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드스턴의 이집트 점령
서론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1875년부터 1914년까지의 시대를 '제국의 시대(Age of Empire)'라고 규정했다(Hobsbawm, 2018). 이 같은 시대 구분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세계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19세기 후반부터 급속도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에 딴지를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시아는 점령당했고, 아프리카는 분할되었다. 경제적 가치가 미미한 이름 모를 섬들에도 제국의 깃발이 꽂혔다. 독일과 이탈리아 같은 '신생국'들도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발버둥쳤다. 군사적 정복이나 영토 팽창을 열강 정부가 값비싸고 부담스러운 것으로, 열강 대중들이 무심코 바라보기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시대의 제국주의는 정부의 '정책'이 되었다. 언론이 뿌려대는 정복과 전쟁 소식에 대중은 열광했다. 자본의 시대(1848-1875)를 풍미했던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사라진 자리에 "보이는 손"이 군림하기 시작한 것이다(Hobsbawm, 2018: 2-4장 참고).
제국의 시대의 주인공은 여전히 영국이었던 것 같다. 19세기를 풍미한 모든 제국들 중 가장 거대하고, 가장 부유했으니까. 미국, 독일, 러시아의 잠재성이 폭발하고 있었지만, 자본으로 치장하고 거함거포로 무장한 영국 제국은 여전히 세계를 뒤흔드는 초강대국이었다. 식민지, 정착지, 보호령, 신탁 통치령, 군사기지, 위성국에 사실상 경제적으로 종속된 비공식적 영토들을 더한다면, 제국의 시대가 무르익을 즈음 무려 지표면의 3분의 1이 정치적 ∙ 경제적 ∙ 문화적으로 영국의 속국이었다.
영국은 이미 대제국이었지만, 제국의 시대에 다시 한번 급격하게 팽창했다. 1882년 영국의 '이집트 점령'은 아마도 이 팽창기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일 것이다(김기순, 2017: 212). 영국이 이른바 '비공식적 제국주의'라는 가면을 내려놓고 (영토 확장을 포함한) 적극적인 제국 방어의 길로 나아간 대표적인 사례였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영국의 이집트 점령이 19세기 말에 시작된 아프리카 분할(Partition of Africa)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중대한 사건으로 간주한다.
영국의 이집트 점령은 얼핏 보면 '수에즈 운하'라는 정치적 ∙ 경제적 요충지를 중심으로 진행된,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정복으로 비치지만, 조금 독특한 면이 있다. '의외'라고 할까. 홉스봄 같은 거시역사학자는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보다 디테일에 예민한 학자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1882년 이집트 점령의 총책임자가 영국의 수상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Gladstone, 1809-1898)'이었다는 점이다. 점령을 주도한 글래드스턴의 제2차 자유당 내각(1880-1885년)은 노골적인 제국주의 노선을 걸었던 보수당의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1804-1881년)를 비난하며 '도덕정치'를 간판에 내걸고 출범한 정부였다.
그렇다면 글래드스턴은 (정치인들이 으레 그렇듯)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였을까? 입으로는 자유와 권리를 운운하면서, 행동으론 침략과 식민화를 일삼는 흔하디흔한 제국주의자였을까? 정치적 ∙ 경제적 실익 앞에 그가 내세운 도덕정치는 무의미했을까? 1882년 영국의 이집트 점령 사건과 글래드스턴의 관계엔 복잡한 면이 있으며, 본 글의 목적은 도덕정치가 글래드스턴이 어떻게 제국주의적 점령을 옹호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숭고한 이상이 복잡한 현실과 만났을 때 어떤 한계가 있고, 어떻게 정당화되며, 그 결과가 무엇인지 두루 살피는 것이 본 글의 주제다.
본 글은 글래드스턴이라는 한 개인의 '동기'와 '의도'에 집중한다. '무엇이 이집트 점령을 추동했는가'라는 질문은 비교적 덜 취급하려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동기를 묻는 질문'과 '원인을 묻는 질문'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선 사람이 품은 동기와 실제 원인이 다를 때가 허다하며, 사건 당사자들도 자신의 행동을 부추긴 역사적 환경이 어떻게 구축되었는지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다(Hopkins, 1986: 373). 그들은 사실을 오해하고, 사실을 왜곡한 정보를 전달받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동기를 갖는다. 영국의 이집트 점령의 원인은 매우 복잡한, 따로 풀어야 할 숙제다. 따라서 본 글은 도덕정치가 글래드스턴이라는 연약한 개인의 동기와 의도만 취급한다.
이집트, 1869-1882년
이집트의 고대사는 잘 몰라서 어렵다. 그리고 근대사는 복잡해서 어렵다. 19세기 말 이집트는 명목상 엄연히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지만, 술탄의 대리자인 총독(Khedive)이 다스리는 사실상 '독립국'이었다. 이집트는 이스마일 파샤(Isma'il Pasha, 1830-1895년) 총독의 지휘 아래 19세기 중반부터 근대화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철도와 전화선이 놓였다. 학교, 항구, 관개 시설이 설치되었다. 수출량도 급속도로 증가했다. 알렉산드리아는 유럽 자본가들이 체류하는 국제적인 도시로 탈바꿈했다. 특히 프랑스의 공학과 유럽의 자본(투자금)으로 건설된 수에즈 운하가 1869년에 개통한 이래, 안 그래도 중요한 이집트의 지정학적 입지가 더욱 부각되었다(Mentiply, 2009: 1-2). 특히 영국에 그랬다. 영국-인도 항해 기간을 비약적인 수준으로 단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75년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정부는 수에즈 운하에서 영국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주식의 44퍼센트를 매입했다(Mentiply, 2009: 2). 이집트를 중심으로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집트 정부는 수에즈 운하 건설 때 빌린 투자금으로 채권국 열강들에 크게 휘둘리기 시작했다. 과도한 부채와 방만한 재정 운영으로 이집트는 결국 (영국이 운하 주식을 매입한 다음 해인) 1876년에 파산했다. '떼인 돈 못 받아내겠다' 싶은 주요 채권국들은 1876년에 고센-주베르 합의(Goschen-Joubert Agreement)에 따라 '이집트국채관리위원회(Caisse de la Dette Publique)'를 설립하여 이집트 재정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1879년엔 이집트 총독 이스마일 파샤까지 퇴위시키고 그의 아들인 테우피크 파샤(Tewfiq, 1852-1892년)를 총독 자리에 앉혔다. 대표 채권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의 재정과 정부 운영을 직접적으로 감독하는 공동 관리 체제(Dual Control)를 구축했다. 목적은 간단했다. 이집트 정부가 자신들에게 진 빚을(이자를 포함해) 갚도록 만드는 것.
이에 1880년에 국제법인 이른바 '청산법(Law of Liquidation, 1880)'이 마련되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등 채권국이 채권자를 보호하기 위해 '법'으로 이집트국채관리위원회의 권한을 공식화하고, 이집트 정부의 수입 및 부채 상환 방식을 자신들의 뜻에 맞게 규정한 것이다(Hopkins, 1986: 378). 청산법은 이집트의 총부채가 9,800만 파운드에 달한다고 명시했고, 이자 부담을 완화해 주기 위해 연이율을 7퍼센트에서 4퍼센트로 줄였다. 이집트는 이제 채권국들의 비공식적 속국이 되었다.
서구 열강이 한참 개입하던 때 일이 터졌다. 1879년, 이집트 장교 아라비 파샤(Ahmed Urabi, 1841-1911년)가 이집트 경제가 외세에 통제당하는 국가적 굴욕감과 정부 부패에 불만을 이용하여 이른바 '아라비 봉기(Urabi Revolt, 1879-1881년)'를 일으켰다. 1881년 9월엔 급기야 반서구적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유럽인들이 이슬람교 신앙과 전통을 침해한다는 피해의식과 민족의식이 봉기를 가열시켰다. 아라비는 종교-민족주의적 감정을 동력 삼아 강력한 반서구적 태도를 보였고, 영국과 프랑스가 내세웠던 테우피크 파샤 총독의 실권까지 빼앗아 버렸다.
글래드스턴은 처음엔 이집트인들이 일으킨 봉기에 공감했다. 민족주의와 자치에 대한 염원에 공감하던 그답게, 아라비 봉기를 '정당한 투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봉기에 관한 현지 관리들의 보고서를 읽으면서 점차 생각이 달라졌는데, 범이집트 민족주의 운동에서 권력욕으로 똘똘 뭉친 소수의 군사 파벌이 일으킨 '질서 훼방'으로 견해가 바뀐 것이다. 그에게 질서는 '평화'와 동의어였고, 무질서를 야기한 아라비는 평화를 깨뜨린 '악당'이었다. 글래드스턴은 그럼에도 이집트 문제에서 영국이 초연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수에즈 운하의 안전, 채권소유주들의 압력, 현지 관리들의 주장, 영국-프랑스가 수립한 이중 관리 체제의 붕괴, 이집트 재정 상황에 대한 우려가 합심으로 개입을 촉구하자 결국 글래드스턴은 '질서(평화) 재건,' '재산권 보호,' '수에즈 운하 보호'를 위해 영국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Matthew, 1997: 384-385; Mentiply, 2009: 1-2; 김기순, 2017: 214).
글래드스턴은 원래 유럽협조체제(Concert of Europe)를 소집하여 이집트 문제를 국제적 차원에서 평화적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글래드스턴이 보기에 이집트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질서 회복이었는데, 유럽이 집단적으로 이집트 사태에 개입한다면 질서 회복을 위한 노력에서 영국이 지는 부담이 줄어드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열강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심지어 독일의 위협을 우려한 프랑스마저 직접적인 개입을 꺼렸다. 결국 채권국들 중 영국만이 마지막까지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1882년 1월 6일, 영국은 이집트 총독 테우피크의 권위를 회복하는 길만이 이집트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공동성명(Joint Note)을 발표했다. 이집트 총독의 권위를 침해하는 어떠한 행위도, 사회 개혁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총독 및 위정자들의 부패에 불만이 많았던 아라비 파샤와 온건한 개혁파들은 영국-프랑스 공동성명에 분노했으며, 수많은 파벌들을 아라비의 대의 아래 뭉치게 만들었다(Galbraith & Al-Sayyid-Marsot, 1978: 475; 481). 이제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의 '적'이었다. 적어도 아라비가 생각하기엔.
1882년 6월 11일, 결국 일이 터졌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반서구 폭동이 일어나 (영국 해군 장교 1명을 포함) 50명의 외국인들이 학살당하고, 영국 영사가 부상을 당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아라비 파샤가 카이로에 있었기 때문에 폭동의 진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동안 개입을 꺼리던 많은 영국 각료들을 '개입주의자'로 만들긴 충분했다. 인도성 장관 하팅턴 후작(Marquess of Hartington, 1833-1908)은 이제 개입은 피할 수 없으며, 설령 오스만 제국과 프랑스가 불참할지라도, 영국은 반드시 이집트 사태에 직접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각은 동요했다(Galbraith & Al-Sayyid-Marsot, 1978: 483-484; Hopkins, 1986: 372). 아라비의 포로의 불과하던 이집트 총독 테우피크 파샤는 비밀리에 영국에게 알렉산드리아를 포격하라고 타전했다(Hopkins, 1986: 375). 빼앗긴 권력을 되찾을 유일한 방법이 아라비 축출임을 잘 알았던 것이다. 외국 군대의 힘을 빌려서라도 권력을 되찾는 것이 그에겐 더 중요했다.
그럼에도 글래드스턴은 끝까지 망설였다. 6월 26일까지도 병력을 파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의회에서 주장했다(Mentiply, 2009: 2). 하지만 내각과 해군성이 무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상황에 대안은 별로 없었다. 결국 수상은 마지못해 알렉산드리아에 함대 파견에 동의했다. 동시에 의회에 전쟁을 위한 230만 파운드의 예산과 소득세 인상을 요청했다(김기순, 2017: 215). 이후 글래드스턴은 국제적 이해를 대변하여 질서를 확립한다는 이유로 알렉산드리아 포격에 동의했고, 경험 많은 군인 가넷 월슬리(Garnet Wolseley, 1833-1913년)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Matthew, 1997: 389). 포격이 결정되자 급진주의자였던 존 브라이트(John Bright, 1811-1889년)가 내각에서 사임했으나, 영국 여론은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
7월 11일, 이집트가 최후통첩을 거절하자, 영국 함대가 알렉산드리아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영국-이집트(Anglo-Egyptian War)' 전쟁이 개시된 것이다. 포격 혹은 전쟁의 목적은 간단했다. 아라비 파샤가 야기한 혼란을 수습하고, 이집트 총독의 권위를 보장하여 질서(평화)를 확립하는 것. 영국과 비밀리에 접선하던 이집트 총독 테우피크는 포격이 시작되자 긴급히 영국군 군함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아라비 반군이 혼란에 포격으로 빠져있을 때 신속하게 지상군을 투입하라고 종용했다(Galbraith & Al-Sayyid-Marsot, 1978: 484; 486).
무력 개입을 지지하던 하팅턴은 영국 전함들이 알렉산드리아를 폭격하면, 아라비가 놀라 자빠질 것이라 생각했지다. 그러나 놀라 자빠진 사람이 있다면 그건 하팅턴 자신이었다. 아라비는 군대를 소집해 영국에 싸움을 걸어왔다(Galbraith & Al-Sayyid-Marsot, 1978: 487). 결국 8월, 몰타, 키프러스, 아덴에 주둔하던 병력 2만 4천 명으로 이루어진 원정군이 이집트에 상륙했다. 작전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9월 13일, 월슬리의 원정군은 운하 근처에서 아라비 군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이른바 '텔엘케비르 전투(Battle of Tell El Kebir)'라 불리는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1시간 안에 아라비의 부대를 분쇄하여 수에즈 운하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었다. 봉기의 주동자였던 아라비 파샤는 체포되었고, 스리랑카로 유배되었다. 이로써 아라비 봉기는 완전히 진압됐다. 영국은 이집트를 장악했다. 이집트 총독 테우피크의 권한도 회복되었다. 물론, 그도 영국의 지시를 받아야 했지만.
이집트가 안정되자 정부의 인기가 치솟았다. 수상 자신도 꽤나 흡족했나 보다. 글래드스턴은 하원에서 영국-이집트 전쟁을 '정당한 기독교인의 전쟁'이라고 평가했다. 글래드스턴은 영국이 '세계의 교차로'인 나일 강과 수에즈 운하의 지배자가 되었다면서 허세 섞인 승리감을 예외적으로 표출했다. 글래드스턴은 주교들에겐 승전가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를 울려달라고, 전쟁성에겐 런던의 여러 공원에서 승전의 축포를 터뜨려달라고 주문했다(Galbraith & Al-Sayyid-Marsot, 1978: 487; 김기순, 2017: 215). 글래드스턴의 말대로, 영국은 유구한 고대 문명의 지배자가 되었다. 속전속결로 이집트를 정복한 영국은 최근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겪은 굴욕과 대비되어 더욱 영광스럽게 빛났다(Matthew, 1997: 389-390).
글래드스턴의 초상
우리는 영국의 이집트 점령 과정을 자세히 보았다. 결국 도덕정치를 내건 글래드스턴은 '예상대로' 위선적인 정치인이었던 것일까? 결국 그도 제국의 질서에 저항하는 약소국민들을 가차 없이 징벌한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였던 것일까? 아니, 애초에 글래드스턴이 내건 도덕정치는 무엇이고, (도덕정치에도 불구하고) 대체 무슨 명목으로 이집트 포격과 점령을 결정했던 것일까?
그와 동시대 인물인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년)가 냉정한 '현실정치(Realpolitik)'의 대가였다면, 영국의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이른바 '도덕정치(Moralpolitik)'의 화신이었다. 그는 정치를 하나님이 내린 소명이라고 믿고 도덕과 종교를 정치에 연동시킨 정치인으로, 엄격하고 진지하고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다.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면 정치적으로도 옳지 못했다. 글래드스턴은 수많은 연설과 집필 활동을 통해 자유당에게 투표하는 것은 단지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기독교화'에 대한 투표임을 분명히 했다(박지향, 2012: 549-550).
당대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글래드스턴을 우러러봤는데, 그는 '강한 만큼 선하고자 하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의 이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고귀한 숭고한 목적에 삶을 헌신하는 그를 거의 성인(saint)처럼 간주했다. 심지어 글래드스턴이 진짜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인가 아니면 정신적인 존재인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을 정도로 일반적인 인간의 개념을 초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일생에 걸쳐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는데, 그의 일기를 읽고 있으면 기독교 신앙이 놀랄 만큼 압도적으로 그의 삶에 뿌리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글래드스턴에게 정치는 하나님의 의지가 구현되는 현장이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필경사'의 역할을 맡기셨다는 글래드스턴의 확고한 믿음은 그의 믿음과 삶이 위선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박지향, 2012: 551). 비스마르크 못지않은 현실정치의 대가이자 유능한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를 듣는 보수당의 디즈레일리와 여러모로 대비되는 인물이리라.
그렇다면 글래드스턴의 도덕정치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그의 입장에서) 디즈레일리의 '부도덕정치'를 강력하게 비난한 것으로 유명한 미들로시언 유세(Midlothian Campaign)에서 글래드스턴은 여섯 가지 도덕적 외교의 원칙을 설명했다: 1) 국내의 정의로운 입법 과정과 경제를 통한 제국 강화 촉진, 2) 평화 유지 및 보존, 3) 유럽 협조체제 유지, 4) 불필요한 개입 회피, 5) 모든 민족의 평등성 인정, 6) 자유에 대한 사랑. 글래드스턴은 유세 중에 보수당 정부가 일으킨 제2차 아프가니스탄 전쟁(Second Anglo-Afghan War, 1878-1880년)을 도덕정치에 어긋나는 부정한 전쟁으로 강력하게 비난했다. 다음은 글래드스턴의 1879년 11월 연설이다:
"기억하라, 우리가 "야만인"이라 부르는 이들의 권리를. 기억하라, 그들의 소박한 가정이 그들에게 주는 행복을. 전능하신 하나님 눈 앞에, 눈 내리는 겨울 산촌에서 사는 아프간인들의 삶은 우리들의 삶만큼이나 신성불가침한 것임을 기억하라. 주께선 여러분을 같은 혈육을 지닌 사람으로 묶으셨고, 서로를 사랑하는 법으로 결속하셨다. 그 사랑은 이 나라의[영국의] 해안선에 제한되지도 않고, 기독교 문명의 경계선으로도 제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표면 모든 곳에 퍼지는, 가장 비천한 자부터 가장 위대한 자까지 모두를 포용하는 광대한 사랑이다(Morley, 1903: 595에서 재인용)."
아름다운 연설이다. 하지만 '존중'과 '사랑'을 운운한 글래드스턴은 어떻게 군사적 개입이나 점령을 지지할 수 있었을까? 일단 우리의 고정관념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글래드스턴에게 '제국'은 반드시 사악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제국의 힘은 '국가의 권력'처럼 그 자체론 가치중립적인 것이었다. 선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면, 제국은 선한 힘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사악한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년)과 다르게 도덕적 제국주의 이념에 교조적으로 매달리진 않았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영국에 의한 평화(Pax Britannica) 속에 '선한 힘'으로 펼쳐질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면 제국은 위대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글래드스턴은 이렇게 말했다. "제국은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을 위해 그 영토를 사용할 수 없다면 정당화될 수 없다(김기순, 2017: 233)." 결국 그의 제국은 21세기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제국'과 달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글래드스턴이 생각한 '정당화된 제국'은 무엇이었을까? 글래드스턴이 생각한 선한 제국이란 위에서 말한 여섯 가지 도덕 외교를 원칙으로 삼는 제국이었으며, 그런 선한 제국의 역할은 '보다 많은 자유'를 제국의 영토에 약속하는 것이었다. 더 많은 자치권, 더 많은 신앙의 자유, 더 넓은 자유 무역. 자유의 확대 이념에 헌신하는 글래드스턴의 제국주의 견해를 흔히 '자유주의적 제국주의(Liberal Imperialism)'라 부른다. 실제로 그가 이 용어를 사용한 적은 없는 것 같지만 말이다. (글래드스턴 사후 자유당 내에서 한 분파로 발전한 '자유당 제국주의'와는 다른 개념이다.) 반면 제국이 권력욕과 물욕의 도구로 사용되는 '공격적인 제국주의'는 부도덕한 것이었다. 선한 용도로 쓰일 수 있는 도구를 사악하게 사용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글래드스턴은 "나는 제국주의는 반대하지만, 제국에는 헌신한다."라는 말로 자신의 제국관을 말끔하게 표현했다. 다시 말해, '탈식민화(제국의 붕괴)'와 '팽창주의(노골적인 제국주의)' 모두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글래드스턴은 제국 안에서 자유를 확대하고 무분별한 팽창주의를 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제1차 내각 시절(1868-1874년)에 캐나다에서 영국군을 철수시켰고, 피지 제도 병합을 촉구하는 내각 및 선교사들의 압력을 물리쳤다. (디즈레일리는 집권 벽두에(1874년) 피지를 병합했다.) 또한 백인 정착지에서 종교적 다원주의를 지지했고, 1869년엔 아일랜드에서 영국국교회를 폐지했다. 2차 내각의 출범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제3차 내각(1886년)과 제4차 내각(1892-1894년) 시절엔 자신의 경력과 당과 제국의 미래를 걸고서 '아일랜드 자치(Home Rule)'를 추구했다. 뿐만 아니었다.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을 지원했던 디즈레일리와 다르게, 글래드스턴은 오스만 제국의 유지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 수 있는 기독교민 민족주의 운동을 지지했다(안덕광, 2017: 205). 제국의 의미를 '도덕화'한 것이다(김기순, 2017: 210-211; 233).
그러나 그런 고귀한 정신에도 약점은 있었다. 글래드스턴이 보기에, '자치'와 '자발적인 연합'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같은 백인 정착지에나 적합했다. 인도, 아프리카, 아시아 등 비백인 식민지엔 자유주의 정신이 한참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영국은 이 지역에선 식민지민의 '최상의 이익'을 위해 통치할 의무가 있었다. 유아에게 스스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무제한적 자유를 주는 것이 옳지 않은 것처럼, 영국이 자유의 부모이자 교사로서 약소국의 성장을 돕는 것은 고귀하고 선한 의무였다. 영국 정부가 자치 능력을 충분히 배양한 뒤에야 그런 자유가 가능할 것이었다. 이런 생각이 위선적이지 않았던 것이, 글래드스턴은 인도 총독 리펀 후작(Marquess of Ripon, 1827-1909년)이 인도에서 일군 여러 자유주의적 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조길태, 1997: 256-257; 275; 김기순, 2017: 235).
이집트에서도 같은 논리였다. 앞에서 말했듯, 글래드스턴은 이집트 민족주의 운동에 시작부터 공감했다. 1882년 1월에 '이집트인을 위한 이집트'는 이집트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말이다. 이집트의 자치가 술탄의 권리, 외채 지불, 수에즈 운하 안전 같은 영국의 이해관계를 유지하는 일과 충분히 병존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김기순, 2017: 214). 그러나 이집트 주재 영국인 관리들이 아라비 봉기는 폭력적이고, 진정한 민족주의 감정에 근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유럽의 이익에도 해가 된다고 설득하자, 글래드스턴은 그때 비로소 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열강의 개입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글래드스턴이 보기에, 열강이 개입하여 혼란을 수습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 도덕정치, 즉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였으며, 결국 "이집트"와 "이집트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혼란 수습은 질서를, 질서는 곧 평화를 의미했으니까(Mentiply, 2009: 2). 무질서가 수습되고 평화가 찾아오면 이집트는 더 많은 자치와 더많은 자유무역을 누리리라. 이로써 '불필요한 개입 회피'라는 네 번째 도덕 외교 원칙은 '평화 유지 및 보존'이라는 두 번째 원칙과 자유 확대라는 여섯 번째 원칙으로 극복되었다. 이집트 개입은 이제 '필요'해졌다.
무엇보다 빚을 상환하지 못한 것은 이집트였다. 글래드스턴이 보기에,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지든, 궁극적 책임자는 영국이 아닌 이집트였다. 게다가 유럽인들을 학살하여 먼저 도발한 것도 이집트였으니, 글래드스턴 입장에선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적었을 것이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괴롭힌다는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약소국 통치자라고 해서 반드시 선량한 것도, 정의로운 것도 아니다. 채무불이행은 도덕적 잘못이었다. 학살은 더 큰 부도덕이었다. 글래드스턴은 아라비 봉기를 (그가 지지했던 다른 민족주의 운동과 다르게) '군사적 폭동'으로 간주했다. 그런 불법적인 폭동과 주모자인 아라비 파샤는 철저하게 징악돼야 했다(안덕광, 2017: 207).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글래드스턴은 영국의 수상으로서 개입의 최종 결정권자이자 총책임자였지만, 내각을 완전히 장악하진 못한 상태였다. '다양한 이념들의 일시적 동맹'이 특징인 영국 자유당의 특성상 내각 수뇌부들의 동의와 지지는 매우 중요했는데, 당내 우파인 하팅턴 후작부터 당내 급진파인 채임벌린(Joseph Chamberlain, 1837-1914년)과 찰스 딜크(Charles Dilke, 1843-1911년)까지 이집트 사태 개입을 강력하게 지지하자, 글래드스턴은 개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체임벌린과 딜크가 이집트 개입은 채권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그런 속물적인 전쟁이 아니고, 운하를 보호하고 알렉산드리아 폭동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라고 설득하자, 글래드스턴은 그때 비로소 여태껏 꺼리던 군사적 개입을 결심했다(Hopkins, 1986: 372).
여기에 더해 글래드스턴이 이해한 이집트 사태와 실제 이집트 사이의 괴리도 한몫했다. 당시 글래드스턴의 최우선 관심사는 이집트가 아닌 아일랜드였고, 이집트는 아무리 잘해도 '두 번째' 관심사였다(Hopkins, 1986: 382). 글래드스턴은 이집트 사태에 대한 언론 보도와 현지 관료들의 보고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즉, 그가 아는 이집트란 곧 '보고서 속 이집트'였다. 그렇기 때문에 현지 관료들의 선입견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현지 관료들이 아라비 봉기를 폄하하고 개입의 정당성을 운운하자, 글래드스턴은 자신의 도덕정치를 타협하지 않고도 개입을 결정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으레 생각하는 것만큼 수에즈 운하 사수 명분이 개입의 동기였던 것은 아니다. 운하는 물론 중요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중요하진 않았다. 글래드스턴은 이미 1877년에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잃어도 재앙은 아니라고(조금 더 돌아가면 되니까), 그러니까 이집트 점령을 운하 보호라는 핑계로 정당화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현지 관리들도, 해군성도, 운수업자들도 마찬가지였다(Hopkins, 1986: 373). 아라비가 설령 운하를 봉쇄한다고 해도, 영국 전함 몇 척이면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운하를 보호하기 위해'라는 구호는 실제로 개입을 결정한 후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온 수사였지(Hopkins, 1986: 374), 글래드스턴과 글래드스턴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인사들(내각과 현지 관료)이 "운하 때문에" 개입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운하 때문에' 개입에 이르렀음을 입증하는 사료는 매우 적다(Galbraith & Al-Sayyid-Marsot, 1978: 472-473).
좋은 의도와 좋지 않은 결말
역사에 정말 숱하게 등장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는 바로 '나쁜 열매를 맺는 좋은 의도' 레퍼토리다. 눈물도 슬픔도 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숭고한 시도들이 아름답게 끝난 적이 있던가. 선한 의도를 가슴에 품고 시행한 정책들이 파국으로 치닫는 일이 역사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긴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도 매일같이 겪는 현상이니까.
1882년 영국의 이집트 점령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적어도 글래드스턴의 입장에선 그렇다. 글래드스턴은 이집트 문제에 개입하여 '질서'를 재건하길 원했지, 그곳을 정복하고 통치할 마음은 없었다. 반란을 진압하고, 이집트에 온건한 정부를 수립하여 무질서를 수습하고, 채권자들을 안심시키고, 수에즈 운하의 안정을 되찾은 후, 곧바로 철수하는 것. 이것이 글래드스턴 내각의 목표였다(안덕광, 2017: 205-207). 선한 목적을 위한 개입, 즉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였다.
위선이 아니었다.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글래드스턴은 이를 분명히 밝혔다. 이스탄불의 술탄이 (종주권을 오스만 제국이 계속해서 보유한다는 조건 하에) 영국의 이집트 통치를 제안하자, 글래드스턴과 외무성 장관 그랜빌 백작(Earl Granville, 1815-1891년)은 바로 거절했다(Matthew, 1997: 385). 원정군 지휘관인 월슬리에게 내린 명령도 명료했다. 바로 "이집트를 구하고, 가능한 조속히 철수하라"라는 것(안덕광, 2017: 206에서 재인용). 또한 영국군이 막 이집트를 장악한 1882년 9월 15일, 글래드스턴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1-2주 후에 이집트에서 철수하길 희망한답니다(안덕광, 2017: 206에서 재인용)."라고 썼으며, 1883년에도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이집트의 질서를 유지하고, 총독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안덕광, 2017: 207). 또한 자신의 일기장엔 "이집트에서 영국군은 가능한 한 빨리 철수해야 한다."라고 간단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1882-1922년 사이, 영국 정부는 무려 66번이나 철수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Hopkins, 1986: 388).
이는 자유당 각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앞서 말했듯, 가장 급진적이었던 브라이트는 알렉산드리아 포격 결정 단계부터 사임했다. 인도성 장관과 해군성 장관이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즉각적인 철수에 반대했지만, 조셉 채임벌린 등 여전히 많은 각료들은 상황이 안정되고 운하 문제가 해결되면 철수가 가능하리라 생각했다(안덕광, 2017: 206).
글래드스턴 내각은 이집트에서 영국이 무리한 부담을 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고 항구적인 자유주의적 개혁을 위해서라도 이집트 총독 체제를 신속히 회복하는 것이 필요했다. 게다가 세간의 평가와 다르게, 완전한 합병은 경제적 득이 아닌 '짐'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던 것이다. 또한 오스만 제국 영토에 영국이 계속해서 주둔하는 것은 오스만 제국의 안정성도 위협하는 것이었다(Matthew, 1997: 391). 도덕적인 차원에서든 현실적인 차원에서든, 점령은 반드시 '잠정적'이어야 했다(김기순, 2017: 216).
자유당 정부가 '조속한 철수'를 원했지만, 상황은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글래드스턴은 이집트 질서 재건을 위해선 채권과 관련된 재정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Matthew, 1997: 392), 이집트 정부의 안정은 이 모든 문제 해결의 전제였다. 만약 이집트 정부가 지속적으로 불안정하고 무정부를 낳을 공산이 크다면, 이집트 재정을 논하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 하지만 영국군이 이집트에서 자치정부를 수립하려는 유일한 현지 세력(아라비 파샤)을 일소하는 바람에, 영국군 없이 이집트 정권을 유지할 방법이 없었다. 현재 수립된 테우피크 총독 정부는 전적으로 영국군에 의존하고 있었다. 즉, 이집트 안녕의 근간은 영국의 군대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로 철수하면 안 될 이유만 늘어갔다. 1882년 11월, 영국 정부는 이집트 실황 조사를 위해 더퍼린 후작(Marquess of Dufferin, 1826-1902년)을 이집트에 파견했는데, 더퍼린은 이른바 「더퍼린 보고서(Dufferin Report, 1883년)」에서 이집트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현재 이집트 정부를 개혁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달리 말해, 생각보다 일이 오래 걸릴 것 같다는 말이다. 글래드스턴 정부는 이집트의 정치적 안정 확보라는 긴급한 이유를 들먹이며, 철수를 1883년 가을로 연기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안덕광, 2017: 208). 글래드스턴은 이블린 배링(Evelyn Baring, 1841-1917년)을 이집트 총독으로 파견하여 영국군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는 여건 조성 임무를 맡겼다(안덕광, 2017: 208).
재정 문제 타결, 즉 '채무 상환'도 중요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경제적 상황은 가히 재앙적이었다. 이집트는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 즉, 문제의 근원인 '채무불이행' 상태는 현재진행형이었다. 재정 문제는 후술할 이집트령 수단을 진정시키기 위해 지출할 전비 때문에 갈수록 나빠졌다. 이집트 총독 배링은 "이집트 재정 상황은 매우 나쁘다. (...) 나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을 경험한 적이 없다(안덕광, 2017: 209에서 재인용)."라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결국 글래드스턴은 이집트 재정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1884년 6월 28일에 런던 회의(London Convention)를 개최했다. 이집트 채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채권국 대표들이 런던에 모였다. 런던 회의는 다국적으로 맺은 청산법을 폐지하고 공채 소유자에게 지불할 배당액을 축소하자는 제안을 채권국들이 수용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영국-프랑스 관계를 이간질하길 원했던 독일의 작전대로) 프랑스를 포함한 채권국들은 영국의 이집트 예산 조율 방안을 모두 거절했다(Matthew, 1997: 392; 안덕광, 2017: 208-209). 이로써 다국적 협력으로(글래드스턴의 여섯 가지 도덕 외교 원리 중 세 번째) 이집트 정부에 대한 영국의 책임을 덜고자 했던 글래드스턴의 계획이 무산되었다.
또 하나의 변수는 이집트령 수단이었다. 수단 일대는 이집트가 1820년에 점령한 지역이었지만, 1881년에 발생한 민족주의 봉기로 인해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수단의 종교 지도자였던 무함마드 아흐매드(Muhammad Ahmad, 1843-1885년)는 수단에 신정국가인 '마흐디 국가(Mahdist State)'를 건설하고 이집트에 대항한 광범위한 종교 운동을 개시했다. 글래드스턴은 다른 민족주의 운동에 공감했던 것처럼, 수단인들의 투쟁 또한 정당하다고 간주했으나(Morely, 1903: 555-559 참고), 영국이 이집트를 점령한 후에 수단 문제를 좌시할 수만은 없었고, 특히 1883년 11월 5일 영국인 장교 윌리엄 힉스 휘하의 이집트군이 마흐디군에 습격을 받자, 글래드스턴 정부는 이집트의 안전과 수단에서 일어난 반란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1883년 11월 22일, 이집트 총독 배링은 본국에 "이집트는 카르툼(수단의 수도)을 장학할 수도, 마흐디가 이집트 국경을 공격하는 것도 막을 수 없다. 이집트는 위험해 처해 있다. 영국도 마찬가지다."라고 보고하자(안덕광, 2017: 210에서 재인용), 수단 문제에 방관자로 일관하던 영국 정부도 이집트를 지키기 위해 수단 문제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글래드스턴이 내세운 해결책은 영국이 이집트를 대신해서 수단을 재점령하는 것이 아닌, 이집트가 수단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이집트는 수단을 포기할 마음이 없었고, 영국의 제안을 거절했다. 외무성 장관 그랜빌 백작은 영국이 이집트를 점령하고 있는 한, 이집트 정부는 영국 정부의 지시를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링은 이집트 수상에게 수단을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사임할 것인지 양자택일의 제안을 했고, 1884년 1월 4일 영국 정부가 수단 철수(포기)를 계획하자 이집트 수상은 사임을 선택했다(안덕광, 2017: 210-211).
영국 정부는 가능한 신속하게 수단으로부터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글래드스턴은 1884년 1월 18일에 경험 많은 찰스 고든(Charles Gordon, 1833-1885년) 장군을 파견하여 수단 카르툼에 거주하고 있던 1만에서 1만 5천 명 정도의 유럽인 및 모든 이집트인들을 철수시킬 것을 명령했다. 글래드스턴은 늦장을 부리는 고든에게 이집트에서 한시바삐 사람들을 대피하라고 타전했으나, 마흐디군이 카르툼과 카이로 사이의 전화선을 차단하는 바람에 지시가 전달되지 못했다. 마흐디군은 카르툼을 에워쌌고, 고든은 장기간 카르툼에 고립되었다.
글래드스턴은 하원에서 수단을 재점령하기 위한 원정군 파견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수단에서도 '철수'가 우선이었다. 글래드스턴 정부는 고든이 극단적 위험에 처할 때까지 원정군 파견을 승인하지 않았지만, 카르툼의 상황은 실제로 좋지 않았다. 글래드스턴은 망설이다가 뒤늦게 월슬리 경을 카르툼에 파견하였다. 하지만 월슬리가 1월 28일에 카르툼에 도착했을 때 이미 고든은 사망한 이후 였다. 이집트와 수단에서 글래드스턴 정부가 보인 우유부단한 모습은 보수당과 급진주의자들로부터 심각한 비난을 초래했으며, 사실상 제2차 글래드스턴 내각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겼다. 글래드스턴은 카르툼 일로 한동안 '고든의 살해범'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앞에서 쭉 봤듯, 글래드스턴은 이집트를 안정화하고 신속하게 철수하길 원했다. 그러나 시퍼런 현실은 그의 이상주의를 산산조각 냈다. 이집트 정부는 영국의 개입 없이 유지될 수 없었다. 글래드스턴이 바라던 다자적 협력은 영국을 견제하려는 국가들의 계획으로 무산됐다. 이집트 재정 상황은 엉망이었다. 영국이 장기간 머물면서 압박하지 않는다면 채무를 상환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영국이 이집트에 장기간 머물면서 이집트 내정에 개입하자 이집트령 수단 문제에도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집트는 점점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 되어 글래드스턴 정부를 괴롭혔다.
개입의 결과
이집트의 재정 문제는 1885년 3월에 이르러서 타협점이 나왔다. 영국, 프랑스,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에게 재정 정비를 위한 2년의 유예 기간을 주고, 국제 보증 대부 900만 파운드를 오스만이 받으며, 공채 소유자에게 이자율을 인하하고, 이집트 재정을 감독할 열강의 국제위원회 설치하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영국은 여전히 정부와 운하를 보호하고, 이집트의 부채 상환을 감시해야 했다. 게다가 부채 상환 및 정부 안정을 위해 이집트의 정치적 · 행정적 개혁을 도모할 필요도 있었다.
영국의 이집트 점령은 결국 "장기 프로젝트"가 되었다. 글래드스턴 정부는 신속하게 봉기를 진압한 후 신속하게 철수하길 원했지만, 영국의 무력에 의해 질서가 수립된 이상, 영국군의 철수는 개입의 목적 자체를 헛된 것으로 만드는 길이었다(Hopkins, 1986: 388; 김기순, 2017: 216). 1885년, 영국이 파견한 배링은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운운하며 영국의 장기 통치를 합리화하기 시작했고, 1887년 즈음엔 철수 시기가 정해진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1890년이면 마음을 바꿔 아예 영국이 이집트를 통치하는 편이 가장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영국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남아서 이집트를 통치해야 했다. 글래드스턴과 다르게 보수당과 진정한 제국주의자들은 그것을 즐겼지만 말이다(Hopkins, 1986: 388-389).
결국 이집트는 (영령인도의 토후국들처럼) 영국의 조언대로 통치하고 영국군 주둔비를 제공하는 위치가 되었다. 글래드스턴은 끝까지 항구적이고 직접적인 제국 통치를 하지 못하도록 조치하길 원했다. 하지만 이집트 장기간 점령에 찬성하는 몇몇 인사들은 점령 기간이 늘어날수록 영국의 이집트 통치가 공고화될 것이라 보았으며, 결국 더퍼린이 자신의 보고서에서 제안했던 "숨은 보호령(veiled protectorate)"이 된 것이다(Matthew, 1997: 394). 잠깐이면 끝날 것 같던 영국의 이집트 통치는 1956년까지 이어졌다.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의 한계
1880년 4월, 글래드스턴은 도덕정치를 내걸고 제2차 내각을 시작했다.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는 디즈레일리와 자신은 다르다는 것이다(Mentiply, 2009: 1). 고결한 이상주의가, 원대한 자유주의의 꿈이 분위기를 지배했다. 하지만 1882년, 영국 함대가 알렉산드리아를 포격하고, 원정군이 상륙하여 이집트의 실권을 무력으로 장악하자 영국인들은 글래드스턴의 진정성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빠른 철수'를 약속, 또 약속했지만 글래드스턴은 결국 살아생전에 영국이 이집트에서 철수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집트 점령으로 반짝 치솟은 인기도 카르툼 사태로 물거품이 되었다(김기순, 2017: 217). 자유당은 보수당만큼 자신도 공격적일 수 있음을, 이집트 사태를 주도한 자신들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벌인 보수당만큼 비이성적인 자들임을 공공연하게 증명했다(Galbraith & Al-Sayyid-Marsot, 1978: 488). 그렇다면 디즈레일리와 무엇이 달랐다는 말인가?
많은 역사학자들에게, 특히 역사를 이념에 끼워 맞추기 즐겨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에게 디즈레일리는 '솔직한 제국주의자' 글래드스턴은 '위선적인 제국주의자'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글래드스턴은 위선적이지 않았다. '질서 재건 후 신속한 철수'라는 글래드스턴의 목표를 의심할 이유는 없다(Hopkins, 1986: 388; 안덕광, 2017: 217). 앞에서 이미 다뤘듯, 글래드스턴은 이집트를 양도하려는 오스만 제국의 제안을 거절했다. 원정군 지휘관에 내린 지침도 일을 신속하게 마무리 짓고 철수하는 것이었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나 자신의 일기장에 적은 글 모두 글래드스턴이 위선자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게다가 캐나다, 아일랜드, 피지 제도 등 글래드스턴 내각이 취급했던 다른 제국적 안건을 고려할 때, 이집트 점령 목표는 글래드스턴이 밝힌 그대로였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공식적으로 남긴 글이든, 사적으로 남긴 글이든, 모두 대중과 사후평가를 의식하고 남긴 글이라고. 다른 정치인들처럼 그도 흑심을 품었을 줄 누가 아냐고. 맞는 말이다.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사람들은 때론 지나치게 정치인들의 동기를 의심한다. 물론 그 의심은 대부분 타당하다. 하지만 '정치인이 내세우는 명분은 언제나 겉치레일 뿐, 진짜 원하는 것은 돈과 권력이다'라는 식의 사고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이는 이해(interest)라는 것이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리는 결론이다. 누군가에겐 빵보다 명예가, 누군가에겐 칼보다 대의가 더 중요한 법이다. 글래드스턴이 이집트에서 추구했던 것은 빵(돈)이나 칼(권력)이 아니라, 정의의 구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글래드스턴과 그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는 '모든 제국주의자는 사악한 위선자'라는 편견에 날리는 일격일 것이다.
이집트가 결국 영국 제국에 속한 '또 하나의 보호령'으로 전락한 이유는, 글래드스턴 정부의 치밀한 음모 때문이 아니라, 선량한 의도를 꺾고 왜곡하고 '복잡한 현실' 때문이다. 나쁘게 말하면, 글래드스턴은 사악했던 것이 아니라 무능했던 것이다. 도덕정치라는 이상주의에 눈이 멀어 현실 속 정치판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집트 총독 배링이 글래드스턴은 이집트 문제에 놀랄만큼 무지했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일 것이다(Galbraith & Al-Sayyid-Marsot, 1978: 479). 이상이 현실을, 당위가 존재를 가렸다.
이집트 현실에 어울리는 것은 디즈레일리와 비스마르크의 현실정치였지, 그의 도덕정치가 아니었다. 적의 사기를 분쇄하기 위해 도시를 불바다로 만드니, 적은 오히려 싸움을 걸어왔다. 봉기를 진압하니, 오직 영국군만이 질서를 유지하고 운하를 보호할 수 있었다. 채무 상환을 위해 이집트 재정 관리를 시작하니, 이집트령 수단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제접 협조는 꿈같은 소리였다. 현실정치에 익숙한 열강의 정치인들은 영국을 견제하기 바빴다. 이집트라는 수렁에 빠진 글래드스턴의 영국을 보고 비스마르크는 분명 즐거웠을 것이다. 영국은 개입을 결정한 명분이라도 사수하기 위해서 이집트에 오래오래 주둔해야 했다. 이집트라는 현실은 이상주의자들이 미처 예측하지 못한 우발적인 사태의 연속이었고, 모든 변수가 튀어나오자 이집트는 늪이 되어 글래드스턴과 내각을 발목 잡았다(Galbraith & Al-Sayyid-Marsot, 1978: 487). 가장 고결한 도덕정치가마저 한낱 '위선적인 제국주의자'로 보이게 만든 것은 "현실성 강력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현실정치는 도덕정치보다 강력했다. 적어도 제국의 세계에서는.
현실 속 자유주의적 제국주의는 그렇게 '실패'한다. 수단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강대국의 협조가 있었을지라도, 다른 우발적인 사태가 없었더라도, 이집트에 영국식 자유주의 정부를 세우는 것은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글래드스턴이 내세운 더 큰 자치, 더 폭넓은 자유무역, 더 많은 신앙의 자유. 이를 보장하는 공명정대한 자유주의 정부 건설. 참 좋은 목표, 참 고귀한 목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도덕적 열망이 없다. 그들은 빵을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양보할 준비, 내가 믿지 않는 종교를 박해할 준비, 자기 민족의 안녕을 위해 타국을 침범할 준비가 되어있다. 내가 종사하는 산업이 제아무리 생산성 낮고 비효율적일지라도 정부의 보호를 바라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유를 강제'하려는 자유주의적 제국주의는 역겹고, 의심받기 마련이다.
글래드스턴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는 이집트에서 패배했다. 그의 이상주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자유주의와 이상주의의 패배를 보고 보수주의자로서, 현실주의자로서 자랑스러워할 필요는 없다. 이집트 점령은 글래드스턴 개인의 오점이기도 하지만, 인류 모두의 오점이기 때문이다. 이곳 현실은 우리의 꿈이 펼쳐지는 곳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꿈이 사람과 함께 늙어 죽는 곳이니까. 그랜빌이 글래드스턴을 "거대한 광인(magnificent lunatic)"이라 불렀듯(Galbraith & Al-Sayyid-Marsot, 1978: 480), 현살에서 꿈꾸는 사람들은 모두 광인인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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