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인간 칼뱅의 초상

by 조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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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2016년이었다. 당시 우리 교회 청년부실 책장엔 『칼빈 이야기(The River of Grace: A Story of John Calvin)』라는 책 한 권이 꽂혀 있었다. (지금도 있나 모르겠다.) 중고서점 창고에나 있을 법한 촌스럽고 색 바랜 표지였지만, 원체 평전 장르를 좋아하기에 제목에 끌려 힐끗힐끗 보곤 했었다. 그러다 그 해 여름, 오사카로 5박 6일 여행을 갈 때 그 책을 슬쩍 가져갔고, 여행 중에 완독해 버렸다. 오사카의 뜨거운 여름 덕분이었다. 하루에 두세 번씩 카페로 '피신'을 가야 했으니까. 달달한 아이스 카페모카를 한 모금 빨자 책이 정말 술술 넘어갔다. 책의 내용은 이제 흐릿하게 기억나지만, 거대한 가톨릭 교회와 전면 승부를 했던 그의 삶의 비장함만은 생생하다. 그는 내게 사람으로서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 이후로 책을 수십 권, 아니 수백 권 읽었다. 취향이 한결같아 '문사철'만 꾸준히 읽다 보니 굳이 칼뱅에 "대한" 책이나 신학서적을 읽지 않더라도, '칼뱅'과 '칼뱅주의'를 자주 접했다. 막스 베버(Max Weber)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이 그 전형적인 예다. 칼뱅을 비교적 가치중립적으로 언급만 했던 책이 대부분이었고, 보통 투박하게 '이랬다저랬다'식의 사실만 취급했다.


하지만 어떤 책들은 그러지 않았다. 몇몇 저자들은 아주 도발적으로 칼뱅을 공격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서양사학자 중 한 명이었던 고(故) 노명식 선생은 칼뱅 시대의 제네바가 "가혹한 독재적 신정정치"였다고 주장했다(노명식, 2011: 117). 유시민 작가는 칼뱅을 "현란한 신학 이론으로 무장한 광신자"라고 부르더니 급기야 "사이코패스"였다고 악담을 퍼부었다(유시민, 2013: 275).


어디 그들뿐이랴. 칼뱅에 대한 공격과 비난은 생각보다 전통이 깊다.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같은 (각각 영국, 프랑스, 독일을 대표하는) 저명한 글쟁이들도 칼뱅을 공격했다. 그것도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대동소이한 맥락으로. 이들이 생각하는 칼뱅은 피에 굶주린 독재자, 무시무시한 신정정치의 우두머리, 금욕주의를 강제하는 도덕주의자, 어떠한 반대도 용납하지 않는 원리주의자였다(McGrath, 2019: 12-13; 195-197).


나는 칼뱅을 '사이코패스'라 부른 유시민 작가의 글을 읽자마자 즉시 600페이지 분량의 칼뱅 평전을 구입했다. 브루스 고든(Bruce Gordon)이라는 역사학자가 쓴 『칼뱅(Calvin)』이었다. 나는 이 문제에 조금 더 깊이 파고들고 싶었다. 내가 듣고 배운 칼뱅은, 오사카에서 조우했던 칼뱅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칼뱅도 사람이었으니, 부족한 점이 허다했을 것이다. 융통성이 부족했던 사람은 맞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라는 가혹한 평가를 들을 만한 사람이었을까? 분명 이들은 칼뱅을 오해하고 있다고, 혹은 의도적으로 칼뱅을 모함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전문가가 쓴 평전을 주의 깊게 읽기만 한다면 '그들이 틀렸다'라는 사실이 훤히 드러나리라 믿었다.


내가 좀 순진했었을까. 고든이 쓴 칼뱅 평전은 첫 장부터 충격적이었다. 칼뱅에 대한 유시민 작가의 비난이 얼추 타당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책의 머리말엔 이렇게 쓰여 있다: "(...) 그는 무자비했고, 증오심을 표현하는 데서도 두드러졌다." "(...) 잘못된 우상숭배의 길로 간 사람들을 증오했다." "자신과 지적으로 동등한 수준의 사람은 만난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 "다른 사람을 지배했고 관계를 자기 뜻대로 조종하는 법을 잘 알았다." "최악의 악행 몇 가지는 차치하고, 친구들을 위협하고 괴롭히며 굴욕을 주기도 했다." 모두 평전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묘사다(Gordon, 2018: 15).


고민이 시작됐다. 신학적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긴 그리스도인이 동시에 "악당"의 성품을 품을 수 있는 것일까? 비그리스도인에게 '사이코패스'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나쁜" 사람도 참 그리스도인일 수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인은 그 열매로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칼뱅의 믿음은 결국 '죽은 믿음'이었던 것일까? 진실로 그러하다면, 그가 남긴 신학은 하나님 앞에 유효한 것일까? 이런 고민들이 끊임없이 내 머리를 강타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평전을 읽어 내려갈수록 칼뱅이란 사람을 입체적으로 보게 되었다. 그는 완벽한 성인군자도, 사이코패스도 아니었다. 칼뱅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이었다. 강함과 약함, 교만과 겸손, 위대함과 찌질함을 두루 갖춘,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 또 우리처럼 모순 많은 인간. 때론 지나치게 가혹했던 면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특히 그가 속했던 시대, 그가 처했던 상황, 그가 느꼈던 중압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랬다. 칼뱅에 대한 비난과 악담은 근거 없는 선입견과 날조에 불과했다.


칼뱅에 대한 오해는 풀렸지만, 나는 계속해서 칼뱅의 인간적인 면을 연구하고 싶었다. 외람된 말이지만, 칼뱅과 내가 많은 면에서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칼뱅은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의 지적 능력은 존경스러울 정도다. 단지 (그런 능력이 담긴) 사람의 성격, 기질, 표현, 태도, 양식 등이 나와 닮았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 능력치가 아닌 '스타일'이 닮았는 말이다.


이 글은 위대한 신학자이자 그리스도인이었던 장 칼뱅을 신학자가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 고찰한 글이다. 즉, 인간 칼뱅의 초상을 그리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그의 성격, 그의 태도, 그의 대인관계 방식에만 집중한다. 칼뱅의 신학을 언급하진 않는다.


(고든의 『칼뱅』을 처음 읽었던 날부터 기획했던 '글감'을 이제야 끄집어 낸다. 평전을 처음 읽었던 때가 2022년 7월이었으니까, 벌써 2년 반이나 흘렀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기에, 이 글을 쓸 심산으로 『칼뱅』을 다시 꺼내 처음부터 끝까지 한차례 더 완독했다. 다른 관점도 참고하고 싶어서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의 『장 칼뱅의 생애와 사상(A Life of John Calvin: A Study in the Shaping of Western Culture)』이라는 책도 추가로 구입해 읽었다. 두 권 모두 다른 논문이나 책에 수없이 인용된 훌륭한 책이다. 따라서 이곳에 쓴 칼뱅에 대한 묘사는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지성


영어엔 'deskbound'라는 형용사가 있다. 직역하면 '책상에 얽매인' 정도다. 보통 뭐든 "앉아서" 일하는 사람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칼뱅은 전형적인 deskbound형 인간이었다.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어딘가 침울해 보이는 칼뱅은 삶에 활력을 주는 원초적인 욕구들에 민감한 편은 아니었으나, '지식욕'만큼은 정말 왕성했다. 즉, 타고난 공부벌레였다. 파리와 오를레앙에서 보낸 학창 시절, 도서관과 기숙사 책상에 오래오래 앉아서 쉼 없이 지식을 빨아들이곤 했다. 전공인 법학 서적이나 성경만 읽었던 것은 아니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나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가 남긴 불후의 고전들도 열심히 탐독했는데, 특히 키케로의 글은 매년 다시 읽었다고 한다. 그 결과 칼뱅의 지성은 평생에 걸쳐 끝없이 확장하고 진화했다.


deskbound를 의역하자면 '현실에 아둔한'이다. 공부하는 사람이 으레 그렇듯, deskbound였던 칼뱅도 현실 문제에 상당히 아둔한 편이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보고 만지며 경험하기보단, 의자에 앉아 글과 사색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는 편이었다. 그래서 정치나 경제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상당히 무지했다. (적어도 그 일들을 직접 경험하기 전까진 그랬다.) 그는 옷(이론)이 사람(현실)에 맞추는 것이 아닌, 사람(현실)이 옷(이론)에 맞춰야 한다고 믿었고,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에 당위를 논하면서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윤리적으로 접근했다. 박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조금도 숨기지 말고 영광스럽게 순교하라고 편지했던 일이 대표적이다. 사람과 물질과 관계가 판치는 현실 세계는 '책상에 얽매인(deskbound)' 칼뱅에겐 무지의 세계, 기가 빨리는 세계였다. 차라리 학문이라는 이론의 세계가 가장 편안했을 것이다(McGrath, 2019:178; 263).


이론 세계의 시민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칼뱅은 '현실 속' 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말았다. 종교개혁의 최전방으로 그를 몰아붙인 것은 칼뱅의 소명 의식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아늑한 곳에 칩거하면서 (가장 편하고 가장 잘할 수 있는) 개인적인 연구에 몰두하길 원했다(Gordon, 2018: 99). 하지만 "[연구 외] 다른 일에서 자유롭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또 간청해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친구들의 간언을 하나님의 지시로 받아들이고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Gordon, 2018: 135에서 재인용). 그리고 그는 소명대로 교회를 건설함으로 역사를 바꾸었다.


칼뱅은 단순한 '지식인'이 아니었다. 그 이상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그는 박식했을 뿐 아니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지적이었다. 남들보다 이해가 빨랐고, 이해한 것을 쉽게 풀어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하나를 보고 열을 생각해 내는 그런 기발한 유형이 아니라, 오히려 열을 보고 하나의 핵심 원리(정수)를 뽑아내는 '통찰력'이 엄청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통찰력은 철두철미한 비판력으로 이어졌다. 칼뱅도 자신의 재능을 잘 알았는데, 그는 자신과 지적으로 동등한 인물을 만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칼뱅』의 저자인 고든은 "아마도 그의 생각이 맞을 것이다."라고 썼다(2018: 15). 동시대인이었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도,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Erasmus)도, 토머스 모어(Thomas More)도, 순전히 지적 능력 면에선 칼뱅보다 몇 수 아래였다. 심지어 칼뱅의 정적들도 칼뱅의 비범한 지성 때문에 더 위험한 인물이 되었다면서 그를 더욱 경계했다(Gordon, 2018: 597).


물론 칼뱅의 모든 지적 능력 중 최고는 성경을 해석하는 능력이었다. 위대한 신학자는 많다. 위대한 설교자는 더 많다. 하지만 칼뱅만큼 성경 풀이에 탁월했던 성직자는 드물다. 가장 위대한 신학서적 중 하나인 칼뱅의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칼뱅은 '이 구절 따로 저 구절 따로' 중구난방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경이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 속에 성경 전체를 하나의 체계로 묶었고, 명료하고 중언부언 없이 일관성 있게 풀이했다. 『기독교 강요』의 핵심이자 그가 믿었던 기독교의 핵심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며(total depravity),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sola gratia)'는 것이었다.


칼뱅의 지적 능력은 토론에서도 빛났다. 보름스에서 열린 신학 토론에선 뛰어난 가톨릭 신학자였던 루프레히트 폰 모샤임(Ruprecht Mosheim)을 완전히 제압하기도 했다. 전에도 사적인 자리에서 모샤임을 이신칭의 문제로 제압한 적이 있었다(Gordon, 2018: 194). 또 베른에서 열린 가톨릭 신학자들과의 토론에선 순전히 기억력만으로 교부 저술들의 정확한 출처까지 짚어가며 상대측 주장의 신빙성을 박살 내버린 적도 있었다(McGrath, 2019:179). 이 모든 승리는 궁극적으론 그가 믿는 바가 참 진리임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이해한 진리를 적절한 시점에 설득력 있고 논리정연하게 풀어내는 것은 순전히 그의 능력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받은 능력'이지만.)


또한 동시대 그 누구도, (심지어 루터조차) 칼뱅만큼 '정리하는 일'에 능통하지 않았다. '부수는 일'에 능한 종교개혁자들은 많았다. 칼뱅의 동료였던 기욤 파렐(Guillaume Farel)은 가톨릭이라는 악습을 부수고 다니는 '부정의 예언자'였다. 삼국지로 말하면 (똑똑한) '장비'라고 할까. 칼뱅의 영적 멘토였던 마르틴 부처(Martin Bucer)는 사소한 것도 장황하게 설명하는 신학자였고, 성경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풀이하는 데 상당히 서툴렀다. 칼뱅도 물론 파렐만큼 무시무시한 파괴자였다. 하지만 파렐과 달리 칼뱅은 건설(개신교 교회)을 위해 파괴하는 '건축가(architect)'였으며, 스승과 달리 제아무리 복잡한 진리도 간결하고 일목요연하게 풀이해낼 수 있는 '조직자(organiser)'였다(Gordon, 2018: 148; 203).


뛰어난 지성의 대가는 건강이었다. 칼뱅은 수없이 많은 까다로운 일들(연구, 설교, 감독, 범유럽 종교개혁 운동 등)을 부지런히 처리할 수 있는 능력자였고, 그 능력 덕분에 평생 살인적인 일정에 시달렸다. 오늘날 사람들이 떠올리는 칼뱅의 이미지는 압도적으로 '노인'의 모습이지만, 칼뱅이 사망했을 때 나이는 겨우 56세였다. 당시 기준으로도 고령은 아니었다.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 루터, 파렐, 부처 같은 대다수 종교개혁자들 모두 칼뱅보다 장수했다.


살인적인 일정은 운동 부족과 질병을 낳았다(Gordon, 2018: 598). 위대한 지성이 담긴 칼뱅의 육신은 너무나 약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심각한 편두통과 위장 장애를 달고 살았는데, 둘 모두 스트레스 증상으로 알려진 질병이다. 그뿐만 아니라 통풍, 폐결핵, 혈전성 치질 때문에 평생에 걸쳐 고생했다(Gordon, 2018: 268; McGrath, 2019: 46; 335). 과도하고 까다로운 업무가, 혹은 그 업무를 홀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칼뱅의 목숨을 앗아갔던 것이다. 뛰어난 머리와 뛰어난 신체가 공존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탈권위적


칼뱅은 어떤 면에선 자신이 속한 시대와 공간에 충실한 16세기 유럽인이었다.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선 구습을 충실히 따랐으며, 정치에선 왕정과 귀족정을 선호했다. 하지만 모든 위대한 인물들이 그렇듯, 어떤 면에선 시대를 과감히 초월한 인물이었다. 칼뱅은 시대가 요구하는 생각과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이해한(통찰해낸) 진리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런 면에서 칼뱅은 (모든 권위를 반대하는) 반권위적인 인물이 아닌, (권위 그 자체로부터 자유로운) '탈권위적' 인물이었다.


그 정도 지성이라면 가톨릭 교회 안에서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칼뱅은 가톨릭 관습들은 근거 없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망명을 택했다. 어떤 것이든 교회에 의해 "관습화"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진리의 원천은 그가 믿은 하나님의 말씀(성경)뿐이었다. 또한 참된 교회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하나의 가시적인 기관(즉, 가톨릭 교회)'이 아니었다. 칼뱅은 참된 교회란 자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들으며 성례가 적법하게 이루어지는 모든 곳이라고 주장했다(Gordon, 2018: 127).


물론, 단지 가톨릭 교회에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칼뱅이 탈권위적 인물이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질이 아닌 진리의 문제이니까. 다만 분명한 것은 권위에 순응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항적인' 지식인에 가까웠다. 학창 시절에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에라스무스의 번역에 시비를 걸거나, 소르본 대학교 신학 교수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는 등, 칼뱅은 다른 지적 권위자들의 의제에 순복하지 않았다. 중세 스콜라주의 철학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무시했고, 심지어 교부들의 지혜를 거부하는 일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칼뱅의 성경 주석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나 크리소스토무스(John Chrysostom)가 '틀렸다'는 단호한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교부들의 명성과 지혜에 주눅이 들 만도 한데 말이다. 교부들을 아주 높이 평가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칼뱅이 보기에 틀린 것은 틀린 것이었다(Gordon, 2018: 205-206).


칼뱅은 오직 '정당한 권위'만 인정했다. 그에게 성경은 권위이며, 모든 권위의 원천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위대한 교부였지만, 권위자가 아닌 권위(성경)의 '해설자'였다. 칼뱅이 보기에 교부들은 (성경 해석에서) 얼마든지 오류를 범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들의 오류를 과감하게 적발했다. 반면 (교부들과 달리) 바울은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은 '권위자'였다. 바울이 남긴 서신은 교부들의 글과 달리 판단의 대상이 아닌 판단의 근거로서 받아들여야 했다(Gordon, 2018: 206).


그렇다고 칼뱅이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했던 것은 아니다. 1세기에 살던 바울이 16세기를 사는 프랑스인이 될 수는 없었다. 개혁 시대 교회는 사도 시대 교회를 모범으로 삼을 수 있어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었다. 칼뱅은 단어와 조항들이 본래 정신을 흔드는 주객전도의 실수를 범하지 않았던 것이다. 칼뱅은 성경의 가르침들을 "본질을 유지하는 선에서" 역사와 문화적 차이에 따라 그 표현법이 다를 수 있다고 믿었다(Gordon, 2018: 211). (그런 면에서 조항 자체에 얽매였던 바리새인과 달랐다.) 그렇기에 성경의 가르침을 건강하게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선 현재와 과거 사이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역사적 차이를 예민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었다. 칼뱅은 관습이나 조항을 구태의연하게 기계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덮어놓고 믿지 않았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늘 생각함으로 그는 권위 자체에의 복종을 피하고 "생각하는 자유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발적인 종이 될 수 있었다.


불타는 증오심


한 가지는 분명하다. 칼뱅은 온유하거나 그리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까다롭고 공격적인 사람, 특히 자신이 적이라고 인식한 모든 자들을 무자비하게 비난했던 인물이었다. 칼뱅은 자신에게 대항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전면적인 승리를 추구했다. 용서하기보단 굴욕을 주었고, 굴욕감을 선사하고도 그들이 자신에게 항복하길 바랐다(Gordon, 2018: 270).


칼뱅이 남긴 글에서 눈살 찌푸려지는 부분이 있다면, 십중팔구 그의 넘치는 공격성과 증오심이 두드러질 때다. 평전 저자인 맥그래스는 적대자들을 욕하고 비방하는 수준이 갈수록 심해져 말년의 글들은 대체로 "아름답지 않다."라고 평가했다(McGrath, 2019:250). 특히, 반대자들의 주장만 비판하는 것이 아닌, 반대자들의 인격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칼뱅의 글을 읽노라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떤 사상이나 사람을 상대하든 상당한 자제력을 발휘했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와 대조적이다(McGrath, 2019:260-261). 칼뱅이 쓴 유일한 시라고 알려진 「승리의 노래(Epinicion)」를 감상하면 그가 얼마나 자신의 적들을 증오했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전쟁의 이미지를 차용해 그리스도께서 친히 복수하신다며 가톨릭 교회에 대한 증오를 무시무시하게 표현했다:


"그 목소리는 그리스도의 검이며 그 창은 그 입의 호흡이니. 한번 그 목소리가 발하면 적은 쓰러질 수 있다. 여기, 저기, 스무 해 이상, 이 검을 강한 변호자, 그가 손에 들고 휘두르고 살육하신다. 사탄, 군주, 교회를 강탈하는 군대의 교황, 달아났고 그들, 오늘까지 검의 공격이 지체되었다. 그러나 지금, 노련하고 재빠른, 그분은 싸우시고, 마침내 부상당한 자 낯선 상처로 신음한다. 이어 교황의 심복들 정신을 잃고 얼이 빠지며 그가 그들을 교수형시키니, 모인 자들 영혼까지 몸서리친다."


넘치는 증오심은 칼뱅 개인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그 증오가 쏘는 과녁이 비교적 분명하던 상황도 한몫했을 것이다. 칼뱅의 '분명한 대적'은 물론 로마 가톨릭 교회였다. 칼뱅은 가톨릭 교회의 모든 유형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대적자로 간주하고 증오했으며, 허락된 모든 시간을 이들과 싸우는 데 투사했다. 개신교 운동에 호의적이거나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온건한 개혁을 시도하려는 가톨릭교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칼뱅은 가톨릭교도라면 그 어떤 화해도 거부했다(Gordon, 2018: 201). 자신과 함께 개신교 대의에 헌신했던 동료가 가톨릭 교회의 주교가 되자, 칼뱅은 그를 '옛 친구'라고 부르며, 살인자, 사기꾼, 배신자라고 비난했고, 교회 고위직을 얻기 위해 '신앙을 팔아먹은 자'라고 정죄했다(Gordon, 2018: 158).


칼뱅은 어떤 종류의 비판에도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했고, 자신을 반대하거나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 혹은 지적으로 덜떨어졌기 때문이라 믿었다(Gordon, 2018: 175; 243). 종교개혁자라는 자신의 소명과 위치가 때론 그의 증오심을 증폭시키거나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 자신이 개인적으로 미워하는 사람이나, 자신의 뜻에 의문을 품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대적자'와 동일시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칼뱅은 그런 '대적자'의 의견뿐만 아니라 종종 의견을 주창한 사람의 인격까지 싸잡아 공격했다. 칼뱅은 자신을 모함하던 신학자 피에르 카롤리(Pierre Caroli)를 '지푸라기 같은 인간'이라 부르거나(Gordon, 2018: 152), 요하킴 베스트팔(Joachim Westphal)을 ‘짐승’이라고 묘사하는 등의 인신공격을 감행했다. 또한 개신교 신학자였지만 동시에 신앙의 관용을 주장하던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를 유독 심하게 공격했는데, 카스텔리오가 뛰어난 신학자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칼뱅은 그를 '경쟁자'로 인식했다. 칼뱅은 카스텔리오가 마치 이류 학자이듯 의도적으로 조롱하고 바보 취급 했으며, 자신의 신학에 카스텔리오가 의문을 품자 이를 자신에 대한 '반란'으로 해석했다. 실제로 칼뱅은 카스텔리오를 '도적,' '거짓말쟁이,' '반역자'라고 불렀다. 칼뱅은 그를 너무나 증오해서 (하나님의 검사인 자신이) 아무리 가열차게 비판해도 카스텔리오를 제거할 수 없다는 데서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Gordon, 2018: 415). 카스텔리오는 그런 칼뱅 때문에 제네바에서 사역하는 것이 어려웠고, 결국 제네바를 떠나 바젤에 정착했다. 이로 인해 바젤은 '반칼뱅주의'의 중심지가 된다(Gordon, 2018: 289-290). 결국 바젤의 반칼뱅주의는 칼뱅의 증오심이 낳은 산물이었던 것이다.


칼뱅의 동료들도 칼뱅의 공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칼뱅은 언젠가 "우리 동료들은[칼뱅과 함께 일한 목회자들은]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걸림돌입니다. 그들은 무례하고 교만하며 열정도 없고 학식도 부족합니다. 이 모든 것 중에 최악은 내가 그러기를 정말로 소망할 때조차 그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점에서 그들이 우리를 반대하고, 진정성 있고 믿음직한 인격을 거의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쓰면서 동료들의 능력이나 (자신에 대한) 충성심 결여 등을 오밀조밀 비판했다(Gordon, 2018: 244에서 재인용). 증오가 아닌 한탄이 섞인 비판이었겠지만 말이다. 심지어 그의 멘토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칼뱅은 마르틴 부처를 굽실거리는 데 능한 사람이고, 말 한 마디에도 혼란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곤 하는 유약한 인물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Gordon, 2018: 442).


게다가 칼뱅의 증오심은 강렬했을 뿐 아니라 길고 끈질겼다. 카롤리가 화해를 청했을 때 (칼뱅의 친구인) 파렐은 호탕하게 갈등의 종식을 선언하고 그를 받아들인 반면, 칼뱅은 자신에 대한 비난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지 않는 한 절대로 그와 악수하지 않겠다고 고집했다(Gordon, 2018: 176). 1541년, 칼뱅이 3년 만에 제네바에 화려하게 귀환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절대로 3년 전에 제네바에서 쫓겨나던 때를, 정확히 말하면 그 굴욕감을 잊지 않았다. 칼뱅은 당시 자신의 망명에 책임이 있던 자들을 용서하지도, 잊지도 않았다(Gordon, 2018: 234).


지금까지 봤듯, 칼뱅의 지나친 공격성과 넘치는 증오심은 칼뱅의 가장 큰 단점이자 약점이었다. 때론 모두의 앞에서 이성을 잃고 격렬하게 분노하기도 했고, 자신의 평판과 명성에 집착한 나머지 경쟁자를 너무도 쉽게 '적'으로 몰아세웠다. 그가 보인 증오심엔 품격도, 그리스도인다운 면모도 없었다. 때론 자신이 죄를 저질렀음을 인정하긴 했지만 말이다(Gordon, 2018: 177). 그의 전기를 집필한 고든과 맥그래스 모두 이 점이 ‘인간 칼뱅’의 가장 연약한 면이라고 입을 모아 인정했다.


칼뱅은 삐뚤어진 천재였다. 그리고 '그렇기에' 성숙한 교회 지도자로 거듭나기 위해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의 자존심이나 명성보다(혹은 똑똑함을 드러내는 것보다), '교회의 잘 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머리뿐 아니라 마음에까지 새겨줄 동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보통은 칼뱅의 멘토였던 부처가 그런 역할을 맡았다. 부처는 칼뱅보다 지적으론 열등했을지 몰라도 훨씬 부드러운 사람이었고, 교회를 건설하는 과정엔 바른 교리 못지않게 유연성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부처의 눈에 칼뱅은 두뇌만 극단적으로 발달한 외골수였다. 칼뱅이 길게 분노할 때면, 부처는 칼뱅을 좋은 말로 달래어 다시 동료들에게 데려가 화해시키곤 했다(Gordon, 2018: 177-178).


반면 칼뱅을 호되게 나무란 사람도 있었다. 칼뱅보다 한 세대 앞선 종교개혁자 지몬 그리나이우스(Simon Grynaeus)였다. 그는 칼뱅의 사람됨을 정확히 꿰뚫어봤다. 칼뱅의 지적 능력은 분명 엄청났다. 그리나이우스가 머물던 베른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 심지어 파렐보다 칼뱅이 지적으로 뛰어났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교회가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칼뱅의 평판보다 교회를 세우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리나이우스는 칼뱅의 오만함을 나무랐고, 그의 지적 능력이 오만과 속물근성으로 사악해졌다고 일갈했다(Gordon, 2018: 156).


부처와 그리나이우스의 우려대로, 칼뱅은 타협을 모르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외골수에, 적에 대한 증오심이 필요 이상으로 넘쳤다. 이로 인해 당대에도 비난을 받았고, 지금까지 비난을 받아왔다. 대부분 정당한 비난이다. 그렇지만 칼뱅이 속했던 시대, 그가 처했던 상황을 고려하면 그의 성품을 조금은 참작해줄 수 있다. 행동하고 선택하는 것은 개인이지만, 그 상황을 설정하는 것은 그가 속한 시대 환경이니까.


일단 분명한 것부터 짚고 넘어가자. 종교개혁의 길은 숭고했지만 결고 쉽지 않은 투쟁이었다. 아니, 구교가 장악한 유럽에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일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어려운 투쟁이었다. 종교개혁은 언제라도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들이 줄지어 등장했고, 말그대로 '산 넘어 산'이었으며, 개혁의 추진력은 내우외환으로 쉽게 곤두박질쳤다.


종교개혁가들은 자주 승산 없는 싸움을 치러야 했다. 가톨릭 교회는 격렬하게 저항했고, 적대적인 세속 정치인들은 새로운 교회를 가혹하게 박해했다. 개신교에 가담한 제후들은 미지근했다. 오히려 전형적인 "정치가"였고, 타협적인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개신교 세력(슈말칼덴 동맹)은 전쟁에서도 패배했다. 그것도 가톨릭교의 수호자인 신성로마제국 앞에. 개신교의 이름을 걸고 등장한 재세례파는 뮌스터시를 장악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흡사 공산주의 운동을 개진했다. 그러다 절멸을 당해, 종교개혁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 온건한 개신교 교회 또한 결코 통일된 집단이 아니었다. 교파별로(루터파, 츠빙글리파, 칼뱅파, 성공회 등), 지역별로(비텐베르크, 취리히, 베른, 바젤, 제네바, 스트라스부르, 메츠, 런던 등) 극심하게 분열되어 있었으며, 상호 간엔 교리적 논쟁뿐 아니라 인간적인 시기와 질투도 넘쳤다. 종교개혁가들이 열심히 설교하고 설득하려던 평신도들은 대부분 신앙 문제에 진지하지 않았다. 구교든 신교든, 좋은 것이 좋은 것이었다.


칼뱅이 떠맡은 과업의 무게와 그 과업이 실제로 얼마나 위험천만했는지 온전히 이해할 때, 그때야 비로소 칼뱅의 분노와 증오심을 입체적으로 판단할 수있고, 또 보다 성숙하게 비판할 수 있다. 그가 타협하지 않음은 자신이 지키려던 것이 그만큼 숭고했고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조금의 타협이 종국엔 패망의 첫 단추가 될 수 있었다. 그가 까다롭고 예민하게 행동함은 그만큼 영적 분별력이 중요하던 시기였기에, 그가 거칠게 증오함은 대적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개혁을 뿌리뽑으려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칼뱅과 알고 지냈던 수많은 사람들이 공개 재판을 받고 불에 타 죽었다. 희망을 걸었던 지역(영국)엔 반동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그런 시대를 살던 칼뱅이 보기에 적에 대한 관용과 자비와 인내는, "악에게" 베푸는 관용과 자비와 인내로 보였을 것이다. 칼뱅은 하나님의 뜻이 좌절될 위험이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엔 어떤 타협도, 그 어떤 양보도 거부했다(McGrath, 2019:48). 묵묵히 방주(교회)를 만들고 어떻게 해서든 그 방주(교회)를 지키는 노아와 같은 삶이 칼뱅의 삶이었다. 그의 공격성, 그의 냉정함, 그의 고지식함, 그의 까다로움은 부분적으론 시대의 산물이자 의무를 이행하는 중에 만들어진 의도치 않은 성품(혹은 모습)이었다.


겸손하고 서툰 사람


칼뱅은 16세기 최고의 지성인이었고, 그가 만난 어떤 사람보다 지적으로 우월했다. 하지만 칼뱅이 믿었던 성경은 겸손을 말하고, 교만을 그 어떤 죄악보다 죄악시한다. 그렇다면 그처럼 우월한 자도 겸손할 수 있는 것일까? "(...) 다른 사람들보다 정말로 뛰어난 사람이, 자신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칼뱅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우리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바른 평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고 답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뛰어난 재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자기만족에 빠지거나 자화자찬하거나, 혹은 자기를 경외하라고 그 재능들이 주어진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그 대신, 그가 자신의 잘못을 교정하고 감찰하면 그는 겸손을 위한 위대한 재료를 얻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있는 탁월함을 보고 그것이 무엇이든 존중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잘못도 사랑 안에서 잊어버릴 것이다. 이 법칙을 체득한다면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은 설령 자신이 더 뛰어남을 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을 계속해서 더 존중할 수 있다(Gordon, 2018: 212에서 재인용)." 자신의 모든 능력은 결국 '받은 것'이고, 자신이 가장 멸시하는 사람에게 주어졌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이것이 천재도 겸손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칼뱅은 이렇게 겸손할 수 있는 방법을 '머리로' 찾아냈다.


분명 맞는 말이다. 하지만 칼뱅이 이것 때문에 "겸손"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은 칼뱅이 대단히 "겸손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McGrath, 2019:45). (증오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교만한 것은 아니니까.) 나는 그가 "교만한 행동을 하던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인간의 기준에서.


칼뱅은 다윗을 생각하면서 "그의 믿음, 인내, 열정, 열의, 성실의 본을 읽을 때, 그에게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나를 보며 헤아릴 수 없는 신음과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라고 썼다(Gordon, 2018: 34에서 재인용). 교회의 개혁자로서, 큰 과업을 맡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엔 비참할 정도로 부족하다는 절망이었다. 우리 눈에 참 큰 그조차, 자신이 한없이 작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나는 이런 칼뱅의 모습이 '진짜 칼뱅'이었다고 생각한다.


칼뱅은 자신의 우월함을 잘 알았음에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극도로 꺼렸다. 침묵이 수다보다 편했던 것도 이유였겠지만, 그보단 다분히 의도한 것이었다. 칼뱅은 의도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McGrath, 2019: 48). 특히 칼뱅은 자신이 남긴 글에서 스스로를 숨겼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거나 직접 경험한 일들을 통해 구절을 풀이하기보단, 그저 하나님의 목소리를 대변하길 원했다. 그리하여 칼뱅은 신자가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했다. 가뭄에 콩 나듯 개인적인 이야기를 삽입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칼뱅의 이야기에서 능동의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이셨다. 칼뱅은 늘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자신은 이끄시는 길로 걸었을 뿐이라는 암시다(McGrath, 2019: 137).


세간의 편견과 다르게 칼뱅은 독재자가 아니었다. 칼뱅의 귀환부터 사망까지, 제네바에서 신앙적인 이유로 사형이 집행된 사례는 단 한 번뿐이다(세르베투스 사건). 칼뱅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단 한 건의 일로 칼뱅을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에 사이코패스로 묘사하지만, 그 사건에서조차 칼뱅은 주변인에 불과했다(McGrath, 2019: 196). 칼뱅은 제네바 정치계를 통제하거나 지배하는 일은 고사하고, 어떤 형태의 공포 정치도 펼칠만한 자리에 오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교회에서 출교당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출교, 추방, 파문, 파면 등이 흔했던 시대였음에도 말이다. 칼뱅이 제정한 시벌의 의도는 처벌 자체가 아닌 '공동체와의 화해'였다. 쉽게 말해, 교회에서 내쫓는 이유는 그가 (마음을) 돌이켜 (물리적으로) 돌아오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죄인의 성찬 참여를 금지했던 것도 죄인의 참회를 기대하는 조치였다(Gordon, 2018: 250).


칼뱅은 제네바에서 죽을 때까지 달랑 침실, 거실, 서재 정도가 딸린 한 귀족의 집에 얹혀살았다(Gordon, 2018: 267). 또 장차 죽어서 묻힐 곳을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았고, 기념비나 데스마스크도 만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오늘날 칼뱅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은 그가 그러길 원했기 때문이다. 칼뱅은 자신의 명성을 잘 알았고, (루터와 츠빙글리의 추종자들이 그러했듯) 자신의 추종자들이 어떤 형태로든 참배하는 것을, 자신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몸서리치게 두려워했다(Gordon, 2018: 19; 521; 589).


실제로 칼뱅은 사적으론 수줍고, 서툴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대인 관계에서 서툴렀기 때문에 흔한 잡담이나 평범한 대화에도 잘 끼지 못했다(Gordon, 2018: 167). 종교개혁자라는 소명을 깨닫는 순간에조차 "타고난 수줍음과 소심함 때문에" 일선에 나서는 어떤 직무도 맡지 않으려 했다(Gordon, 2018: 136에서 재인용).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 편이 늘 편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성격 덕분에 목회자 평판에 치명적일 수 있는 불필요한 오해나 추문을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외향적이고 호쾌한 인물이었던 파렐과 대조적이다. 파렐은 말년에 쉰 살이나 어린 여자와 결혼하여 추문을 일으켰다(Gordon, 2018: 500-501).)


독재자라는 이미지와 다르게 칼뱅은 약자를 돕는 일에 헌신적이었다. 제네바에 쏟아져 들어오는 개신교 난민들을 위해 쉬지 않고 일했고, 과부와 아이들의 복리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일례로, 1542년에 제네바에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시의회가 전염병 희생자들을 돌볼 목사를 지원받았는데, 죽음이 거의 확실한 일이었음에도 칼뱅은 기꺼이 이 사역에 지원했다. 많은 다른 목회자들이 병원에서조차 사역하길 꺼려 했을 때 말이다(Gordon, 2018: 235; 246; 270). (칼뱅의 자원은 시의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인간관계에 서툴렀다고 해서 관계가 주는 기쁨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친밀한 이들에게 칼뱅은 자애로운 (물론 엄격한) 아버지였다. 실제로 칼뱅은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고, 아내와 어린 아들이 죽었을 때 심히 고통스러워했다. 자신에게 굴욕과 수치심을 안긴 자들을 결코 잊지 않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도 잊지 않았다. 그가 쓴 「데살로니가 전서」 주석을 유년 시절 은사에게 애정을 담아 헌정하기도 했다.


앞서 봤듯, 칼뱅은 자신의 뜻대로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며 "겸손의 합리적인 근거"를 찾았다. 능력을 주시는 분은 결국 하나님이시니, 제아무리 빼어난 천재도 교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참 합리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칼뱅을 겸손하게 만든 것은 그런 합리의 영역이 아니었다고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겸손할 타당한 근거를 찾았다고 해서, 겸손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교만한 모습과 겸손한 모습이 공존했던 칼뱅의 모순을 푸는 해법은 그의 '높은 기준'에 있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칼뱅은 성경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었고, 성경에 비추어 스스로를 바라볼 때 자신이 얼마나 열등한 존재인지 깨닫고 필히 좌절했을 것이다. 칼뱅은 다윗이나 바울과 비교하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꼈다(Gordon, 2018: 34).


하지만 동시에 그런 높은 기준으로 남을 평가하면 어떻게 될까? 그런 높은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은 (당연히) 거의 없었을 것이고, 칼뱅은 수준 미달인 사람들을 보며 격하게 나무랐을 것이다. 불가능할 정도로 까다로운 기준을 들이대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그런 칼뱅을 보며 그의 높은 기준이 아닌 그의 태도를 문제삼으며 그를 교만한 설교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칼뱅은 자신의(성경의) 높은 잣대로 청중을 꾸짖고, 훈계하고, 정죄했는데, 1540년대 많은 제네바 사람들이 칼뱅의 설교를 싫어했다는 방대한 증거가 있다(Gordon, 2018: 259).


하지만 그런 칼뱅도 자신 또한 기준 미달임을 잘 알았을 것이다. 바울이 자신을 괴수 중의 괴수라 자평했던 것처럼(딤전 1:15), 칼뱅도 자신을 허영심 많고 증오심 많은 "괴수"로 보면서 좌절했을 것이다. 칼뱅은 성경의 높은 잣대로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책망했다. 아마도 자신을 더 많이 책망했을 것이다. 칼뱅처럼 자의식 넘치는 사람이 으레 그러하니까. 하지만 칼뱅의 자기성찰은 십중팔구 은밀하게, 하나님 앞에서 행해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제네바 교인들은 칼뱅의 낮은 모습을, 그의 겸손함을 알 턱이 없었으리라.


남편으로서의 칼뱅


낭만적인 연애와 무뚝뚝한 칼뱅은 조금도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칼뱅 본인도 자신을 매력적인 연인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Gordon, 2018: 171). (칼뱅의 모든 자기 평가 중에 가장 쉽고 신속하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그런 칼뱅이라면 '평생 독신으로 살지 않았을까'라고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칼뱅은 루터처럼 성직자의 결혼에 찬성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다짐하지도 않았다.


칼뱅은 배우자, 그리고 결혼 자체에 대해서도 '높은 기준'이 있었다. 그의 기준에 부합하는 '현숙한 아내'란, 정숙하고, 친절하고, 까다롭지 않고, 경제관념 있고, 인내심 있고, 남편의 건강을 잘 챙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면에서 칼뱅의 기준은 성경적이었다. 지참금 딸린 부유한 여성이나 관능적인 사랑엔 관심이 없었다. 현대인들에겐 당연한 '연애결혼'을 바라지도 않았다. 단지 '성경적인 결혼 생활'을 위한 배우자를 원했을 뿐이다. 그러던 중 1540년 여름, 스트라스부르에서 이들레트 드 뷔르(Idelette de Bure)라는 과부와 사랑에 빠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와 결혼했다.


아마도 칼뱅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아내에게 경건한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을 것이다. 남편의 가부장적 통제권에 순종적인 그런 아내. 그러나 실제론 아내를 매우 아꼈다. 서로 떨어져 있을 땐 이들레트를 밤낮으로 생각했다(Gordon, 2018: 172-173). 아내를 잃었을 때 (그 답지 않게) 자신의 슬픔을 솔직하게 드러냈던 것을 보면, 그가 돌 같고 차가운 인간이라는 평판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Gordon, 2018: 82). 겉으로 괴팍한 사람이 보통 그러하듯, 칼뱅도 자신의 아내에게만큼은 순한 사람이었다.


충성을 요구하는 우정


그렇다면 우정은 어땠을까? 칼뱅은 좋은 친구였을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칼뱅에게 '지지자'는 많았지만, 친구는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McGrath, 2019:198). 칼뱅이 느끼기에 우정을 시작하고 유지하는 일은 신학 토론이나 주석을 쓰는 일보다 더 고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부터 사귀기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칼뱅은 주변에 있는 그 누구보다 자신이 지적으로 뛰어나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고(Gordon, 2018: 78), 그렇기에 사람들의 오류나 무지는 용납할 수 있었지만, 자신에 대한 '반대'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피에르 비레(Pierre Viret)와 파렐은 모두 뛰어난 신학자였고 칼뱅의 친구이자 동료 사역자였지만, 칼뱅은 이들의 의무가 ‘자신의 대리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칼뱅의 친구가 된다는 것, 그것은 칼뱅이라는 위대한 신학자를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는 뜻이었다(Gordon, 2018: 277). 파렐이 평생 칼뱅의 친구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보다 칼뱅이 탁월한 사람이라는 것을 기꺼이 인정했기 때문이다(Gordon, 2018: 282). 칼뱅이 자신과 친밀한 자들에게 요구했던 것은 따스한 공감이나 사사로운 위로가 아니라, '완전한 충성'이었다.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이들의 삶을 통제하는 것이 칼뱅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우정이었다(Gordon, 2018: 292).


칼뱅은 관계가 지속되는 내내 친구들을 위협하고, 괴롭히고, 때론 굴욕을 주기도 했다. 그의 시퍼런 비난을 피할 수 있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칼뱅은 전반적으로 (자신에게 "충성하는") 친구들에게 한없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남의 충절을 요구만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도 신의를 굳세게 지켰다. 특히 관계에 있어 결심이 서면, 좋든 나쁘든 그 사람과 운명을 같이 했다. 실제로 칼뱅의 친구들은 칼뱅이 죽어갈 때 그의 곁에서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슬퍼했다(Gordon, 2018: 15; 290). 칼뱅이 친구들에게 정말 한없이 가혹하기만 했다면 홀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영웅에 대한 동경심: 바울과 루터


인간관계가 협소했던 칼뱅에게 가장 편했던 관계는 어쩌면 '영웅-팬 관계'였을 것이다. 칼뱅 특유의 높은 기준 덕분에 사람들에게 큰 기대감이 없었지만, 그 기준에 부합하는 극소수의 "영웅들"에겐 무한한 애정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런 영웅들은 보통 시공간적으로 칼뱅과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글을 통해 만난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일종의 환상을 갖고 그들을 영웅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칼뱅이 가장 동경했던 인물이자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던 인물은 바울이었다. 칼뱅은 누구든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그 한계도 알고 있었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기에 예수님을 직접적인 롤모델로 삼기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반면 바울은 '사람'이었다. 칼뱅이 보기에 바울은 (자신의 높은 기준에 부합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람이 본받을 수 있는 훌륭한 모범이었다(Gordon, 2018: 209-210). 칼뱅은 사역 중 이따금씩 바울과 자신을 동일시했을 만큼 바울을 흠모했다.


칼뱅이 흠모했던 또 한 명의 영웅은 마르틴 루터였다. 루터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음에도, 또 루터를 지지하는 일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었음에도, 칼뱅은 '종교개혁 운동의 아버지'로서 끝까지 루터를 동경했다. 칼뱅에게 루터는 '참된 교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였다. 루터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빛 그 자체였다(Gordon, 2018: 299). 언젠가 루터가 칼뱅이 쓴 글을 읽고 칼뱅에게 안부를 묻자 칼뱅은 "감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로 돌로 만들어진 인간일 겁니다. 정말 감격스러워요!"라고 아이처럼 외칠 정도였다(Gordon, 2018: 192). 루터는 바울과 달리 '살아있는 영웅'이었던 것이다.


칼뱅은 루터가 죽은 후에도 루터를 모함하는 자들로부터 그의 평판을 지키고자 했다. 칼뱅은 특히 루터에 적대적이었던 츠빙글리파 개신교도들에게 루터의 위대함을 인식하라고 조언했다. "저는 루터가 얼마나 저명한 분인지, 얼마나 탁월한 은사를 가진 사람인지, 얼마나 지성과 결연한 지조가 있는 분인지,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지닌 분인지, 얼마나 대단한 효율성과 교리적 진술의 능력으로 힘을 다해 적그리스도의 통치를 뒤집고, 동시에 구원의 교리를 멀고도 넓게 퍼뜨렸는지 먼저 생각해 보시기를 진심으로 간청합니다. 설령 그가 저를 악마라 부른다 하더라도, 저는 여전히 그런 존경을 담아 그분을 하나님의 뛰어난 종으로 인정할 것이라고 자주 선언했습니다(Gordon, 2018: 307에서 재인용)."


세상을 즐긴 사람


칼뱅이 인생의 모든 쾌락을 거부하는 금욕주의자에 무표정한 독재자라는 이미지는 후대에 그를 미워했던 사람들이 날조해낸 모습이다(Gordon, 2018: 271-272). 사실은 전혀 달랐다. 칼뱅은 세상의 것들이 단지 생존을 위해서만이 아닌 '누리고 즐기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다. 좋은 음료, 좋은 음식, 친구와의 우정, 아이들이 주는 기쁨, 행복한 결혼 관계는 하나님이 이 땅 위에 허락하신 선물이었다. 칼뱅은 특히 와인을 좋아했는데, 그런 맛 좋은 와인이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만물의 창조주를 찬미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눈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을 순간의 쾌락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난 것으로 여기고 기쁜 마음으로 누릴 줄 알아야 했다(Gordon, 2018: 272).


칼뱅은 특별히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했다. 그의 직업과 평판을 고려하면 전혀 놀랍지 않은 취미였지만, 그럼에도 칼뱅은 책을 수집하고 다양한 독서에서 오는 지적 만족감을 즐겼다. 칼뱅이 소유하던 개인 장서는 그 수가 점점 늘어나 아카데미에 따로 소장되어야 했다(Gordon, 2018: 273).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다. 글을 쓰는 것은 사역의 일부분이었지만, 우아하고 아름답게 작문하는 일을 즐겼다. 때론 독자에게 자신의 작문 실력을 보여주려는 듯 대조법이나 비유법으로 가득한 길고 복잡한 문장을 쓰기도 했지만, 칼뱅에게 아름다운 글이란 '논리의 미'가 충만한 글을 말했다. 즉, 앞뒤가 맞고, 기승전결이 깔끔하고 간결한 '명징한' 글. 칼뱅은 이런 글을 직조해 내는 모든 과정을 사랑했다. 그런 면에서 글쓰기란 칼뱅에게 지적 작업이었을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선 '미적 작업'이었다. 칼뱅은 평소에도 언어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가장 큰 은사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Gordon, 2018: 273-274).


다른 인물과의 비교: 니체와 레닌


장 칼뱅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사상과 가치관 면에선 이렇게 정반대의 두 인물이 있는가 싶다. 칼뱅은 작열하는 자아를 하나님을 위해 온 생애를 쏟았다. 반면 니체의 삶은 '신으로 태어나기 위해 광인이 되는 과정'이었다. 니체는 자신이 직접 하나님이 되어 모든 가치를 재평가하길 원했다(Prideaux, 2020: 62). 칼뱅은 기독교 신앙을 믿었지만, 니체는 어려서부터 그 믿음을 잃었고, 그 믿음을 대체할 수단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Prideaux, 2020: 371). 칼뱅은 절대 진리의 존재를 믿었고, 절대 진리(성경)에 충실한 가치체계를 명료하고 단단하게 구축했다. 하지만 니체는 "나는 체계를 세우는 사람을 믿지 않고 피한다."라고 말하며 모든 사상적 체계를 거부했다. 그에게 유일한 진리는 '진리라는 것은 없다'는 진리였다(Prideaux, 2020: 436; 511). 칼뱅은 바울을 동경했지만, 니체는 바울을 혐오했다(Prideaux, 2020: 552). 무엇보다 칼뱅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였지만, 니체는 자신을 카이사르, 디오니소스, 그리고 "적그리스도"라 불렀으며,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라는 책에선 자신을 그리스도와 버금가는 존재로 설정했다(Prideaux, 2020: 528).


하지만 나는 칼뱅과 니체가 서로 닮았다고 생각한다. 생각의 내용물은 극과 극으로 달랐지만, 그 생각을 직조하고 표현하는 방법이나 삶의 스타일에서 칼뱅과 니체는 닮았다. 칼뱅과 니체 모두 천재였지만, 어딘가 뾰족한 괴팍한 천재였다. 둘 모두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한 현상들에서 그 모든 것을 꿰뚫는 단 하나의 정수를 찾아내는 통찰력이 있었다. (칼뱅은 하나님의 은혜를, 니체는 허무의 도래를 찾았다.) 두 천재 모두 침울해 보였고, 내성적이었고, 까다로웠고,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었다. 세계의 역사를 움직이는 힘을 느끼면서도, 사람의 적극적인 의지를 강조했고, 무기력을 무엇보다 혐오했다. 칼뱅과 니체 모두 야심만만했고, 명성에 집착했으며, 반대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둘 모두 자신을 일종의 '예언자'라고 생각했다.


칼뱅은 체계적이고 명료하게, 니체는 보통 시적으로 글을 썼지만, 둘 모두 작문에 탁월했다. '언어 지능'이 월등했다. 사람과의 관계에도 둘 모두 서툴렀다. 친한 친구들과도 사소한 말다툼이나 생각의 차이로 금방 멀어졌고(칼뱅의 경우 비레, 니체의 경우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는 이들만 편하게 생각했다. 특히 위선자, 타협자, 자신이 믿는 바에 당당하지 못한 유약한 인물을 경멸했다. 그런 동시에 사랑하는 여인에겐 순애보 같았다(니체의 경우 루 살로메(Lou Salomé)). 생애 '사랑'이 그다지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도 비슷하다. 게다가 둘 모두 '적'이 분명했고, 자신이 대적해야 할 사상이 뚜렷했다(칼뱅의 경우 가톨릭 교회, 니체의 경우 허무주의와 기독교 문화). 그리고 그 적을 아주 효과적으로 파괴했다. 칼뱅과 니체 모두 무시무시한 천재였다.


니체보단 덜하지만, 칼뱅과 닮은 또 한 명의 인물은 다름 아닌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었다. 니체와 마찬가지로 칼뱅과 레닌은 사상적으론 극과 극을 달리지만, 성격이나 삶의 스타일 면에선 서로 닮은 부분이 많다. (레닌과 니체의 사상도 극과 극이다.)


칼뱅과 레닌 모두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 존재하며, 자신은 그런 거대한 힘을 대리하는 예언자라고 인식했다(칼뱅의 경우 하나님의 섭리, 레닌의 경우 역사의 발전).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의지와 행동을 강조했다는 면에서 닮았다. 칼뱅이 조금 더 내성적으로 보이지만, 칼뱅과 레닌 모두 사상의 지도자로서 일선에서 혁명을 이끌었다(칼뱅의 경우 종교개혁, 레닌의 경우 사회주의 혁명). 게다가 추상적이고 방대한 이론을 체계화하는 천재성 면에서 칼뱅과 레닌은 서로 닮았다. 둘 모두 자신들이 지도하는 혁명 운동을 조직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했으며, 궁극적으론 성공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칼뱅과 레닌 모두 '혁명적 사상을 전파하는 조직'이 자신들의 싸움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 잘 알았고, 필요한 기구를 설립할 수 있었다. 칼뱅은 제네바 목회직을 개혁신앙에 맞게 조직하고 목회자를 양성하여 개혁신앙을 전파했으며, 레닌은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수많은 내외부 조직들을 설계했다(McGrath, 2019:41; 205; 232; 265).


총평


칼뱅은 니체와 레닌과 닮았고, (내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다만) 나와도 닮았다. 칼뱅처럼 나도 현실 세계보단 이론 세계가 편하다. 덕분에 나 또한 현실감각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또 공부는 쉽지만, 인간관계는 어렵다. 괴팍한 면도 있다. (칼뱅에 비해 많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만큼 소명 의식이 적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칼뱅만큼 독단적이거나 증오심을 표출하진 않아도, 내 안에 독단성과 증오심이 가득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의식과 자기애가 강한 것, 그리고 높은 기준에 따른 우월감과 열등감이 공존하는 것도 비슷하다. 영웅을 동경하는 것도 닮았다. 그가 나의 영웅 중 한 사람이긴 하지만. 칼뱅처럼 나도 앉아서 일하는 것이 편한 deskbound형 인간이고, 칼뱅처럼 나도 시간에 쫓기는 편이다. 항상 급하다. 칼뱅처럼 나도 와인을 좋아하고, 독서와 책 수집과 글쓰기를 즐긴다. 수집한 책들이 점점 많아지자 아카데미에 장서를 넘겼던 칼뱅처럼, 나도 한때 책장을 가득 채웠던 책들을 교회 청년부실에 기증한 적이 있다. 칼뱅은 평생 단순하고 깔끔한 옷차림을 선호했는데, 나도 검은색, 회색, 흰색의 단정한 옷만 입는 편이다. 때론 칼뱅처럼 수염을 기르기도 하고!


칼뱅도 사람이었다. 이런 말로 총평하고 싶진 않지만, 칼뱅도 사람이었다는 말로 끝내려 한다. 이보다 종합적이고 진실에 가까운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 결국 칼뱅은 (그를 미워하는 사람이 주장하는) 사이코패스도, (그를 동경하는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성인군자도 아니었다. 신적 소명과 인간적 연약함, 위대함과 저열함, 자기 확신과 자기 회의가 모두 공존하는 사람이었다. 관계에서 기쁨을 찾고, 사라진 관계에 슬픔을 느끼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칼뱅과 닮았다.


참고문헌


칼뱅 관련

Gordon, Bruce. "Calvin." 이재근 옮김. 『칼뱅』. (서울: IVP, 2018).

McGrath, Alister. "A Life of John Calvin: A Study in the Shaping of Western Culture." 이은진 옮김. 『장 칼뱅의 생애와 사상』. (파주: 비아토르, 2019).

McPherson, Joyce. "The River of Grace: A Story of John Calvin." 임금선 옮김. 『칼빈 이야기』. (서울: 코리아닷컴, 2009).


기타

16Personalities. "Friedrich Nietzsche: The Architect (INTJ)." 16Personalities. (Accessed on 19 February 2025). www.16personalities.com/articles/friedrich-nietzsche-the-architect-intj.

Prideaux, Sue. "I Am a Dynamite: A Life of Nietzsche." 박선영 옮김. 『니체의 삶』. (서울: 로크미디어, 2020).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서울: 생각의길, 2013).

노명식. 『자유주의의 역사』. (서울: 책과함께,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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