 알게 되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외면했다. 하지만 필요했다. 당장 현실을 받아들이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서 시간을 벌었다. 조금씩, 천천히 받아들이기 위해.

부정은 무의식적 방어였다. 하지만 그 방어는 처절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지워갔다. 살아남기 위해 살아있기를 포기했다. 감각을 차단하고, 감정을 얼리고, 생각을 멈추고, 세상과 단절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사라졌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았다.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았다. 여기 있지만 여기 없었다. 부정 속에서 나는 유령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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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당신에게,


지금 모든 게 꿈같겠죠. 아니 그래야만 할 거예요. 그래야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을 테니

세상과 당신 사이에 유리벽이 느껴지나요. 괜찮습니다.

부정은 당신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당신은 그저 이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뿐이에요.


감각을 줄이고, 감정을 얼리고, 생각을 멈추고, 시간을 멈춥니다.

배고픔을 느끼지 못해도, 시간 감각을 잃어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도,

결정을 내리지 못해도, 유리벽 안에 갇힌 것 같아도,

그것은 당신의 무의식에서부터 살고자 발버둥 치는 증거예요.


부정은 과정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시간입니다.

지금 당장 받아들일 수 없다 해도 괜찮습니다.

조금씩, 천천히 받아들이면 됩니다.


때가 되면,

유리벽은 스스로 얇아질 것입니다.

어둠은 스스로 밝아질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꿈이더라도 행복하고 좋은 꿈을 꿔보아요.

그런 꿈을 꿀 수 있도록 좋은 기억들을 떠올려보아요.

부정하면서도 존재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니 오늘도 현실을 부정하더라도 그저 함께 여기 존재해 보아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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