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ritique of Theory of Orientalism
‘오리엔탈리즘’보다 사용하기 멋들어지는 시사 용어가 또 있을까. 자신의 교양을 젠체하길 좋아하는 자칭 교양인들과 이른바 “지식 소매상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비판적으로) 남용하는 단어가 바로 오리엔탈리즘이다. 하지만 관능적인 어감을 주는 단어들이 으레 그러하듯, 해당 용어 혹은 ‘이론’을 바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상당히 드문 것 같다. 이론의 원서를 한 번이라도 펼쳐보거나, 완독한 사람은 더욱 드문 것 같고.
오리엔트, 오리엔탈리스트, 오리엔탈리즘 같은 용어들의 어원은 이론 자체의 역사보다 훨씬 유구하지만, 우리가 시사 용어로서 접하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학자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1935-2003년)가 자신의 저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1978)』에서 집대성하고, 『문화와 제국주의(Culture and Imperialism, 1993)』에서 확장시킨 ‘오리엔탈리즘 이론’이다. 이론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을 극도로 응축해 말하면 “서양의 동양관”이라 할 수 있다(Said, 1991: 40). 즉, 오리엔탈리즘은 서양(Occident)이 동양(Orient)을 인식하고 사고하는 ‘일관되고 체계적인 방식’을 의미한다.
사이드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서양의 동양관’을 연구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에드워드’라는 영어 이름과 ‘사이드’라는 아랍어 성에서 알 수 있듯, 에드워드 사이드는 영국령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이집트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미국에서 수학한, 서방과 동방 양쪽에 걸친 인물이었다. 그는 유년 시절에 자신이 ‘직접 경험한 동양’과 후에 미국에서 살고 공부하면서 접한 각종 문헌과 예술 작품이 묘사한 ‘재현된 동양’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재현된 동양은 진짜 동양과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동양에 대한 수많은 잘못된 묘사들이 마치 ‘서로를 인용하듯’ 대단히 유사했다는 것이다. 음모가 가득한 중동의 궁전들, 퇴폐적인 술탄의 하렘, 관능적인 아라비아의 여인들, 호전적인 페르시아인들, 온종일 노곤하게 물담배나 피우던 튀르크인들, 음흉하고 믿을 수 없는 인도인들. 서양인들은 ‘중동은 이렇고, 페르시아는 저렇다’라고 쓰거나 이집트의 풍경을 스케치하고 묘사하면서 자신이 실제 동양을 취급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상 그들이 ‘안다’고 주장하는 동양은 현실 속의 사람이나 문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체계적으로 부정확한’ 정보와 ‘체계적으로 왜곡된’ 편견을 통해 투사된 ‘허상’일뿐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동양의 전문가들이라 할 수 있는 동양학자들(orientalist)까지 이런 ‘가짜 동양’을 주조하고, 전달하고,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최고의 지성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사이드는 단테부터 마르크스까지, 심지어 자신의 영웅들인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과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까지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에 물들었다고 싸잡아 비난했다(Mishra, 2021).
(이론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은 이렇게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왜곡된 서양의 동양관’을 의미한다. 동양에 대한 담론은 서양인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일정한 레퍼토리를 따라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논의되고, 재구성되고, 서술되고, 그려지고, 재현되고, 소비된다. 사이드는 방대한 문헌학 연구를 통해, 동양에 대한 서양의 묘사는 실재하는 동양과 거리가 멀고, ‘반역사적’이라고 지적했다(Said, 1991: 50). 한 걸음 더 나아가선, 동양은 단순히 ‘그곳(there)’이라는 식으로 불릴 수 있는 장소가 아니며, 지리적 실체 혹은 문화적 실체로서 ‘동양’이나 ‘서양’이라는 구분은 인위적인 구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Said, 1991: 19).
하지만 오리엔탈리즘 논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이드는 서구 학계가 동양을 신비화·여성화·감각화·열등화함으로써 부정적 편견을 하나의 진리처럼 포장해서 유포하고 있으며, 이것이 서구 학계에서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행해져 왔다고 주장했다(Kennedy, 2011: 18-19). 오리엔탈리즘 문제는 왜곡된 정보나 편견 혹은 자의적인 구분법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동양은 본질적으로 이렇고, 태생적으로 저렇다’라는 식의 지식적 레퍼토리가 실은 서양이 동양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위압하기 위한 문화적 제국주의의 일환이라고 사이드는 외친다(Said, 1991: 15-16; 69; 120). 그는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초연하고 무정치적인 인문학으로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식민주의 실천이라는 몹시 추한 역사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Said, 1995: 100).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의 인식론적 주장은 곧 ‘사람이 지식을 얻고 생산하는 방식은 결코 중립적이거나 무흠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식의 습득과 생산은 때론 특정 집단의 의도나 이해를 반영하는데,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 이론을 통해 고발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사이드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고찰한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의 영향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Said, 1991: 51; Kennedy, 2011: 39; 80; 이영석, 2020: 370). 미셸 푸코는 지식이 단순히 진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관계 속에서 생산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권력은 지식을 통해 사람들을 통제하고 규율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사이드는 푸코의 권력-지식 모델을 차용해 그것을 ‘서양의 동양관(동양에 대한 지식)’에 적용한 것이다. 사이드에 따르면, 서양의 학계는 권력과 제휴 혹은 공모하여 서양의 동양 지배를 재가하고 공모해왔다(Said et al, 1982; Kennedy, 2011: 62).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이쪽엔 서양을 저쪽엔 동양을 병치한다. 그러곤 동양은 ‘이국적이고, 유약하고, 관능적이고, 여성적이고, 감정적이고, 믿을 수 없고, 미개한 정체된 곳이다’라는 레퍼토리를 통해 “열등의 이미지”를 생산한다. 이런 이미지들은 개인이나 시대적 특징이 아닌, 무감각한 도식화에 의해 ‘영구불변한 속성’으로 간주된다(Said, 1985: 92; 1991: 169; 174; 180). 반면 서양은 그런 동양을 타자로 인식함으로써, 자신을 동양과 대조되는 ‘강인하고, 점잖고, 남성적이고, 이성적이고, 산업화되고, 근대화된 진보한 곳’으로 바라보고 “우월의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Said, 1991: 73; 75-76). 동양은 나약하고 정체된 곳이다. 서양은 동양이 아니다. 따라서 서양은 강인하고 진보적이고 우월하다.
이렇게 서양에 의해 ‘타자화된 동양’은 살아있는 주체로서 서양과 평등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전상의 텍스트나, 도감 속 설명이나, 고고학의 기념비나, 연구의 피실험체로 객체화되면서 분류되고, 규정되고, 정의되어 ‘불변하고 영원히 정체된 곳’으로 재현되었다. 이런 지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서양은 이런 지식을 “통해” 동양을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는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동양처럼 낙후되고 나약한 곳은 서구에게 제국주의 세력의 침입과 식민화를 초청하는 것처럼 보여졌다(Said, 1991: 163-166; 377; Lewis, 1982: 10 참고). 일례로, 19세기 영국인들은 인도에 대한 지리학적·인류학적 조사와 문헌 연구를 대대적으로 진행했었는데, 이 과정에서 ‘인도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혼재된 혼란스러운 사회’라는 지식이 형성되었고, 이는 ‘질서 있고 이성적인 영국이 인도를 통치해야 한다’는 식민 통치의 정당성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
또한 오리엔탈리즘에 물든 레퍼토리·내러티브·수사법·정치이론은 어째서 서양이 신성불가침으로 여기는 자유나 평등 같은 권리들을 지구 반대편에 적용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해준다(Said, 1995: 161). 서양은 자신들의 가치를 우월한 것으로 보았고, 서양의 기준으로 동양을 재단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자 결과적으로 동양은 자신들보다 한참 뒤떨어진 곳, 퇴보한 곳이 되었다. 그러자 동양은 자유를 누리기에 너무 미성숙하고, 그들의 사회와 문화는 민주정에 적합하지 않다는 담론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자비롭고 진보한 서양은 무지하고 몽매한 동양 사회에 개입해 그들을 진보의 길로 인도하는 ‘자애롭고 계몽된 독재자’가 될 필요가 있었다(Williams, 2018: 10-14). 게다가 동양엔 발언권이 없었다. 자신들의 위치를 객관적으로(즉, 서구의 기준으로) 인식할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과학적’인 서양은 동양을 관찰하고 재판할 수 있었다. “그들은[동양은] 자신들을 대표할 수 없다. 그들은 [서양에 의해] 대표되어야 한다.”라는 마르크스의 글이 당대의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를 생생히 보여준다(Marx, 1963: 628; Said, 1991: 48 참고). 그런 기울어진 관계 속에 서양은 행위자(actor)였고, 동양은 수동적인 반응자(reactor)였다(Said, 1991: 187).
결국 서양은 동양을 ‘다른 존재’로 바라봄으로써 자신들에게 적용되는 권리를 동양에 부여하지 않고, 그들의 주권을 무시할 수 있었으며, ‘열등한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진보한 서양이 저열한 동양의 문명화하고, 근대화하고, 계몽시켜야 한다는 논의(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제국주의’를 품은 오리엔탈리즘적 문헌들은 서구 제국을 침략자에서 고귀한 영웅으로 만들었고, (식민지 지배에 앞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Said, 1991: 74; 161; 206; 이영석, 2020: 370).
따라서 오리엔탈리즘은 단순히 서양의 동양관 혹은 레퍼토리 정도가 아니다. 타자의 세계를 연구하고, 열등한 모습으로 재구성하여 정복하고,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권력의지나 목적의식 자체’다(Said, 1991: 32-33; Kennedy, 2011: 72; Aeschliman, 2021 참고). 권력은 텍스트를 통해 지식을 생산할 뿐 아니라, 텍스트가 묘사하고 있는 현실을 창조할 수도 있으며, 특정 관점(서양의 동양관)을 받아들이도록 강요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Kennedy, 2011: 84; 86).
사이드의 저술들은 수많은 후대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으며, 20세기 서구 인문학의 지형을 완전히 바꿨다(Kennedy, 2011: 35; Aeschliman, 2021; Garner, 2021; Mishra, 2021; 원재연, 2019: 622). 우리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그리고 푸코의) 통찰력, 즉 ‘지식이 권력을 낳기도 하고, 권력이 다시 지식을 생산하기도 한다’는 결론을 인정하고 일정 부분 받아들여야 한다. 실제로 19세기 유럽인들이 동양에 대한 편견과 잘못된 지식을 악용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동시에 오리엔탈리즘 이론에 대한 적절한 비판도 따라야 할 것이다. 실제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출간 당시 미국동양학회(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등 여러 학자들에게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Lewis, 1982: 15). 나 또한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의 학문적 성과와 지대한 영향력을 인정하면서도, 오리엔탈리즘 이론을 강력하게 비판하고자 한다. 오리엔탈리즘 이론이 그토록 유명한 (그리고 남발되는) 시사 용어가 된 것은 그것이 명명백백히 옳기 때문이 아니다. 부분적으론 탈현대주의라는 ‘시류’ 덕분이며, 또 부분적으론 비판력이 결여된 ‘지식 소매상들’이 앵무새마냥 떠들었기 때문이고, 또 부분적으론 주장 자체의 공격성 내지는 ‘파격성’ 때문이다. 나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통찰력을 정당히 인정하면서도, 오리엔탈리즘 이론이 반쪽짜리 (혹은 그 이하의) 이론에 불과하다고 감히 주장한다.
오리엔탈리즘 이론의 가장 큰 결함 중 하나는 ‘구분의 실패’라 할 수 있다. 사이드는 ‘나의 것이 진리’라는 인식과 ‘진리가 나의 것’이라는 인식을 구분하지 않았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의 기본 뼈대라 할 수 있는 ‘서양의 관점(서양의 동양관)’을 비난했는데, 이는 서양이 자신의 특수한 기준(계몽주의적 진보, 기독교적 도덕, 자유주의적 정치 등)을 보편화한 후, 그것으로 동양을 함부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사이드는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프란츠 파농의 유명한 발언인 ‘원주민들에게 객관성은 언제나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를 두 차례나 인용하면서(Said, 1995: 291; 446), 서양이 ‘자신들만의 진리’에 불과한 것을 ‘객관적인 진리’로 격상시켜, 그것을 기준삼아 토착 사회를 평가했다고 주장했다(Kennedy, 2011: 200). 서양이 서양만의 진리로 동양을 판단한 결과, 동양은 언제나 ‘기준 미달’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제국적 정복과 통치를 지적으로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이후 탈식민주의 학자들도 사이드를 따라 (서양의 대표적인 가치라 할 수 있는) ‘자유주의’는 결국 서구만의 “편협한(parochial)” 가치관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Williams, 2018: 5). 사이드는 이런 대표적인 예로 헤겔과 마르크스를 언급했다(Said, 1995: 300).
하지만 사이드의 주장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문점이 하나 떠오른다. 헤겔이 『역사철학 강의(Lectur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에서 동양을 퇴보적이고 정체된 곳으로 평가했을 때, 또는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The Eighteenth Brumaire of Louis Napoleon)』에서 동양은 스스로를 대변할 수 없다고 폄하했을 때, 그들은 정말 자신들이 “서양의 가치관”으로 동양을 정의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정말 서양의 기준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했을까? 결코 아니다. 헤겔과 마르크스 모두 자신이 역사의 객관적 발전 경로를 ‘발견했고,’ 그것으로 동·서양 양쪽 모두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쉽게 말해, 그들은 자신의 것을 보편적 진리로 가장해 내세운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진리를 자신이 (남보다 먼저) 발견했다고 믿은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보편적 진리’ 자체였지, 그것을 어느 쪽이 주장하고 있는지가 아니었다. ‘내 기준이 곧 보편적인 진리다’라는 믿음과 ‘내가 보편적인 진리를 주장한다’라는 믿음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태도부터 건방지지만, 후자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헤겔이든 마르크스든, 혹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싸잡아 비난한 그 어떤 오리엔탈리스트든, (수사적인 표현을 제외한다면) 그 어떤 서양인도 엄밀한 의미에서 ‘서양의 기준이 곧 보편적인 진리다’라고 주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보편적인 기준을 서양이 주장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제국사학자 버나드 포터는 (사이드에 버금가는) 수많은 문헌 연구를 통해, 19세기 영국의 문화제국주의자들이 영국의 기준을 주장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기준을 주장한다’고 생각했음을 밝혀냈다(Porter, 2006: 103). 스크루턴이 말했듯, 철학·과학·문학·예술 등 18-19세기에 이루어진 모든 지적 탐구와 활동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추구였다(Scruton, 2019: 356). 그 어떤 학자들도 (단어 자체가 형용모순이긴 하지만) ‘우리만의 진리’를 탐구하고 있다고, 혹은 ‘서양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믿지 않았다. 계몽주의를 이끌고 선도한 숱한 서양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신이 제정한 객관적 진리’를 탐구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믿던 신은 서양에 속한 ‘지역 신’이 아닌, ‘전 세계와 우주를 창조한 일신교의 하나님’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서양이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기준을 동양에 강요한다고 보았으며, 그것이 근본적으로 건방지고, 차별적이고, 부도덕하고, 제국주의적 마인드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사이드의 논리대로, 만약 서양이 발견하고, 구축하고, 동양에 내세운 기준이 ‘서양의 진리’이므로 타지에 적용해선 안 된다면, 만유인력의 법칙(서양인인 뉴턴이 발견하고 이론화한 지식)을 동양에 적용해선 안 되는 것일까? 영국의 건축가 에드윈 루티언스는 인도 궁전을 건축했을 때 동양의 지식(인도의 건축술)만 활용해야 했을까?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사이드는 마치 동양에서 쏜 포탄과 서양에서 쏜 포탄이 다른 포물선을 그리는 것처럼, 마치 서양의 건축술로 동양 궁전을 건설하면 그 궁전이 금방 무너지고 말 것처럼 주장한다. 즉, 동양을 폄하했던 서양을 비난하고 싶다면, 소유하고 주장하는 보편적 진리가 과연 ‘정말 보편적인 진리였는지’ 먼저 따져야지, ‘진리를 내세운 자가 어디 출신인지’ 따져선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오리엔탈리스트들이 정말로 보편적인 진리를 주장했다면, 과연 누가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들의 시건방진 태도를 책잡을 수 있을지언정, 그 이상으로 어떤 진지한 비판을 할 수 있을까?
사이드가 담론(지식)의 사실 여부보단, 그 담론이 ‘어떤 권력 효과를 낳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담론(지식) 자체가 ‘사실’이라면 즉, 서양이 제기한 다양한 가치와 기준들이 정말 객관적으로 합당한 것이고, 그런 기준에 동양이 미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라면, ‘지식이 권력을 낳았고, 권력이 지식을 낳았다’는 도식은 필연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다. 결국 서양인들이 현상(동양이 정체되고 낙후되었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전달한 것이 되니까. 지식과 권력의 관계는 지엽적인 문제가 된다. 따라서 사이드는 자신의 문헌학적 조사에서 먼저 오리엔탈리스트들이 단지 ‘서양의 것이 곧 진리’라고 수사적으로 떠벌리는 것인지, 아니면 서양이 먼저 발견한 객관적 진리를 동양에 내세우는 것인지 분리해야 했다. 그리고 정말 서양이 점유한다고 주장하는 ‘진리’들이 정말 보편적인 것이었는지 입증해야 했다. 서양인들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동양에서 적용한다고 비난하고 싶으면, 만유인력의 법칙 자체의 진리성을 논박해야지, ‘서양이 만든 것을 동양에 적용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주장이 아닌 주장을 제기한 자를 공격하여 주장 자체까지 폄하하려는 전형적이 논리적 오류에 불과하다.
사이드는 J. S. 밀과 같은 지식인들이 제국주의 철학에 저항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지식 생산으로) 제국주의에 공조했다고 주장했다(Kennedy, 2011: 211). 계몽주의적 진보관과 질적 공리주의에 입각해 제국주의적 정복을 인가하고 식민주의를 정당화한 밀의 주장이 결과적으로 틀렸을 수 있다(Williams, 2018 참고). 하지만 그 입증 과정에 필요한 것은 ‘어느 쪽 주장인지(밀이 서양인인지 동양인인지)’ 식별하는 것이 아니라 밀이 ‘무엇을 주장했는가’이다. 그렇다면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사이드를 옹호하며 주장한 서양이 “근대세계에 부과하는 지적인 틀(Wallerstein, 2008: 88)”은 정말 터무니없는 ‘서양의 기준’에 불과했는가? 서양이 동양에 부과한 기준은 정말 서양만의 기준이었을까? 이에 많은 사람들, 심지어 동양인들마저 쉽사리 수긍하진 않을 것이다. 인도의 초대 총리였던 네루는 독립 직후 이렇게 말했다.
“미래가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며,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요? 인도의 평범한 사람들, 농민들과 노동자들에게 자유와 기회를 가져다주는 것, 가난과 무지, 질병과 싸워 이를 종식시키는 것, 번영하고 민주적이며 진보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 그리고 모든 남성과 여성에게 정의와 충만한 삶을 보장해 줄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제도를 창조하는 것이 우리의 과업입니다.” (Williams, 2018: 17에서 재인용)
네루는 자유와 기회, 민주주의와 진보, 정의로운 제도를 말했다. 이것들은 물론 서양의 전유물은 아니다. 하지만 서양에서 먼저 나온 정치철학이자 정치적 수사이며, 영국이 인도에서 주장하던 가치요, 영국과 인도의 우열을 논할 때 영국이 사용하던 기준들이다. 설령 영국이 자신들이 내세운 기준만큼 아름답게 통치하진 못했을지언정, 영국은 (전에 없던) 자유주의적 정치관을 주장했고, 정치와 사회에 대한 새로운 기준들이 네루와 수많은 신생 독립국 지도자들에게 이어진 것이다(Williams, 2018: 17). 심지어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 선언 방송에서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1789년 “프랑스”의 인권선언문을 인용하기까지 했다(Gluckstein, 2021: 490). 서양의 식민지배를 떨쳐내고 자국을 독립의 길로 이끈 지도자들이 자유주의적 관용과 권리, 의회와 법치, 정교분리와 자유시장, 과학적 사고와 이론들을 서양의 진리라 치부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가치이자 지향점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자유주의나 의회민주주의가 과연 모든 국가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인지 아닌지 판가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인간의 기본권을 인정하고, 양성이 더 평등하고, 문제를 자의적인 폭력보단 법으로 해결하고,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워지고, 과학기술에 힘입어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사는 것이 ‘보편적으로 좋은 것’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것이 그럴 수 있을까? 미망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사회(영국)와 미망인을 산 채로 불태우던 사회(인도의 일부 지역)는 도덕적으로 동등한 것일까? 미망인 화형은 인도의 고유 관습이라고 주장하던 브라만 계급에게 “나의[영국의] 국민 역시 관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남성이 여성을 산 채로 불태울 때 우리는 그들을 교수형에 처합니다. 우리 모두가 국민 관습에 따라 행동하도록 합시다(Moorhouse, 2008: 82).”라고 말했던 찰스 네이피어(인도군 지휘관)는 시건방진 문화제국주의자에 불과했던 것일까? 19세기 중엽에 인도의 교육 개혁을 담당했던 T. B. 매콜리는 ‘바다가 엿과 버터로 가득하다고 가르치는’ 인도의 지리학을 보다 과학적인 서구의 지리학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Macaulay, 1972: 242-243). 우리는 그런 매콜리를 오리엔탈리스트로 비난한 후, 그의 주장을 제국주의 권력을 강화하는 음모로 판단하고 일축해야 할까? 미망인을 불태우고 바다가 엿과 버터로 가득하다고 가르치던 원주민들은 정말 객관성의 편이 아니었던 것 아닐까?
나는 이만 말을 아끼겠다. 자유주의의 가치를 믿되, 그것을 실증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사이드는 앞서 말한 “서양의” 기준을 은밀하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한 입문서를 쓴 발레리 케네디에 따르면, 사이드는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 시각에서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했고, ‘법 앞의 평등’이나 ‘표현의 자유’나 ‘민주주의’를 보편적인 권리라고 옹호했다. 사이드가 사담 후세인을 비난했던 이유는 그가 ‘민주주의의 적’이었기 때문이다(Kennedy, 2011: 50; 52; 96; 151; 164 참고). 팔레스타인 망명정부 국회(PNC)의 의원으로 활동할 때는 기독교적 ‘인권 개념’에 의거하여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권리를 옹호했고(Aeschliman, 2021), 그가 바라던 팔레스타인은 ‘민주적’이고 ‘세속적’인 사회였다. 하지만 세속주의와 민주주의, 인권과 관용, 표현의 자유는 (사이드와 그의 동조자인 월레슈타인마저 경계한) “마치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어온 서양의 가치”가 아니던가(Wallerstein, 2008: 79-81 참고)? 심지어 사이드는 서구 인본주의를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고백하기까지했다(Kennedy, 2011: 230). 하지만 이는 사이드가 비난했던 오리엔탈리스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자신들이 서양의 진리가 아니라 보편적인 진리를 내세우고 있다고 믿었다. 결국 오리엔탈리스트도 사이드도 모두 (서양이 먼저 습득한) 보편적 가치를 기준으로 내세웠다면,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스트들에게 어떤 비난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던 오드리 로드의 말이 떠오른다(Lorde, 1983: 99).
오리엔탈리즘 이론의 두 번째 문제는 자료의 ‘취사선택’이다. 저명한 중동학자였던 버나드 루이스는 사이드가 인용한 문헌들이 “대부분 맥락에서 잘려나왔고, 거의 인식 불가능할 정도로 왜곡되었다(Said et al, 1982).”고 주장했다. 버나드 포터는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분석한 제인 오스틴의 『맨스필드 파크(Mansfield Park, 1814)』가 대단히 ‘부수적인 부분에만’ 집착하지, 전체 이야기의 흐름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비판했다(Porter, 2006: 141). 사이드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많은 자료들을 언급하고 인용했지만, 그 자료들은 대단히 ‘선별적으로’ 채택된 것이다. 오리엔탈리즘 이론에 부합하는 부분만 과장하여 인용한 반면, 부합하지 않는 부분들, 예컨대 동양과 서양을 인격적으로 동등하게 취급한 문헌들은 축소했거나 다루지 않았다. 더 나아가선 문헌 저자의 의도를 깡그리 무시한 채 동양에 대한 묘사를 ‘타자에 대한 편견’이라 부르거나 더 나아가선 ‘제국주의’라고 불렀다.
먼저 가볍게 월터 스콧을 보자. 스콧의 저술들은 오리엔탈리즘 이론을 뒷받침하는 핵심 문헌은 아닐지라도,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스콧의 이름은 수없이 많이 언급되었다. 사이드가 참고한 (유일한) 스콧의 저술은 『탈리스만(The Talisman, 1825)』인데(Said, 1991: 174-175; 316 등), 정말 편견 없는 독자라면 『탈리스만』이 말하고자 하는 기사도라는 “서양의” 이상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 무슬림의 지도자 ‘살라흐 앗 딘’이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것이다. 스콧이 묘사하는 살라흐 앗 딘은 기사다운 고귀함과 고결함의 상징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어떤 유럽인들보다 더 ‘근사하게’ 묘사되었다. 하지만 사이드는 이를 완전히 무시했으며, 『탈리스만』의 한 기사가 이슬람을 모욕한 대사 몇 줄(Said, 1991: 175)과 오직 서방이 동방을 침략한 십자군 원정을 언급하는 것에 만족한다(Said, 1995: 156). 어쩌면 사이드는 스콧이 동양의 영웅인 살라흐 앗 딘조차 “서양적” 가치관으로 이상화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양의 기준에 부합하는 무슬림이 (그것도 통치자로) 존재했다면, 동양이 서양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정복과 지배를 정당화했다던 오리엔탈리즘 이론과 모순되는 것 아닌가?
오스틴의 『맨스필드 파크』나 스콧의 『탈리스만』을 ‘규칙을 증명하는 예외’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이드에게 스콧보다 더한 비난을 받았던, ‘제국주의와 공모한 작가’로 비난 받은 러디어드 키플링은 어떨까(Kennedy, 2011: 188)?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키플링이 「백인의 의무(The White Man’s Burden, 1899)」라는 악명 높은 시를 통해 영국의 제국주의를 긍정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키플링은 인도 봄베이에서 태어났고, 평생 인도를 (어쩌면 영국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이다. 키플링의 대표작이자 사이드가 언급한 『킴(Kim, 1901)』은 기본적으로 동양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려는 의도가 아닌, 동양(인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 속에 집필된 작품이다. 『킴』에서 가장 많은 조롱과 비방을 당한 사람들은 인도인들이 아닌 백인들이었다. “이유도 없이 뭘 하려 드는 건 악마와 영국뿐이지(Kipling, 2009: 167),” “[백인들은] 욕망을 좇고 허무를 향해 나아가는 자들이다. 넌 그런 종류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Kipling, 2009: 195),” “킴의 생각에는 영국인들이 [인도인들보다] 더 더러웠다(Kipling, 2009: 253),” “유럽인들의 고질적인 의심증(Kipling, 2009: 441),” 같은 묘사들을 보라. 『킴』에서 서양의 내세운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은 동양이 아닌 서양 자신이었다. 사이드는 이 모든 것을 무시하면서, 『킴』이 제국주의를 흥미진진한 모험으로 포장했고, 권력과 지배의 현실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제국주의를 ‘은폐했다’고 비난했다(Said, 1995: 35;). 다시 말해, 언급된 부분은 무시하고 언급되지 않은 부분만 주목한 것이다. 취급되지 않은 영역도 취급된 영역만큼 많은 것을 시사하는 것이 사실이다. 학자라면 ‘무엇이 빠져 있는가’에도 마땅히 주목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이 언급되었는가’에 대한 논의가 없다면, 결론이 무엇이든 그것은 반쪽짜리 결론, 그것도 매우 ‘편향적인 결론’에 불과한 것이다.
중동학자인 루이스는 (사이드처럼) 『오리엔탈리즘』이 참고한 문헌에서 ‘무엇이 빠져 있는가’에 주목했다. 루이스에 따르면, 영국과 프랑스의 최고의 동양학자들, 이를테면 R. A. 니콜슨, 가이 르스트랑(Guy Le Strange), 토머스 아놀드 경, E. G. 브라운 같은 학자들은 살짝 언급되고 지나가는 수준이고, 클로드 캉(Claude Cahen), 레비-프로방살(Levi-Provençal), 앙리 코르뱅(Henri Corbin), 마리위스 카나르(Marius Canard), 샤를 펠라(Charles Pellat), 윌리엄 마르세(William Marçais), 조지 마르세(Georges Marçais), 윌리엄 라이트(William Wright)은 아예 조금도 언급되지 않았다(Lewis, 1982: 11). 특히 루이스는 사이드가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스트’라 부르며 길고 자세히 논했던 에드워드 레인을 다룰 때도(Kennedy, 2011: 68), 레인의 최고의 업적으로 칭송받는 아랍어-영어 사전을 조금도 언급하지 않는다며 비난했다. 그것이 동양학의 중요한 업적이자 언어 연구의 이정표였음에도 말이다(Lewis, 1982: 11). 게다가 사이드는 독일·네덜란드·러시아 학자들의 문헌은 거의 취급하지 않았다. 독일과 네덜란드의 중동 연구가 영국과 프랑스만큼 일찍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드가 그들의 연구를 대체로 외면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루이스는, 독일과 네덜란드의 학문적 연구들이 실제 중동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다시 말해, 지식과 권력의 공모를 파헤친 오리엔탈리즘 이론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Lewis, 1982: 13; Said et al, 1982 참고).
사이드는 나이지리아의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를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 특히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Things Fall Apart, 1958)』를 위대한 탈식민주의 소설로 극찬하기까지 했다(Kennedy, 2011: 216). 하지만 아체베는 사이드보다 훨씬 균형 잡힌 사람이었다. 그는 (중동의 부유한 엘리트 집안 출신으로 영국 식민통치의 수혜를 본 사이드와 달리) 실제로 무엇이 식민지민의 삶인지 직접 경험한 인물이었지만, 식민주의의 모든 것을 부정하진 않았다. 그는 영국제국의 지배가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공포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낳았다고 주장했다. 아체베는 세상에는 제국보다 악한 것이 많으며, 식민주의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복잡하고 모순점이 많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체제였다고 주장했다. 아체베는 2013년에 사망하기 전 해에 『나라가 있었네(There Was a Country, 2012)』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그는 책에서 영국의 식민정부가 나이지리아를 선량하게 통치했다고 고백했다(Biggar, 2017).
(식민통치를 직접 체험했던) 아체베에게 있었지만 (식민통치의 수혜자였던) 사이드에게 없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제아무리 민감하고 비극적인 과거라 할지라도, 그것을 단순히 선과 악, 지배자와 피지배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 복잡한 역사적 현실을 감내하려는 지적 용기였을지도 모른다. 사이드에게 (모든 것을 수렴하는) ‘이분법’이 있었다면, 아체베에겐 (모든 것을 바로 보는) ‘균형’이 있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문헌 저자들의 ‘의도’가 아니다. 그들이 생산한 지식들이 ‘어떻게 제국주의와 공모했는가’이다. 쉽게 말해, 의도보단 결과(담론의 기능)에 치중한다. 하지만 정말 집필 의도보다 문헌의 실제 기능이 중요했다면,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인격적 모독으로부터 일정부분 면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생산한 글 자체는 오리엔탈리즘적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결국 본 의도와 무관하게 작품이 오용·남용·악용된 것이니까. 하지만 사이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인격까지, 텍스트 자체까지 공격했다. 영국의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은 사이드가 선별적인 인용문들(비판2)로 자신의 논제를 개진할 뿐 아니라, 그 범위가 대단히 좁으며, 동양을 묘사하는 서양의 ‘언어’ 자체에만 온갖 경멸과 독심을 쏟아붓는다고 비판했다(Scruton, 2006; 2019: 353). 루이스도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스트들이 동양에 대해 품었던 열정과 사랑을 완전히 무시했다고 비난했다(Lewis, 1982: 2). 사이드는 그들의 ‘마음’이나 ‘의도’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사이드가 두 권의 책에서 폭넓게 취급한 에른스트 르낭, 조지프 콘래드, 제인 오스틴, 러디어드 키플링, 월터 스콧 및 수많은 동양학자들은 결코 동양을 폄하하거나, 모독하거나, 열등하다고 취급하기 위해 글을 쓰지 않았다. 설령 그들이 차용한 기준과 잣대가 다분히 “서양적”일지라도(스콧의 기사도처럼), 또한 동양의 많은 결점을 열거하고 지적했을지라도, 오리엔탈리스트들은 대부분의 경우 동양을 진심으로 흠모했다. 원래 ‘오리엔탈리스트(orientalist)’라는 단어는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잊거나 포기할 만큼 인도의 문화에 매료된 동인도회사 직원들과 (19세기 초중반의) 문화적 제국주의로부터 인도 고유의 문화를 지키고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던 동양학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전부 동양에 받쳤다. 18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 압둘 와합(Abd al-Wahhab)이 일종의 분서갱유를 자행하며 이슬람 세계를 쇄신하고 있을 때, 영국의 동양학자 윌리엄 존스는 자신이 번역할 수 있는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의 시를 모두 보존하여 인도에서 인도학 및 동양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Scruton, 2019: 354). 그가 없었다면 수많은 고대 문헌들이 유실되었을 것이다.
“여기 나무 아래 빵 한 조각,
포도주 한 병, 시집 한 권, — 그리고 너
황야에서 내 곁에 노래하는 그대 —
그러면 황야도 곧 충분한 낙원이라네. (...)
(...) 포도잎으로 감싸
그윽한 정원 곁에 나를 묻어다오.
내 재마저 향이 되어
바람 따라 퍼지게 하리니.”
- 「루바이야트」, 12; 87-88절
위 시는 피츠제럴드의 「루바이야트(Rubaiyat, 1859)」라는 시로, 페르시아를 묘사하고 있다. (사이드가 언급한 시다(Said, 1991: 317).) 물론 「루바이야트」는 물론 ‘서양의 입장에서’ 재구성한 동양의 초상이다. 즉, 서양의 동양관(오리엔탈리즘)이다. 하지만 왜 위 같은 시를 동양에 대한 ‘헌사’나 ‘찬사’로 보지 않는 것일까? 왜 사이드는 이를 구태여 동방에 대한 은밀한 ‘폄하’나 ‘모욕’이나 제국주의적 ‘술수’로 보는 것일까?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One Thousand and One Nights)』 프랑스어 번역본이나, 괴테의 『서동시집(West-Östlicher Divan, 1819)』도 마찬가지다. 왜 굳이 동양에 대한 서양의 묘사를 문화제국주의로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피츠제럴드든 괴테든, 누구도 동양을 모욕하거나 동양의 열등함을 보고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서양의 우월함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오리엔탈리즘 이론에서 (담론의 의도보단) 담론의 제국주의적 기능 및 결과가 정말로 더 중요하다면,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인격이나 의도는 제국주의와 무관하다. 하지만 사이드는 때때로 이들의 의도에 대한 비난, 때론 감정적인 분노까지 서슴지 않았다(Said, 1991: 1-3장). 망치를 든 사람에겐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이는 것처럼,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에겐 모든 것이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혐오와 편견으로 보였을 뿐이다. 그런 사이드 덕분에 ‘오리엔탈리스트’라는 단어는 루이스의 표현대로 “구제가 불가능할 정도로(beyond salvation)” 오염되었다(Lewis, 1982: 4).
푸코는 권력이 ‘모든 곳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다. 반면 사이드는 권력은 언제나 ‘위로부터’ 온다고 전제했는데, 사이드에게 그 위는 물론 서구 사회,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 미국, 그리고 이스라엘이었다(Kennedy, 2011: 82). 그래서인지 사이드는 서양(위)이 동양(아래)에 부과한 가치판단과 묘사에만 관심을 쏟았고, 그의 작품에서 서양은 ‘항구적인 인식론적 가해자’로, 동양은 ‘항구적인 인식론적 피해자’로 도식화된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이드는 (자신이 인위적인 개념이라고 비난했던) ‘지리적 위치’에 따라 가해자(서양)와 피해자(동양)을 규정해버렸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리엔탈리즘 이론이 고발하는 타지역과 타문화에 대한 편견·왜곡·조롱·멸시·경멸 그리고 ‘타자화’는 서양의 전유물인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자국 문화를 높이 평가하고 타국 문화를 경시하는 태도는 (사이드의 주장과 달리) 지리에 국한된 것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이다. 서양의 동양관이 동양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편견에 기초해 있다면, 그것은 물론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반대도 마찬가지다. 동양의 서양관이 서양을 왜곡하고 타자화했다면, 그것 또한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면 어떨까? ‘동양의 서양관’은 편견 없이 서양을 받아들였을까?
이언 브루마와 아비샤이 마갈릿이 썼듯, 동양도 서양을 ‘자신의 눈’을 통해 보았다. 낯설고 이질적인 서양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단, 동양적인 기준을 부과하여 폄하하곤 했다. 많은 서양인들의 동양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듯, 적지 않은 수의 동양인들도 서양의 기술력과 강력함에 경외심을 느꼈다. 하지만 몇몇 동양인들, 특히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은 때론 서양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도를 갖고’ 서양의 문화를 깎아내리고 폄하함으로써 서양에 대한 동양의 지식을 재구성했고, 서양에 대한 편견을 민족주의의 에너지로 활용했다. 브루마와 마갈릿은 이런 편협한 반서양주의를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이라 불렀다(Bruma & Margalit, 2007).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을 예증하는 다양한 문헌들을 제시했듯, 옥시덴탈리즘을 예증하는 문헌들 또한 많고 다양하다. 게다가 오리엔탈리즘이 ‘서로가 서로를 인용하는듯한’ 비슷한 레퍼토리(나약하고 관능적이고 정체된 동양)를 따르는 것처럼, 옥시덴탈리즘 또한 일정한 패턴을 따른다. 그중 전형은 서양이 ‘물질주의’에 빠져 타락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서양이 경제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동양에 앞설 수는 있지만, 서양이 물질에 집착한 나머지, 숭고하고 고귀한 정신을 방기했다는 것이다. 서양은 정신적으로 부패했다. 동양은 서양이 아니다. 그러므로 동양은 정신적으로 우월하다.
옥시덴탈리즘의 역사는 오리엔탈리즘처럼 ‘고대부터’ 시작되지만, 옥시덴탈리즘의 화신이라 볼 수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간디’다. 간디는 독립운동 내내 서구 문명은 물욕과 사치의 노예들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했고, 서양의 영적·지적 유산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Copland, 2001: 43; 101). 서양은 속물적인 문명인 반면, 동양은 정신적인 고상한 문명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도식화,’ 서양에선 모든 것을 사고 팔 수 있는 물신숭배자들이라는 ‘일반화’와 ‘왜곡’은 19세기 말과 20세기에 걸쳐 동양의 서양관을 지배했다. 서양에 대한 이 같은 묘사들은 간디는 물론 인도 민족주의자들인 사바드카르, 틸락, 타고르,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부터 중국의 량치차오(Liang Qichao), 심지어 21세기의 오사마 빈 라덴 같은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자까지 즐겨 인용해왔던 ‘서양에 대한 동양의 지식’이다. 1919년 베트남에서 치러진 세계사 최후의 과거 시험에서도 ‘동양은 도덕적인 반면 서양은 속물적’이라는 옥시덴탈리즘이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난다(Gadkar-Wilcox, 2014: 389; 390; 393). 일본도 마찬가지다. 서양에 대한 일방적인 경외심이 식기 시작한 20세기 초, 일본의 극우 지식인들은 이런 이분법을 즐겨 인용하며 ‘동양 우월주의’에 심취하기도 했다(박지향, 2003: 249부터 참고).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조선은 오랜 기간 서양인들을 ‘양이’라고 부르고 동양의 도(道)와 인(仁)을 모르는 인간 이전의 ‘금수’로 간주했다. 한국의 양반계층은 자신들이야말로 예(禮)의 담지자라는 자부심과 조선이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자긍심을 가졌다. 조선인들은 영국을 문명국으로 부르고 감탄한 일본을 오랑캐라고 불렀는데, 동방예의지국에선 여성이 혼자 이국 땅을 돌아다니는 것이 상상도 못할 야만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이다(박지향, 2003: 78; 124). (영국인으로 조선을 여행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을 두고 한 말이다.) 거문도에 당도한 서양인들을 묘사한 조선측 사료도 비슷하다. 거문도의 유학자였던 김류의 명성이 외국에까지 알려져, 서양인들이 종종 거문도에 와서 김류에게 문안한다 하여 문 앞에 몸을 굽히고 김류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바다 위에 줄지어 사열했다는 말도 안 되는 과장법이 등장하기도 하니 말이다(이영호, 2016: 119). 서양에 대한 동방예의지국의 ‘은밀한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동양이 서양에 경외심을 느꼈을까? 그렇다. 하지만 서양도 동양을 동경할 줄 알았다. 서양이 동양을 폄하했을까? 그렇다. 하지만 동양도 서양을 폄하했다. 서양의 동양관(오리엔탈리즘)이 편협하고 편견이 가득했을까? 그런 부분도 있다. 하지만 동양의 서양관(옥시덴탈리즘)도 마찬가지였다. 동양과 서양 모두 자국의 것을 우월하게, 타국의 것을 열등하게 볼 줄 알았으며, 양쪽 모두 자국의 기준으로 타국을 판단했다. 서양은 (이를테면) ‘계몽주의적 진보관’으로, 동양은 (이를테면) ‘인의예지’로 서로를 판단했다. 그런데 왜 사이드는 유독 서양만 걸고 넘어졌던 것일까? 그는 옥시덴탈리즘에 대해 거의 완전히 침묵했다. 사이드는 언젠가 ‘우리와 그들의 대립 구도’는 언제나 ‘우리가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을 수반한다고 주장했던 적이 있다(Kennedy, 2011: 77). 하지만 사이드는 결과적으로 ‘서양이 느낀’ 우월감만 비난했다. 오직 서양이 동양을 제멋대로 재단하고 폄하하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지, 반대로 동양이 서양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살펴보지 않았고, 별 관심도 주지 않았다. 게다가 누가 누구에 대하여 불공평했는지를 판별하는 데 필요한 그 어떤 비교분석도 이루어지지 않았다(Scruton, 2019: 353).
오리엔탈리즘 이론이 잘해야 반쪽짜리 성과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이드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상황이 아닌 정체성에 연동시켰기 때문이다. 개별적 상황에선 서양이 동양에 대한 가해자일 수 있다. 그러나 가해자가 언제나 가해자라는 법은 없으며, 피해자가 언제나 피해자로 남으리라는 법도 없다. ‘우리 기준으로 그들을 판단하는 것’ 그리고 타문화에 대한 편견과 무시, 때론 노골적인 증오는 서양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 본성의 전유물’이기에, 서양이 그러하다면 동양도 그러하다. 모두 결함 많고 편견에 취약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동양의 서양관이 서양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양에 서양을 정복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담론의 기능을 수행하는 물리력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지, 동양이 서양보다 더 도덕적이고 흠이 적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동양(오스만·페르시아·무굴·청)에게 그럴 힘이 있었다면, 아마도 동양의 서양관은 동양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지식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사이드가 자신의 연구 타임라인을 서양이 동양을 역전하고 정복하기 시작한 18세기 이후의 시대에 한정하는 바람에 서양에 대한 동양의 지식과 동양 제국주의 간의 관계를 제대로 주목할 기회조차 없었다. 만약 그가 오스만제국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15-17세기 옥시덴탈리즘까지 연구했다면, 지금보다 더욱 위대한 학자로 기억될 수 있었으리라.
결국 ‘양비론’으로 나아갔지만, 나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고 싶다. 타자에 대한 존중과 편견이 상황에 따른 것이고, 결국 ‘정도의 문제’로 판가름해야 한다면, 결국 누가 ‘더 존중하고,’ ‘덜 왜곡했는가’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이 더 관용적인 문명인가, 아니면 동양이 더 관용적인 문명인가? 물론 이를 판단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적어도 사이드가 자신이 수학하고, 연구하고, 일했던 미국(서양)에 대해 그토록 가혹한 비판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은, 서양의 문화가 오히려 더 관용적이고 개방적이라는 증거일 수 있다. 중국에서 중국 사회를 비판하는 것보다 미국에서 미국 사회를 비난하는 것이 쉬우며, 탈레반 체제에서 서양의 편을 드는 것보다, 영국에서 동양의 편을 드는 것이 훨씬 쉽다. 기독교에서 발원하고 계몽주의가 갈고 닦은 (사이드가 칭송한) 인간 가치에 대한 보편주의적 입장 덕분에, 서양에선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물론 늦은 감이 있지만) 인종차별에 대한 반대, 성적 불평등에 대한 반대, 제국주의에 대한 부끄러움과 비판이 상식적인 차원에서 호소력을 가질 수 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서양이 가진 인간에 대한 보편적 이상 때문에, 자국의 예술과 문학에 그토록 엄격한 잣대를 적용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노예무역과 인종차별, 성적 불평등과 제국주의는 결코 서양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 세계 모든 문명이 그런 ‘죄’를 저질렀다. (영국이 정복한 인도는 무굴제국이 지배하는 인도였다.) 하지만 오직 서양만이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죄를 참회하도록 요구받는다. 아프리카인들은 유럽인들에게 과거 노예무역에 대한 죄를 (가능한 물질적으로) 회개하도록 촉구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이 동포를 사냥해서 백인 무역선에 팔았던 과거,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도 노예무역이 범람했으며 유럽인들은 기존 판로를 이용한 것뿐이라는 사실은 공론화되지 않는다. 유럽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그리고 유럽이 노예무역을 폐지하고 난 후에도, 아프리카 노예들을 사들인 곳이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이라는 사실 또한 공론화되지 않는다. (서양이 관여한) 서아프리카 노예무역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중동이 관여한) 동아프리카 노예무역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적다. 중국의 사회는 자국을 비난할 수 있는 배짱 있는 사회인가? 티베트와 신장에서 그들은 얼마나 관용적인가? 나는 서양이 자신에 대한 비판에도 문화적으로 개방적이기 “때문에” 오리엔탈리즘 같은 심각한 도전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Bruma & Margalit, 2007: 178; Scruton, 2019: 355). 포터가 말했듯, 서양을 단죄한 동일한 기준을 동양이나 아프리카에 적용하면 즉각적으로 편견 혹은 심지어 깔보는 태도라고 비난을 받으니까 말이다. 더 많이 참회할 지역은 한 번도 참회하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수많은 인터뷰에서 서양과 동양의 이분화된 수직적 관계가 ‘오리엔탈리즘 구조의 핵심’이라고 말했다(Kennedy, 2011: 51).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이론은 서양과 동양의 수직적 관계를 다루지만, 그것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지리에 입각한 관계 못지않게, ‘인종’에도 입각한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거나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의 기원을 ‘인종적 편견’으로 보았으니까(Kennedy, 2011: 70). 루이스도 사이드의 이론을 정복욕과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이라고 해석했다(Lewis, 1982: 14).
제국주의 시대에 백인종(서양)이 유색인종을 차별하고 깔본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진지한 학자들 중에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학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차별이 사이드가 주장하는 것만큼 강력하거나 팽배했던 것은 결코 아니며, 유색인종과 동양을 체계적으로 타자화하고 무시했던 것도 아니다. 서양인들, 특히 영국의 제국주의자들은 먼 타지에서 자신과 구별되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국적이고 낯설게 여기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게 익숙한 무언가’를 발견했고, 그런 관념을 체계화하기도 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이질성의 동질화(homogenisation of the heterogeneities), 혹은 ‘이국적인 것의 내국화’라고 부르는데, 이를 데이비드 캐너다인의 ‘오너멘탈리즘(Ornamentalism) 이론’이라 부른다(Cannadine, 2001: 10; 이영석, 2019: 18-19 참고).
오너멘탈리즘 이론은 간단하지만, 오리엔탈리즘 이론에 날리는 강력한 일격이다. 즉, 동양(과 유색인종)을 ‘타자화’했다는 사이드의 주장과 달리, 동양이 갖는 이질감 못지않게 ‘동질감’이나 ‘유사성’도 서양(과 백인종)에게 무척 중요했다는 것이다. 식민지에 진출한 영국인들은 식민지 사회가 제국의 영국 사회와 모종의 공통점이 있으리라는 전제 위에, 낯익은 요소들을 찾아내고 자신들의 용어로 이름을 붙여 체계화를 시도했다(Cannadine, 2001: 10). 영국인들이 먼 타지에서 찾아낸 유사성이란 ‘엄격히 서열화된 위계질서’였다. 이국 사회도 자국 사회처럼 신분과 계급에 따라 계층화된 곳이었다. 생김새와 명칭은 달라도, 마하라자·셰이크·아미르·파샤와 토후·족장·추장은 영국의 지배계급과 “맞먹는” 자들이었고, 따라서 존경과 존중을 받았다.
중요한 것은 지리나 인종이 아니었다. 바로 ‘사회적 신분’이었다. 왕들은 다른 왕과 함께 있을 때, 귀족들은 토착 귀족들과 함께 있을 때, 엘리트들은 현지 엘리트들과 동석할 때 ‘편함’과 ‘친숙함’을 느꼈다. 심지어 점차 평등해지고 대중민주주의가 확산되는 자국 사회보다, 봉건적 위계질서가 여전히 살아있고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존재하는 식민지 사회를 사랑하고 그것에 반한 “진정한 오리엔탈리스트들”도 결코 소수는 아니었다. 식민지의 위계질서가 그토록 사랑받았던 이유는, 그것이 이국적이고 이색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본국에서 잃어버린 서열화된 위계적 관계와 유사했기 (혹은 그렇게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따금씩 댈하우지 후작처럼 동양의 문화를 파괴하고 근대화를 시도하려던 식민지 총독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식민지 관료들, 특히 제국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총독들과 관료들 중 상당수가 식민지 사회에서 국왕·귀족·대지주·소지주·서민·하인으로 이어지는 위계의 거미줄을 찾았고, 그것에서 익숙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Cannadine, 2001: 4). 나이지리아 총독 루가드가 “진정으로 중요한 범주는 신분이었으며,” 신분이 “다른 모든 범주의 토대(fundamental to all other categories)”였다고 강조했던 것처럼, 이는 비밀이 아닌 공공연한 현상이었다(Cannadine, 2001: 124).
가장 좋은 예는 하와이의 왕 칼라카우아(Kalakaua)의 1881년 런던 방문이다. 당시 그는 스펜서 여사가 개최한 성대한 파티에 초대를 받았는데, 당시 연회장엔 영국의 에드워드 왕세자와 독일의 황태자도 있었다. 에드워드는 하와이의 왕을 보고 그가 ‘왕’이라면 왕세자보다 손윗사람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독일 황태자가 이에 분개하자, 에드워드는 이렇게 대꾸했다. “저 자가 왕이 아니라면, 그저 평범한 깜둥이에 불과할 텐데, 그렇다면 그런 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Cannadine, 2001: 8에서 재인용)?” 에드워드의 왕세자의 이런 발언은 “세련된” 현대인들의 귀엔 대단히 거슬리는 인종주의적 발언일 것이다. 그러나 시대를 고려한다면, 사실 이는 대단히 ‘비인종적인’ 언사였다. 에드워드는 인종에 앞서 ‘신분’을 먼저 고려했던 것이다. 설령 그가 흑인이라 할지라도, 그는 왕세자보다 높은 왕이었다. 영국제국의 초대양적인 상호교류 체제는 (인종보다는) 신분과 계급에 구속된 체제였으며, 이른바 ‘귀족적 국제주의’가 지배하던 문화권이었다. 이런 계급적 연대는 피부색을 초월할 수 있었다(Cannadine, 2001: 6; 9).
영국제국에선 신분이 낮은 영국인보다 신분이 높은 외국인이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 영국의 자치령들, 즉 캐나다와 호주의 정착민들은 때론 영국 사회에서 밀려난 패배자들로 가득한 곳처럼 간주되었다. 죄수들과 그 자손들, 빈민가 뒷골목에서 내몰린 가난한 잉여 인구, 실패한 전문직 종사자들, 채무와 추문에 시달린 몰락한 귀족 등, 영국 본토인들이 보기에 식민지의 백인들은 제자리를 찾지도 차지하지도 지켜내지도 못한 뿌리 없이 쫓겨난 소외된 사람들에 불과했다. 제아무리 백인이라 할지라도, 이들은 가난한 백인, 혹은 이른바 “백인 쓰레기(white trash)”에 다름 아니었다. 이에 비해, 중동의 셰이크들과 아미르들은 위풍당당한 군주였으며, 위계의 정점에 선 더 나은 자들인 “검은 황금(black gold)”로 대우받았다(Cannadine, 2001: 125).
캐너다인이 “이제 우리는 오리엔탈리즘을 재정립해야(reorient) 한다(Cannadine, 2001: 125).”고 썼던 것처럼, ‘이국적인 것의 내국화(오너멘탈리즘)’는 오리엔탈리즘에 날리는 강력한 일격이다. 서양이 일방적으로 동양을 타자로 만들어 배척하고 열등하게 취급함으로써, 그것에 반대되는 우월함의 이미지를 취할 수 있었다는 사이드의 이론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캐너다인은 인종에 대한 차별적 시선과 타자화가 존재했음을 선뜻 인정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사이드의 이론이 간과한 부분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신분에 따른 서열이 인종적 서열보다 훨씬 중요했음을 (사이드 못지않은) 수많은 문헌 조사를 통해 밝혀냈다. 사이드가 살아있었다면, 이론화된 오너멘탈리즘을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강력한 적수로 판단하지 않았을까?
사이드는 마치 오리엔탈리즘 현상, 곧 서양이 동양을 바라본 방식이 어디서든지 동일한 것처럼 가정한다. 다시 말해, 서양이 동양을 바라보던 방식이 체계화되고 일관적인 레퍼토리를 따랐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인용하듯’ 대동소이했다는 전제 위에 오리엔탈리즘 논의를 전개했다. 이는 그가 언제나 개인의 다양성과 관용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론 오리엔탈리스트들 사이의 개인적 차이보단 그들이 공유하고 있던 동양이 열등하고 미개하다는 인식의 폭력에 더 초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Kennedy, 2011: 90).
하지만 다른 모든 인식이나 관점이 그러하듯, 서양인의 동양관도 무척 다양했다.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스트 정치인의 전형으로 언급한 조지 커즌의 경우를 보자(Said, 1991: 346-349). 그는 일본인은 근면한 인종이라고 칭송한 반면, 조선인은 게으른 인종이라고 깎아내렸다(박지향, 2003: 104). 이때 제국주의적·폭력적·자아도취적 인식, 즉 오리엔탈리즘은 어떻게 작용한 것일까? 어째서 커즌은 두 동양 국가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한 것일까? 더불어 커즌은 서양 문명을 답습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을 높이 산 반면, 이자벨라 버드 비숍은 서양 문명을 모방하는 일을 반대했다(박지향, 2003: 112). 이때 그들의 오리엔탈리즘은 어떻게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일까? 사이드는 이런 지적 난제를 풀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단지 잠재적(latent) 오리엔탈리즘과 드러난(manifest) 오리엔탈리즘으로 구분했을 뿐이다(Said, 1991: 제3부 1장 참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종국엔 ‘서로 다른 인식들이 동양을 열등하게 바라보는 단일한 인식(오리엔탈리즘)으로 수렴’될 뿐이다.
실제로 버나드 포터는 『무의식적 제국주의자들(The Absent-Minded Imperialist, 2006)』에서 방대한 문헌 연구를 통해, 사이드가 서양의 동양관을 단일한 것으로 너무나 손쉽게 가정했음을 보여주었다(Porter, 2006: 19).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 이론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를 간과했다. 첫째, 19세기 영국인들 중 제국에 관심이 있던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다시 말해, 사이드는 마치 영국이 (혹은 프랑스가) 일정한 오리엔탈리즘적 인식을 품었으리라 전제했지만, 실상 영국에서 ‘제국주의자’로 책잡힐 수 있는 자들은 극히 소수였다는 것이다. 영국인들 대다수는 제국에 무관심했으며, 관심이 있더라도 대개는 친지나 친구들이 이주한 백인 자치령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다(Porter, 2006: 140 참고). 19세기 말로 치닫을수록 영국 사회에 제국주의적 분위기가 격양된 것은 맞지만, 그런 분위기 또한 보어 전쟁이라는 단발적인 사건에 연동된 것이었고, 그마저도 종전 직후 빠르게 시들었으며(Porter, 2006: 213), 제국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이라 할 수 있는 것도 동양에 대한 타자화가 아닌 애국심과 명예심과 순종심에 관한 것이었다(Porter, 2006: 205).
둘째, 19세기 영국인들이 식민지를 바라보는 방식은 계급별로 상이했다. 특히 인구 대다수를 이룬 노동계급은 가장 ‘비제국주의적’이었다. 노동계급이 주로 읽었던 간행물들은 (애초에 제국의 이야기를 거의 취급하지 않았지만) 종종 식민지의 유색인종들을 같은 억압을 받는 자들로 공감하는 이야기를 담기도 했다(Porter, 2006: 123-131; 227). 영국에서 가장 열렬한 제국주의자들, 즉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가장 부합하는 계층은 전통적인 지배계급인 상류층과 이른바 ‘아웃사이더’였는데, 그중 상류층은 역설적이게도 타문화에 가장 관용적인 계층이기도 했다. 이는 캐너다인의 오너멘탈리즘 이론과도 일맥상통한다. 영국의 전통적인 엘리트들은 식민지의 오래된 위계질서와 관습과 전통을 애호하는 보수주의자로, 타문화에 대한 경멸보단 귀족적 국제주의에 심취했기 때문이다(Porter, 2006: 229; Cannadine, 2001: 8 참고). 반면 아웃사이더들, 즉 자수성가를 통해 지배계급으로 부상한 조지프 체임벌린이나, 영국보다 변방에 친숙했던 세실 로즈, 앨프리드 밀너, 키플링 같은 자들은 “너무나 소수(too few)”였다. 따라서 그들의 시선을 곧장 영국 사회 전체의 동양관으로 일반화하기는 어렵다(Porter, 2006: 232). 이렇듯, 사이드가 마치 지배적이고 일관된 관점처럼 제시했던 오리엔탈리즘은 사실 지배적이지도 일관적이지도 않은 관점이었다.
좌파들은 사이드를 신격화했다. 불편한 진실에도 정직하고 양심적이었던 학자였다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지성과 행동력을 모두 갖춘 보기 드문 영웅이었다고,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하는 정의의 투사였다고 말이다(Kennedy, 2011: 37). 하지만 사이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인간답게 모순이 참 많았다. 동양과 서양에 두루 걸친 그의 배경은 차치하더라도, 자신을 기독교인인 동시에 무신론자라고 말하거나, 오드리 로드의 말처럼 주인의 도구로 주인의 집을 무너뜨리려 하거나, 그에게 양질의 삶과 숱한 연구 기회를 제공한 국가와 사회를 대적으로 삼고 공격했던 것은, 신격화된 영웅의 행실과는 거리가 먼, 다분히 감정적이고 정돈되지 않은 ‘인간적인 행동’이었다. 물론 평생 좌파로 활동하면서도, 평생 롤렉스 시계를 차고 버버리 셔츠를 입었던 모순까지 포함해서(Mishra, 2021).
사이드는 대단히 ‘감정적인’ 학자였다. 감정적인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사이드의 경우 너무나 종종 감정이 판단력을 흐렸다. 특히 자신이 미워하는 것들에 대한 증오심은 지나치게 강렬했다. 한번은 중동학자 버나드 루이스가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Lewis, 1982). 날카롭긴 했지만 그래도 ‘점잖은’ 비판이었다. 학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비판, 또는 학자라면 누구나 감수해야 할 수준의 비판이었다. 하지만 사이드는 이에 격분했다. 사이드의 반론을 직접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감정적으로 반응했는지 쉽게 인지할 수 있다(Said et al, 1982). 그의 분노와 적개심은 텍스트를 뚫고 독자에게 전해진다. 차갑고 이성적인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흥분된 어조와 ‘루이스가 아랍인의 옹호자인 척한다’ 같은 비꼬는 표현과 더불어, 루이스는 양심적인 학자라기보단 ‘로비스트,’ ‘선동가,’ ‘정치적 학자’라는 인격적 무시가 반복된다. (하지만 사이드 자신도 ‘정치적 학자’이지 않았나? 지난 세기의 모든 지성인 중 가장 정치적 활동이 활발했던 지성인이지 않았나? 이스라엘의 남레바논 점령 종료를 기뻐하며 이스라엘 감시초소에 돌을 던진 것은 ‘정치적 제스처’이지 않았나?)
루이스는 자신에 대한 사이드의 반론을 접한 뒤, “분노의 절규와 논쟁하기란 쉽지 않다. (...) 직접적인 인신공격 외에도 사이드 씨의 글은 조롱과 중상, 허세와 암시, 연좌제식 비난”이 뒤섞여 불쾌하다고 답했다. 루이스는 사이드가 제기한 타자성 문제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오리엔탈리즘』이 안타까운 이유는, 이처럼 진지하고 중요한 문제를 취급하면서도 그것을 ‘정치적 논쟁’과 ‘개인에 대한 공격’ 수준으로 격하시켜버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루이스는 사이드가 자신과의 논쟁 또한 철저히 ‘정치화’하려 든다고 안타까워했다(Said et al, 1982).
루이스와의 논쟁에서 알 수 있듯, 사이드의 글은 ‘감정의 과잉’이라는 문제를 지닌다. 나는 만약 에드워드 사이드가 덜 감정적이었다면, 충분히 보다 나은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믿고 애정하던 것에 대한 넘치는 열정과 적으로 간주한 것에 대한 넘치는 증오가 더 온건했더라면, 현실의 복잡성이 그에게 보다 선명하게 보였으리라 나는 믿는다. 내가 앞서 논한 여섯 가지 비판점 중 첫 번째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명백한 것들이었다. 어떤 대단한 통찰력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다. 그가 정치 운동가다운 열정보단 학자다운 태도로 연구를 이어갔더라면, 무시와 폄하와 권력욕이 서양의 동양관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 동양 또한 서양을 열등한 존재로 바라봤다는 사실 정도는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사이드는 그러지 못했다. 서양에 대한 그의 증오심은 서양의 악마화로 이어졌다. 서양은 그에게 한사코 제국주의자였고, 가해자였다. 반면, 동양에 대한 애정과 측은지심은 동양을 무고한 존재, 영원한 피해자로 만들었다. 그런 동양은 잘못할 수 없었으며, 잘못하더라도 궁극적 귀책사유는 (동양을 범죄로 내몬) 서양에 있었다.
나는 본 글에서 여섯 가지 이유를 들어 오리엔탈리즘 이론을 비판했다. 첫째, 사이드는 ‘서양의 기준을 보편적인 기준으로 내세우는 것’과 ‘보편적인 기준을 서양이 소유했다는 것’의 차이를 좀처럼 구분하지 않았다. 그의 글에선 전자에 더 강조점이 놓이며, 서양이 내세우는 기준에 어떤 정당성이 있는지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속주의·정교분리·민주주의·인권·자유·평등을 평생토록 운운했던 것으로 보아, 사이드 자신도 서양이 내세웠던 기준을 보편적 가치로 은밀하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사이드는 방대한 문헌학 연구를 통해 오리엔탈리즘 이론을 집대성했지만, 이미 내린 결론에 도움이 되는 자료들만 취사선택한 수준이었다. 같은 작가와 작품을 논하면서도 ‘특정 발언들’에만 치중한 나머지, 작품의 전체 메시지나 자신의 주장과 정반대되는 묘사를 의도적으로 누락했다. 셋째, 사이드는 서양의 동양관이 낳은 지식의 ‘제국주의적 기능’에 치중한 반면, 저자들의 ‘의도’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정작 기능과 더불어 문헌 저자들의 의도와 인격까지 싸잡아 비판하는 모순을 보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은 동양을 진심으로 흠모한 사람들이었다. 어째서 동양에 대한 헌사를 헌사로 보지 않고, 구태여 은밀한 모욕이나 제국주의적 술수로 바라봐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넷째, 사이드는 동양의 서양관도 서양의 동양관만큼 불공평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못했다. 사이드는 푸코와 달리 권력이 ‘위’에서만 발산된다고 파악했고, 그 ‘위’를 서양에 연동시킴으로써, 서양을 항구적인 권력의 가해자로, 동양을 항구적인 피해자로 간주했다. 하지만 진실은 더욱 복잡했고, 동양 또한 자신의 기준으로 서양을 판단했다. 인도인들과 일본인들은 서양을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빈약한 물신숭배자들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섯 째, 캐너다인에 따르면, 서양은 동양을 타자로 바라보는 동시에, 그들과의 유사점을 찾으려 하는 경향을 보였다. 제국주의자들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인종이나 지리적 구분이 아닌, 신분과 계급적 구분으로, 같은 신분의 유색인종을 아래 신분의 백인종보다 더 친숙하게 여기기도 했다. 다시 말해, 차이 못지않게 닮음도 중요했다는 것이다. 여섯 째, 사이드는 서양인의 동양관이 다양하고 다채로웠다는 사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어째서 같은 동양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한 사람의 기록에서 발견되는지, 어째서 같은 현상에도 상반된 견해가 존재하는지 여전히 미제로 남아있다. 더불어, 버나드 포터에 따르면, 서양의 동양관은 19세기 영국에서조차 동일하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대체로 동양에 무관심했으며, 관점도 계급마다 상이했다. 게다가 ‘가장 제국주의적’으로 분류될 수 있는 집단은 실천적으론 타국과 타문화에 ‘가장 관용적인’ 계층이거나, 한 사회를 대표하기엔 지나치게 수가 적은 소수 집단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 생전에 그와 친분이 있었던 역사학자 데이비드 길모어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사이드는 훌륭한 문학비평가일지 모르나 “역사 연구자로선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그는 과거를 연구할 때면 교조적이고 과도한 일반화에 집착했다. 그는 조사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라, 결론을 먼저 내려놓고 수많은 데이터를 그 결론에 끼워 맞췄다.” 길모어는 사이드가 역사는 결국 수많은 양면성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고, 또 자신의 시대정신으로 과거의 시대정신을 정죄했다고 일갈했다(Gilmour, 2019: 523).
길모어의 평가에서 알 수 있듯, 에드워드 사이드의 근본적인 실수는 그가 비역사학자로서 역사 문제에 지나치게 깊게 파고들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는 역사학적 방법론들에 미숙했다. 그의 역사적 지식도 충분히 균형 잡히지 못했으며, (그가 보여주고 싶은) 한 쪽 면에만 치중되어 있었다. 캐너다인은 탈현대주의 및 탈식민주의 연구자들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피상적인 수준이라고 지적했는데(Cannadine, 2001: xvi), 문학비평가로 출발한 사이드로선, 역사학적 방법론이나 역사서술의 활용에 있어서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감히 나아갔고, 결과적으로 역사학자 마거릿 맥밀런이 ‘나쁜 역사’라 부른 역사를 탄생시켰다. 즉, 역사의 복잡성을 무시한 채 ‘이론적 통일성’만 추구한 역사책을 집필했다(MacMillan, 2009: 57; 230-231). 최근에 타계한 영국의 중동학자 로버트 어윈은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스트들의 국적이나 계급 같은 다양한 정체성과 배경을 무시한 채 단일한 것으로 취급한다고 비판했던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었다(Caines, 2024). 특히 동양을 취급한 수많은 인물들과 관점들을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강력한 이론적 중력 앞에 하나의 ‘제국주의적 프로젝트’로 포장하는 것은, 공통점은 과장하고 차이점은 걸러내는 반역사학적 접근이며, 복잡한 역사의 결을 무시하고 이론적 통일성만을 좇았던 ‘나쁜 역사학’이었던 것이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인문학계의 지형을 바꾼 걸작으로, ‘타자화’ 개념을 제국주의 연구에 도입한 중요한 저술이자, 제국주의 속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면밀히 파헤친 흥미로운 책이다. 그럼에도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이론은 여러 결함을 지니고 있으며, 서양의 동양관과 제국주의의 전체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부분적으로는 그가 중요한 문제에 감정적으로 접근하여 서양과 동양의 관계를 항구적인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전제했기 때문이고, 또 부분적으로는 그가 이론의 통일성을 위해 역사적 사례를 이론에 끼워 맞췄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오리엔탈리즘 이론이 혁신적인 동시에 불완전한, 어쩌면 위험한 고전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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