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실종, 내가 알던 내가 아니다

by 김성현

체념을 지나, 나는 이제 완전히 막다른 곳에 와 있었다. 이성과 감성이 마비된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남아있을 것이 없었다. 나를 구성하던 모든 것들이 이미 사라져 버렸으니까. 신념, 기준, 가치관, 그리고 나를 지탱해 온 신앙까지.


<양해말씀 드립니다> 저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경험했습니다. 이 시리즈는 그 당시 제가 느꼈던 감정과 고통들이 담긴 이야기라 다소 표현과 감정들이 격할 수도 있고 과격할 수도 있어서 미리 양해말씀드립니다. 최대한 그런 표현들을 지양하고자 했으나 이 시리즈의 취지에 맞게 기록을 남기고 싶어서 작성하게 되었으니, 혹시 읽으실 때 불편하시더라도 이런 마음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심해의 바닥에 가라앉은 나는 이제 물과 구분되지 않았다. 물에 녹아버린 흙덩이처럼, 나와 어둠의 경계가 사라졌다. 바다가 나를 삼킨 것이 아니라, 내가 바다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단단했던 것이 부서지고, 부서진 것이 흩어지고, 흩어진 것이 물에 스며들었다. 나는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뭐였는지조차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과거의 나, 꿈을 품었던 나, 사랑했던 나, 믿었던 나. 그 모든 나는 이제 낯선 타인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예전의 내가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아니, 확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조차 사라졌다.


내가 알던 나는 천천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졌다. 조금씩, 조금씩, 마치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한 알 한 알 빠져나가다가, 어느 순간 돌아보니 텅 비어있었다. 내가 알던 나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낯선 존재만이 남아 있었다.


꿈을 가진 사람이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을 돕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


지금의 나는 그 사람이 아니었다. 꿈도 없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선한 영향력은커녕,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무가치했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차이를 느끼면서도 슬프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알던 나를 잃어버렸는데, 그것이 슬프지 않았다. 아파하지 않았다. 그저 사실로 받아들였다. 마치 남의 일처럼. 마치 뉴스에서 들은 누군가의 부고처럼.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시작되었다.


꿈속에서 나는 높은 빌딩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밀었다. 떨어졌다. 바닥을 향해 추락하는 그 감각이 너무나 생생했다. 잠에서 깨어나도 그 느낌이 몸에 남아있었다. 심장이 뛰어야 할 텐데, 뛰지 않았다. 무서워해야 할 텐데, 무섭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 상황은 반복되었다. 빌딩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다리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무언가에 찔리기도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꿈속에서도, 깨어있는 생각 속에서도. 처음에는 낯설었던 그 장면들이 점점 익숙해졌다. 매일 같은 길을 걷듯, 내일 할 일을 미리 연습하듯.


내가 나를 끝내고 있었다. 내가 나를 밀어버리고, 내가 떨어지고, 내가 그것을 바라보았다. 리허설은 점점 완벽해졌다. 동작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반복될수록, 실제로 떨어지는 감각이 몸에 새겨졌다. 바람이 스치는 느낌, 아래로 끌려가는 중력, 바닥이 다가오는 순간. 익숙해졌다. 낯설지 않았다. 언젠가 진짜로 할 일을 미리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알던 나는 절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알던 나는 생명을 소중히 여겼다. 자신의 생명을, 타인의 생명을, 모든 생명을. 신이 주신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알던 나는 어떤 고통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으려 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믿으려 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매일 죽음을 연습하고 있었다. 매일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아니, 두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딘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원래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 낯선 사람은 누구인가. 내 안에 살고 있는 이 존재는 누구인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예전처럼 비난하지 않았다. 설득하지도 않았다. 목소리는 이제 확인해 주었다.

"맞아. 그것만이 끝이야."

그리고 응원했다.

"괜찮아.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어. 이제 평안함에 이르자."


위로의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 다른 길은 없었다. 목소리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해 줄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할 이유가 없었다. 반박할 힘도, 의지도, 나도 없었다.


나를 지키고 보호하던 모든 장치들이 꺼져 있었다. 이성은 이미 배신했고, 감성은 이미 얼어붙었고, 본능은 이미 고장 났다. 보호막도, 방어선도, 최후의 보루도 사라졌다.


인간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나는 이미 흙덩이가 된 것 같았다. 아직 숨은 쉬고 있었지만, 그것은 의미 없는 생물학적 반응일 뿐이었다. 나라는 존재는 이미 사라졌다. 가치도, 의미도, 형태도 없는 진흙. 바닷속 깊은 곳에서 물에 녹아 흐물거리는 진흙덩어리. 그것이 나였다.


시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하루가 지나는지, 일주일이 지나는지 알 수 없었다. 과거도 없었고 미래도 없었다. 그냥 지금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지금조차 의미가 없었다. 그저 끝을 향해 흘러가는 시간. 사형수가 집행을 기다리듯, 나는 그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형수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형수는 사면을 바란다. 나는 바라지 않았다. 나는 선택할 것조차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을 잃었으니까. 그저 기다렸다. 선고도, 항소도, 사면도 없는 재판. 이미 끝난 재판의 피고인. 나는 그저 집행을 기다리는 존재였다.


나를 더 고통스럽게 할 것도 없었다. 나를 더 아프게 할 것도 없었다. 만신창이. 엉망진창. 나를 더 가혹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이 파괴되었으니까. 더 이상 부서질 것이 없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어둠 속 목소리가 정해놓은 듯한 그 길. 나는 그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니, 걸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끌려가고 있었다. 저항 없이. 의문 없이.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런데 문득, 희미한 의문이 스쳤다.

신은 어디 있는가.

내가 그토록 믿었던 신은. 내가 그토록 의지했던 신앙은. 왜 아무 응답이 없는가. 왜 이 어둠 속에서 나를 찾지 않는가.


발 밑에서 무언가 녹아내리는 감각이 있었다. 굳건하다고 믿었던 것이 액체가 되어 스며들고 있었다. 신앙이라는 바닥마저 고체성을 잃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마지막 땅이 물이 되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의문을 품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작은 균열은 이미 시작이었다. 마지막 남은 것마저 무너지기 시작한 순간의.


실종이란, 육체는 아직 여기 있지만, 나를 구성하던 모든 것들이 먼저 떠나버리는 것이다. 신념이 떠나고, 기준이 떠나고, 가치관이 떠나고, 사랑이 떠나고, 희망이 떠나고, 마지막으로 나 자신이 떠나는 것이다.


실종이란, 내가 나를 끝내는 연습을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연습이 아니라 예정된 미래임을 깨닫는 것이다.


실종이란, 내가 알던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니, 인정하는 것조차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천천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한 조각 한 조각 사라지다가, 어느 날 돌아보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실종이란,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것이다. 움직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숨을 쉬지만 생명이 없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알던 나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지금 남은 것은 우울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완전한 부재 속에서, 마지막 남은 것마저 잃어버리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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