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의 식민지배 옹호론
여기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년)이다.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현대인들마저 자명한 권리처럼 향유하는 밀의 사상이 있으니, 바로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다.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더 나아가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갈 권리는 밀적 자유주의(Millian Liberalism)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OL, 324 참고). 밀은 자유주의(liberalism)의 사상적 기반을 정립한 철학자로, 자유주의의 정신이자 양심으로 불린다.
하지만 자유주의의 화신이라 불리는 밀이 동시에 (가장 비자유적일) '제국주의(imperialism)'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많은 현대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Tunick, 2006; 2). 밀은 제국주의의 선봉에 서서 영국의 식민지배, 특히 인도 지배를 옹호하고 정당화했다. 관념의 세계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현실 정치 속에서도 그랬다. 심지어 밀은 어려서부터 인도를 정복하고 통치한 영국 동인도회사의 직원으로 일했다. 그것도 정부의 조치로 동인도회사가 해체되는 1858년까지.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자유와 자치의 미덕을 그토록 강조했던 밀이 동시에 타국에 대한 지배와 간섭을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어째서, 밀은 식민지민의 종속을 주장했던 것일까? "다른 사람의 일이 자기 일이나 마찬가지라는 구실 아래, 그 사람을 위한다면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449)."라고 주장한 사람은 밀 본인 아니던가? 도대체 왜 그 철학자는 식민지배를 지지했던 것일까?
물론 밀이 식민지를 체계적으로 착취해 현지 사회를 황폐하게 만드는, 그런 '약탈적 제국주의'를 옹호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경제적 가치로만 이해되는 식민지는 "그저 지배국가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는 목초지나 사육장, 인간 가축 농장에 지나지 않는다(RG, 765)."고 주장하며, 피지배국에 대한 수탈과 착취를 누구보다 강력하게 비난한 것도 그였다. 밀은 이른바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liberal imperialist)"였다. 자유주의적 제국주의라는 개념어는 19세기 후반, 영국의 총리를 지낸 로즈버리 백작(5th Earl of Rosebery, 1847-1929년)이 자유당 내에서 제국주의와 팽창주의를 자유주의 이론에 입각해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처음 파생된 것이지만(Manetna, 2010: 3의 3번 각주 참고), 자유주의 이론에 입각해 제국이 식민지의 문명화(혹은 서구화 및 근대화)를 촉진할 수 있다는 믿음을 토대로 제국적 팽창과 지배를 지지하고 합리화한 사상을 폭넓게 지칭하는 용어다. 밀은 영국제국의 통치가 후진적인 인도의 진보를 도울 수 있다는 이유에서 식민지배를 옹호했던 것이다(Williams, 2018: 7 참고).
그가 유일한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는 아니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아버지이자 밀보다 앞서 동인도회사의 직원으로 일했던 제임스 밀(James Mill, 1773-1836년), T. B. 매콜리(Thomas Babington Macaulay, 1800-1859년, 인도 총독평의회의 법률위원), 리처드 콥든(Richard Cobden, 1804-1864년, 자유무역주의자), 존 브라이트(John Bright, 1811-1889년, 자유무역주의자), 찰스 그랜트(Charles Grant, 1746-1823년, 동인도회사 관료), 찰스 메트칼프(Charles Metcalfe, 1785-1846년, 임시 인도 총독), 존 맬컴(Mountstuart Elphinstone, 1769-1833년, 마드라스 총독), 마운트스튜어트 엘핀스톤(Mountstuart Elphinstone, 1779-1859년, 봄베이 총독), 윌리엄 벤팅크(William Bentinck, 1774-1839년, 인도 총독), 댈하우지 후작(1st Marquess of Dalhousie, 1812-1860년, 인도 총독) 등 많은 출중한 인물들이 자유와 제국을 '동시에' 지지했다.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들은 정복을 위한 정복, 지배를 위한 지배를 반대했다. 그들에 따르면, 식민지배는 오직 식민지의 이해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운영되어야 했다(Taylor, 1991: 12 참고).
밀은 제국주의가 오직 문명의 미래와 항구적 이익을 목표로 할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Williams, 2018: 12 참고). 그런 동시에 밀은 식민지배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반대했다. 뒤쳐진 문명이 진보를 이룩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지 않고 외면하는 것은 "범죄 행위"에 가깝다고 말이다(RG, 762). 밀과 많은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의 나라가 타국을 자국에 종속시키는 이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고, 오직 '피지배민의 문명화'만이 식민지배의 정당한 사유라고 역설했다(Mantena, 2010: 1; 3). 밀에 따르면, 인도 같은 정체된 사회에는 그들을 진보와 계몽의 길로 "안내"할 수 있는 철학적 입법자(philosophical legislator)의 존재가 필수적인데, 영국제국은 그런 역할을 결연하게 떠맡고 몽매한 자들을 계명하는 '선한 제국'이 될 수 있었다(Williams, 2018: 10).
미국의 철학자 에디 수프랑은 이렇게 반문했다. "밀이 누구이기에, 타인의 삶이 잘못되었고, 자애로운 간섭을 받아 마땅하며, [자신의] 문명이 타인에게도 좋을 것이라 확신하는가(Souffrant, 2000: 98-99)?"라고. 수프랑의 감정 섞인 반문에서 알 수 있듯,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밀의 수사는 현대인의 세련된 귀에 상당히 거슬리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그런 밀의 주장을 비판한 지성인이 있었다. 바로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년)이었다.
토크빌은 영국에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존 스튜어트 밀과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지만, 밀과 같은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들의 무지와 위선을 꾸짖는 데 거침없었다. 토크빌이 보기에 제국주의는 강대국의 이기적 욕구의 발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제국주의자에게 '선의'란 어불성설에 불과했다. 토크빌은 특히 영국인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저격했다. 이 선량한 제국주의자들은 다른 나라를 통치하고 지배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대의명분을 내세운다. 수탈과 착취를 일삼는 주제에 피치자들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 지배한다고 스스로를 미화한다. 자신들이 지배하는 인도인들 앞에서나 자기들끼리나 식민지배를 포장하기 위해 각종 미사여구를 남발한다. 토크빌이 보기엔 영국의 인도 지배나 스페인의 남아메리카 지배나 거기서 거기였던 것이다. 고통·빈곤·질병·범죄가 영국의 통치 기간에 꾸준히 증가해왔음에도, 공문서에선 권리와 법치와 문명화를 들먹이는 것은 토크빌이 보기에 혐오스러운 위선에 지나지 않았다. 토크빌이 밀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면서 그를 비난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대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들을 비난했다는 점에서 기수인 밀을 비난한 것과 다름 없었다(서병훈, 2012: 153). 아, 토크빌의 일침은 식민지배를 악으로 전제하는 현대인들의 입맛에 참 달콤하겠다.
다시 존 스튜어트 밀로 돌아오자. 그렇다면 밀은 토크빌의 비난대로 한낱 '위선자'에 불과했을까? 자국에 대해선 자유를 말하고, 타국에 대해선 종속을 옹호했던 밀은 모순적인 인간이었을까? 그의 가치관이 뒤바뀌기라도 했던 것일까? 일단 그의 도덕철학부터 차근차근 살펴보자.
밀은 『자유론(On Liberty)』에서 개인은 다른 개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절대적인 자유권을 누려야 한다는 일명 '자유의 원칙'을 선포했다. 그런 동시에 사람은 '자신의 방식대로(one's own mode)'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천명했다(OL, 320; 324 참고). 밀은 선의의 간섭의 필요성과 개입의 정당성을 모두 부인한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본인의 이익은 자기 자신이 제일 잘 안다(OL, 1장). 밀의 지적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년)이 증세를 통해 국민들의 삶을 도우려는 정부를 겨냥해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자들'이라고 비꼬았듯, 밀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무엇보다 타인의 개입을 일종의 '주제 넘은 행위'로 간주하며, 사람들은 타인에게 무엇이 가장 이익이 되는지 잘 모른다는 상식을 역설한다. 둘째, 사람은 실수하면서 배운다(OL, 3장). 그렇기 때문에 '실수할 기회'마저 소중하다. 아 물론, 주관 없이 남이 시키는대로 살면 덜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주체성과 장기적인 자기발전(self-development)의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 밀은 사람들은 실수를 통해 성장하는 법이므로, 남이 간섭하지 않아 지금 당장 손해나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궁극적으론 그것이 더 유익하다고 역설했다.
여기까지 보면, 밀을 (간접적으로) 위선자로 고발했던 토크빌의 비난이 타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밀은 당대에 '말과 행동이 하나였던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던 인물이었다. 물론 평판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평판이 허투루 쌓이는 일은 드물다. 특히 '고매한 도덕주의자들'의 시대였던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선 말이다. 1865년 자메이카 폭동 당시 영국의 식민정부의 가혹한 진압을 가혹하게 비난했던 것도 바로 밀이었다(Mantena, 2010: 11). 다른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들도 주로 위선과 거리가 먼 신실한 사람들이었다. 밀보다 앞선 세대 일이긴 했지만, 초대 인도 총독이 실정을 이유로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탄핵된 것은 적어도 그들이 위선자가 아니었음을, 그리고 대의명분이 실리만큼 중요했음을 시사한다(Mantena, 2010: 4 참고).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들의 평판을 봐서라도, 시간을 갖고 판단을 유보한 채 밀의 '식민지배 옹호론'을 살펴보자. 밀은 어떻게 자유(자치·자립)와 부자유(제국주의·식민지배)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던 것일까?
사실 그의 자유 이론을 한 층 더 깊이 살펴보면 (자유와 제국의 공존이라는) 모순이 극복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밀은 『자유론』에서 '실수할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선의의 간섭'을 부정하고는 있지만, 자유주의자인 동시에 "공리주의자"였던 그는 자유에 관해서도 '효용(utility)'이 모든 윤리적 문제의 궁극적인 척도가 된다고 선언했다(OL, 321; UT, 44). 즉, 자유도 결국 효용의 문제였던 것이다. 자유는 그 자체로 위대한 권리가 아니었다. 단순히 '좋은 것'이었다. 자유를 추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효용 면에서) 좋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자유보다 더 높은 효용을 주는 것이 자유의 방해를 받는다면, 그 자유는 마땅히 침해당할 수 있었다. 효용을 떠나선 어떤 당위성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공리주의 도덕철학의 정수다.
그렇다면 (밀이 보기에) 자유보다 더한 효용을 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진보'였다. 밀은 『공리주의(Utilitarianism)』에서 『자유론』 속 문제의식을 이어서 풀이했다. 밀은 질적 공리주의론을 펼치면서, 효용은 높은 것과 낮은 것, 이렇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높은 효용 중에서도 자긍심에 바탕을 둔 지적 진보를 '가장 높은 효용'으로 상정했다. 도달 가능한 최선의 상태에 가깝게 진보하는 것, 즉 자기발전과 진보라는 가치는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효용'이었고, 따라서 '최상위 규범'이었다(UT, 2장 참고). 그보다 더 높은 효용은 존재할 수 없었다. 진보의 문제에 있어서 자유는 보다 덜 중요했다. 특히 개인과 개별성을 논하는 『자유론』과 달리 『공리주의』는 개인의 발전에 더해 사회와 사회의 발전을 논하는데, 밀은 그곳에서 사회적 진보라고 할 수 있는 '공영(public prosperity)'을 앞세운다(UT, 40 참고). 다시 말해, 개인의 발전이 개인의 자유보다 중요하듯, 공동체의 발전은 공동체의 자치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정리하자면, 효용은 모든 가치와 윤리적 문제의 '궁극적인 척도'였다. 밀이 자유를 말했던 이유는, 자유가 그 자체로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가 주는 효용 때문이었다. 따라서 자유보다 더 높은 효용을 주는 '진보' 혹은 '자기발전(self-development)'을 위해선 개인과 사회의 자유마저도 침해당할 수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정신적 진보 안에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가능하다는 것이 밀의 생각이었다. 즉, 진정한 자유가 곧 진보였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침범이 가능해지는 '틈'이다. 만약 누군가 스스로 혹은 다른 사람의 정신적 진보를 저해하거나 제한한다면, 혹은 누군가 퇴보를 지향하거나 정체와 타성의 덫에 걸려 도무지 발전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면, 퇴보와 타성을 근절하고 다시 진보에의 물꼬를 터줄 수 있는 선량한 개입은 완전히 정당하다. 제아무리 당사자가 간섭받기 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밀이 보기에, 인도에서 그런 거룩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주체는 영국제국,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당시 인도를 다스리고 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였다(Williams, 2018: 11).
그렇다면 선의의 간섭이 가능해지는 경우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밀은 『자유론』에서 자유의 원리에 대한 중요한 원칙 하나를 제시한다. 자유할 권리는 '오직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이다(OL, 321-322 참고). 자유는 원칙적으로 말해, 자유롭고 평등한 토론에 의해 정신적 진보를 이룰 수 있는 개인에게만 주어진다. 이는 언뜻 보면 건방진 엘리트주의적 발언 같지만, 사실 상식에 가까운 것이다. 이를테면 '미성년자'는 어른이 누리는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은 일정한 수준까지 진보를 이루기 전까지는 어른들로부터 보호(간섭)를 받아야 한다. 미성년자와 마찬가지로 '자치능력을 결여한 자'도 자유를 누릴 수 없고, 간섭받아야 한다. 일생에 어느 수준까지 정신적 진보를 이룬 사람이라 할지라도, 도박이나 알코올 중독 등에 빠져 불결한 위생 상태나 빈곤을 개선할 의지를 상실했다면, 이들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선의의 간섭은 불가피하다. 이들은 제 도박과 술의 '노예'다. 애초에 자유롭지도 않기 때문에, 침해 당할 자유도 없다. 밀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과 중독자들은 "자신의 행동에 따른 결과로부터도 보호받아야 마땅하다(OL, 320)."라고.
이제 위 논리를 개인(미성년자나 알코올 중독자)이 아닌, 공동체나 국가에 적용해 보자. 밀이 보기에 인도는 어린 아이와 같았다(OL, 320; Williams, 2018: 9 참고). 항구적인 분열과 무질서 속에 자치능력을 결여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이런 '후진적 사회(backward state)'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수준까지 정신적 진보를 이루지 못한 자들이었다. 영국과 같은 '어른'이 발벗고 나서서 인도처럼 홀로 서지 못하는 미성숙한 사회가 정신적 진보를 이룰 수 있도록 간섭하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는 것, 이것이 제국주의와 식민지배를 옹호했던 밀의 논리였던 것이다. 밀은 어린 아이와 알코올 중독자 같은 자유할 권리가 없는 자들 사이에 '미개한 사회에 사는 미개인들'도 끼워넣었다(OL, 320).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유아가 어른이 되는 것처럼, 인도도 시간이 지나면 자체적으로 진보하는 것 아니냐고. 밀은 자유를 향한 진보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서, 이른바 '자유주의의 보편적 내재론'을 반대했다(Williams, 2018: 3).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는 독자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너무 커서 그것을 극복할 방도를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수수방관 한다고 반드시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구원의 손길은 '외부에서' 와야 했다. 영국제국의 임무는 아크바르(Akbar the Great, 1542-1605년)나 샤를마뉴(Charlemagne, ?-814)처럼 계몽적이고 자애로운 통치를 통해 딱할 정도로 원시적이고 미개한 인도 사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지적 기반'을 설치하고 양육하는 일이었다(OL, 320; 405; RG, 477; 546; 762 참고). 스페인의 역사학자 조셉 폰타나는 식민지의 '원시성'에서 (혹은 그렇게 간주하는 것으로부터) 제국주의가 탄생한다고 주장했는데(Fontana, 1999: 211),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가 그 전형적인 예시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간섭이 무차별적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자유론』은 선의의 간섭을 두 가지 차원으로 분류했다(OL, 438-438; 447). 첫째, 이성적 판단이 어려운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약한 간섭'이다. 예를 들어, 곧 무너질 것 같은 다리를 어떤 사람이 모르고 건너려고 할 때 그 사람의 걸음을 제지하는 것은 정당하다. 자유란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행하는 것인데, 아무도 강물에 빠지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자유롭지 않을 자유를 불허하는 '강한 간섭'이다. 밀에 따르면, 스스로를 노예로 파는 계약은 무효다. 자유의 목적을 스스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예는 이제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로울 때 누리는 이점과 효용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다. 자유의 원칙은 자유롭지 않을 자유까지 허용하지 않는다(서병훈, 2012: 158 참고). 사람은 반드시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자유롭지 않은 자는 자유로워야 한다.
이런 '간섭의 원리'를 영국의 인도 지배에 적용해보면, 왜 존 스튜어트 밀이 식민지배를 지지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밀이 보기에 인도는 무질서와 분열 속에 진보가 정체된 사회였다. 중앙정부는 통치력을 상실했고, 깡패와 다름없는 자들이 아대륙을 할거하고 있었다. 밀이 보기에 인도가 더이상 스스로 자립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었다. 인도인들도 자유를 누릴 수 없는 딱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사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린 아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섭받아야 하는 것처럼, 인도는 간섭받아야 했다. 스스로 미개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면, 인도는 앞서 진보를 이룩한 자들에게 선의의 개입을 요철할 지적 의무가 주어진다. 스스로 미개하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영국은 발벗고 나서서 그들이 미개하다는 사실부터 알려줘야 한다. 그것이 영국 같은 진보한 제국의 '의무'였다. 미개한 사회에게 다른 선택권은 없다. 정신적으로 부자유할 권리, 즉 노예로 남을 권리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개입을 거부할 근거도 권리도 인도에겐 없다. 뒤로 가는 열차를 탔으면, 혹은 고장나서 더 이상 앞으로 가지 않는 열차에 있다면, 다시 앞으로 가는 열차에 탑승해야 한다. 그 열차의 기관사가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자유롭지 않다면 강제로라도 자유로워야 한다. 이른바 루소의 역설이다.
혹자는 밀에게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국경을 초월한 개입은 지나친 것 아니냐고. 그토록 진보가 좋고 그토록 자유가 좋으면, 너희들끼리나 즐기라고. 하지만 밀에게 진보와 자유는 민족이니 주권이니 구경 같은 것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일종의 주권 침해라 볼 수 있는) 어른이 아이의 삶에 개입할 수 있다면, 어른인 영국이 유아인 인도 사회에 개입하는 것도 용인되어야 한다. 밀의 공리주의엔 국경이 없다. 정체된 인간의 자기발전을 촉진할 수 있다면 선의의 개입이 가능하다. 설령 그것이 제국주의적 개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밀은 이런 연유로, 공리주의 철학에 입각해 대외적 간섭을 정당화한 최초의 이론가로 불린다(Souffrant, 2000: 3-5).
그래, 일단 성숙한 사회는 미개한 사회에 개입할 수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인도는 선의의 간섭을 받아야 할만큼 미개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인도는 정말 자애로운 식민지배를 받아야 할만큼 후진적이고 정체된 사회였을까?
밀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이 정립했던 '4단계 문명발전론'을 신봉했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년)과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년)에 따르면, 역사는 '수렵-목축-농업-상업'이라는 네 단계를 거치며 발전한다. 그리고 각 단계에 따라 야만과 미개와 문명이 태동하는데, 흄은 상업이 만개한 서유럽만이 가장 문명화된 상태라고 생각했다. 스미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검은 아프리카와 북아메리카의 미개한 수렵채집인들은 1단계에,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은 2단계에, 대부분의 동양 국가들은 농업 단계(혹은 봉건적 단계)인 3단계에 머물고 있는 반면, 오직 서유럽만이 유일하게 4단계까지 개화되었다고 믿었다(Fontana, 1999: 237). 달리 말해, 밀은 영국은 인도보다 진보한 국가임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게 '진보(progress)'와 '문명(civilisation)'은 사실상 동의어였기 때문이다(Williams, 2018: 8).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밀은 인간이 제 본능을 극복하는 것을 문명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들은 대부분 인간이 본능을 이겨내고 스스로를 통제한 데서 비롯된다. 밀은 사람이 본능을 억제함으로써 산출한 진보의 구체적 증거를 '경제적 발전,' '인구의 밀집,' '법의 통치,' '사회적 협업의 증가,' '개인의 독립성'으로 보았으며, 특히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사적 감정을 배제하고, 자의지를 따르는 정부가 아닌 '법의 지배'를 받는 사회를 문명화된 사회라고 생각했다(Williams, 2018: 8-9; 12-13 참고). 밀은 여러 방면에서 영국 사회를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영국은 위 척도에서 모두 우수한, "세계에서 가장 문명이 발달했고, 가장 강대한 나라이며, 나아가 가장 부유하고 가장 자유로운 나라(RG, 740)"라는 믿음엔 변함이 없었다.
반면 인도는 이런 문명화된 사회의 조건들을 충족하지 못했다. 불합격이었다. 밀은 아시아 국가들은 '관습의 폭정' 때문에 진보가 멈춰버렸으며, 개인의 독립성이 죽어버려 개인의 독립성이 낳는 창조적 발전이 부재하다고 생각했다(OL, 403-404). 게다가 인도는 고립된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고, 타인에 대한 배려나 협업이 부족하기 때문에, 문명국은 물론 공동체도 형성하지 못했다고 믿었으며, 진보를 이룩할 기본 요건도 부족하기 때문에, 외부의 간섭을 받아야 마땅했다. 밀은 특히 인도의 유아살해 관습, 조직화된 강도 집단인 타기(thaggi, 깡패를 뜻하는 'thug'의 어원), 과부를 산 채로 화장하는 사티(sati), 해코지를 당하고 타인에게 분풀이하는 관습인 트라가(thragga)를 극도로 혐오했다(Tunick, 2006: 16). 이 모든 인도의 악습들은 밀이 보기에 영국의 개입을 초대하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오직 밀만 인도를 후진적이고 미개한 곳으로 바라봤던 것은 아니다. 특히 영국 국내외에서 사회개혁에 관심이 많았던 복음주의자들과 공리주의자들은 인도를 타락하고 야만적인 곳으로 바라보았으며, 제도부터 개혁해야 한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복음주의자인 동시에 동인도회사 직원이었던 찰스 그랜트는 1797년에 『영국령 아시아 사회에 관한 고찰(Observations on the State of Society among the Asiatic Subjects of Great Britain)』를 통해 인도는 정체되어 있고 미신적인 사회라고 주장하면서 여러 개혁의 시급성을 논했다. 밀의 아버지이자 저명한 공리주의자였던 제임스 밀은 1817년에 『영령인도의 역사(The History of British India)』를 출간하여 '인도 문명'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제임스 밀의 저서는 기존의 동방 문명에 대한 열정과 애호를 경멸과 환멸로 바꿔놓았으며, 영국에서 인도 개혁에의 열의를 불러일으켰다(Mantena, 2010: 5-6). 인도 총독평의회 법률위원이었던 T. B. 매콜리 또한 저 '악명 높은' 「인도 교육에 대한 의견서(Minutes on Education in India)」를 통해 인도 문학과 학문의 저열함을 조롱했다. "우리가 건전한 철학과 진정한 역사 교육을 베풀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의 예산을 들여 영국의 말발굽 수리공도 부끄러워할 수준의 의학, 영국 여학교 소녀들도 비웃을 법한 천문학, 키가 30피트에 달하는 왕들이 3만 년 동안 통치했다고 가르치는 역사학, 설탕 시럽과 버터로 이루어진 바다가 등장하는 지리학을 과연 세금으로 떠받들어야 합니까(Macaulay, 1972: 242-243)?"
심지어 식민지배에 원칙적으로 반대했던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년)마저 인도의 후진성을 개탄하고 진보의 가능성을 의심했다. "만약 자유의 나무를 거기에 심는다면, 그 나무가 자랄까? 과연 인권선언문이 산스크리트어로 번역될까?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사·수드라·하리잔이 동등한 입장에서 만나게 될까? 만약 아니라면, 여러분은 그들을 스스로에게 맡겨 두기가 약간 어렵다고 느낄 것이다." "영국 연대들이 영국령 인도에서 철수한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면에서 혹은 얼마만큼 힌두교도나 이슬람교도에게 이익이 되겠는가(강준호, 2009: 127에서 재인용)?" 타인의 종속을 지적으론 거부하면서도, 심정적으론 영국의 지배가 더 이득이 되지 않을까 고심했던 것이다.
누군가는 여기서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그렇다, 인도는 영국에 비해 후진적이었다. 어쩌면 영국의 개입은 정당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왜 영국의 제국주의자들은 영국에서처럼 대의민주주의가 아닌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인 정부를 구축했는가? 식민지의 진보를 위해 지배한다고 주장하면서, 왜 그토록 후진적인 정부 체제를 유지하는 것인가?
밀은 이렇게 대답했다. 인도 같은 후진적인 사회에 성숙한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하는 그야말로 '시기상조'라고. 밀은 『대의정부론(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에 "정부의 올바른 기능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고 각각의 사회 상태에 따라" 다르며 "선진 사회보다는 발전이 뒤쳐진 사회 상태의 정부가 해야 할 일이 훨씬 많다(RG, 488)."고 썼다. 쉽게 말해, 모든 국가가 같은 단계에 도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계마다 '상이한'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밀은 제도란 사람의 수준에 맞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른바 '제도적 보편주의'에 반대했다(RG, 482; Mantena, 2010; 8; Williams, 2018: 10 참고). 밀이 보기에, 자유와 도덕적 평등과 이성 같은 것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경험적으로 조건지어지는 것이므로, 누구나 과정을 생략한 채 즉각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밀은 문명의 발달과 개개인의 지적 수준의 향상을 연동시켰다. 대의민주정이 최선의 정부인 것은 맞다. 그러나 대의민주정에 상응하는 인간의 지적 발전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RG, 761-762). 국민의 수준이 저급하면, 민주정은 필연적으로 '중우정(衆愚政)'으로 타락한다. 따라서 인도에 필요한 정부는 (인도인들의 지적 수준에 부합하는) 권위주의 정부이지, 영국과 같은 대의정부가 아니다. 밀이 제국주의적 개입을 비난하고 식민지들을 당장 해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제러미 벤담을 강력하게 비난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강준호, 2009: 133). 밀은 벤담이 역사적으로 몰상식해, 문명인과 야만인을 구분하지 않아 자유주의의 원칙을 (식민지의) 지적 수준과 무관하게 동일하게 적용하는 폐단을 낳았다고 생각했다(Mantena, 2010: 9). 하지만 이렇게 밀은 차별적 제도의 필요성을 논하면서, 문명과 야만의 대비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자체적 문명화가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매우 어려워 보이게 만들었다(Mantena, 2010; 9-10). 그럼에도 그는 믿었다. 언젠가 그들도 영국과 프랑스처럼 대의민주주의가 '합당한' 수준까지 진보하리라고(RG, 504). (물론 영국의 식민지배에 힘입어.)
정리하자면, 밀은 당시 유행하던 '4단계 문명발전론'과 '차별적 제도의 필요성'으로 영국의 인도 지배를 더욱 정당화할 수 있었다. 문명발전론은 영국의 선진성과 인도의 후진성을 "과학적으로" 증명했고, 정치적으로나 지적으로나 4단계까지 진보한 영국인들은 1-3단계에 머물러 있는 다른 사회에 선의의 개입을 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개입할 수 있다'가 아니라 '개입해야만 한다'에 가까웠다. 특정 사회는 절로 상위 단계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었고, 항구적으로 한 단계에 머물거나 오히려 퇴보할 수도 있었다. 영국이 시급하게 개입하지 않거나, 벤담이 원하는대로 식민지를 모두 해방시켜버린다면, 인도는 지금보다 더 저열한 단계로 퇴보할 수도 있다는 것이 밀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꼭 외국의 힘을 빌려야만 할까? 인도에서 아크바르 대제 같은 '계몽군주'가 등장하여 자국을 진보의 길로 이끌 수 있는 것 아닐까? 한번 아크바르 같은 지도자가 나왔다면, 또 다시 나오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물론 엄밀히 말하면 아크바르 또한 이방인이다.) 밀은 이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스스로 진보를 이룩할 능력이 없는 민족에게는 좋은 독재자를 만나는 것이 문명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거의 유일한 희망이 된다. 문제는 그 사회 자체로부터 좋은 독재자를 찾는 것이 매우 힘들고, 있다 하더라도 일시적이 효과를 내는 데 그친다는 점이다(RG, 762)." 즉, 능력을 갖춘 지도자가 '선의의 독재'를 휘두르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미개한 사회에선 그런 '출중한 동시에 선량한' 독재자가 꾸준히 배출되는 일이 대단히 어렵다고 역설한 것이다. 외국의 지배를 받지 않고도 진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어렵고 불확실한 일이다.
밀에 따르면, 여러 불가피한 해악에도 불구하고, 보다 발전된 외국 정부의 지배를 받는 것이 해당 사회의 사람들에게 매우 큰 이익을 줄 수 있다. 미개한 나라를 등에 짊어진 채 낯선 길을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현지 독재자와 달리, 외국의 문명국들은 이미 그 낯선 길을 지나쳐왔다. 이미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에 어떤 길이 지름길이고, 어떤 길이 도랑으로 빠지는 길인지 알고 있다. 식민지배는 식민지가 여러 발전 단계를 신속하게 밟도록 도와주고, 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걸림돌들도 넘어갈 수 있게 해준다(RG, 546). 결국 선량한 독재, 그것도 선량한 "외국"의 독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다른 근거도 있었다. 밀은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간섭'이라는 논리도 펼쳤다. 문명국이 다른 문명국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지만, 이미 사회와 개인의 자유가 외부로부터 억압받고 주권이 침해당한 상황에선, 해당 간섭을 물리치기 위한 간섭(counter-intervention)은 언제나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는 인도 지배 논리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영국이 인도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른바 "인도인들"은 이미 여러 강압적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인도라는 단일국가는 사실 단 한 번도 존재했던 적이 없었다. '인도(India)'라는 명칭은 어디까지나 시베리아나 한반도 같은 지리적 표현에 불과했다. 영국은 엄밀히 말해 인도인들로부터 주권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무굴제국'이라는 (인도 입장에선) 또 다른 외부 세력을 대체한 것이었다. 무굴제국의 후진적인 간섭과 인도 사회 위계의 정점을 차지하면서 정신적 수탈을 일삼고 있는 브라만 계급의 퇴보적 간섭을 방지하기 위한 선의의 간섭은 밀이 보기에 완전히 정당했다(Tunick, 2006: 14). 게다가 영국의 "정당한" 개입은 기존의 간섭을 제거할 뿐 아니라, 잠재적인 외부의 간섭마저 배제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영국의 식민지배는 비민주적이거나 늘 대외팽창의 야심에 젖어 있거나 평화를 파괴할 위험이 있는 외국의 공세적 태도를 사전에 차단하여 방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RG, 759).
저 아름다운 선의의 간섭에도 '제약'은 있다. 이미 여러 차례 암시되긴 했지만, "솔론이나 피타쿠스처럼 국민의 자유를 짓밟는 걸림돌을 제거할 용도로만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자가 아니라면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RG, 520-521)."는 것이 밀의 생각이었다. 다시 말해, 제국의 전제정은 오직 식민지의 '문명화'와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Tunick, 2006: 3; 6; 7). 예일대학교의 카우라 만테나 교수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들의 가장 흥미로운 특징 중 하나는, '정복'에서 오는 통치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남을 무력으로 정복했다고 해서, 군사력으로 제압했다고 해서 정복자의 지배가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타인의 진보함과 자유함을 도울 때 타인을 통치할 수 있는 도덕적 정당성이 주어진다(Mantena, 2010: 7; 16). 애초에 제국에게 '개입'이라는 초대장을 발부한 것도 그것들의 '결여'였기 때문이다. 결여가 개입을 불렀으니, 개입자는 결여의 충족자가 되어야 했다. 그런 지배에도 '실리'가 있을 수 있다. '이득'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영국제국이 식민지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종의 이익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연의 산물이자 지엽적인 것으로 보아야 했다. 밀은 1858년에 동인도회사 존속을 호소하는 의회 청원에서 "인도인들에 대한 봉사가 제일의 의무"라고 연설했는데, 이를 달리 말하면, 영국의 이익이 아닌 오직 인도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배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Tunick, 2006: 13). 설령 영국에게 득보다 실이 클지라도, 비용이 이익을 압도할지라도. 그 도덕적 의무만이 과거에 자행된 정복이나 약탈에 대한 참회였다(Mantena, 2010: 7).
주권과 독립은 소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주권과 독립이라는 것이 해당 공동체에게 심각한 해악을 초래하고, 그 결과가 긍정적일 수 없다고 판단된다면, 주권국의 독립을 분쇄하고 개입하는 것이 문명국의 의무가 된다. 그리고 식민지배를 포기하고 미개한 사회를 방임하는 것은, 어른이 아이를 돌보지 않는 것처럼 "범죄"가 된다. "지배자들이 아무 시도도 하지 않는 것은 그런 국민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극단적으로 외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이 그런 목표를 겨냥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범죄 행위에 가깝다. 야심과 탐욕에 눈이 어두워 오랜 시간에 걸쳐 인류의 운명을 나락으로 몰아넣었던 이기적 약탈자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RG, 762)."
밀이 제국주의적 통치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개화를 돕는 제국에도 유의사항은 많았다. 밀은 식민지에 진출한 민간인들이 자행하는 개별적 착취나 범죄나 근시안적 이기심을 우려했다. 영국 정부가 파견하는 '정부 관료'에 의한 직접통치도 좋게 보지 않았다. 현지 사정에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밀이 가장 높게 평가한 지배 형태는 자신이 평생 근무했던 동인도회사의 시스템이었다. 동인도회사의 직원들은 전문 지식과 기술을 겸비했으며, 식민지에서 지적 진보를 도모하는 데 헌신할 열정과 사명감을 갖춘 진정한 '철학적 입법자들(philosophical legislators)'이었다. 그들의 뛰어난 안목은 선량한 식민 지배에 필수적이었다. 밀은 동인도회사를 기술과 능력 위주로 무장해 사심 없이 일하는 우수한 관료제의 전형으로 보았다.
밀은 (인도를 정복하고 통치하는) 동인도회사가 선량한 힘이 무굴제국과 토후들과 브라만보다 더 나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믿었다. 무굴제국은 후진적인 동양식 전제국가다. 토착 군주들은 나태하다. 브라만 계급은 (윈스턴 처칠의 표현을 빌리자면) "6,000만 명의 동포들을 '불가촉천민'이라고 부르며 수천 년 동안 억압해 온 사람들(박지향, 2023: 297)에서 재인용)"이었다. 서구적 관념과 사상으로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토양을 건설하는 것이 영국제국의 위대한 사명이었다. 밀은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이룬 의학과 교육의 진보, 여권의 신장, 여러 악습의 폐지, 근대화 정책을 거론하면서, 동인도회사의 진정성 짙은 선의를 예증했다. 동인도회사는 "진보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기본 원리 아래 작동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예시한 것들은 이 정부가 이룩한 혁혁한 성과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환경이 훨씬 나은 어떤 정부도 현지 주민들의 복리를 위해 인도 정부만큼 노력하지 않았다. (...) 이런 성과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권리가 있는 것이다(서병훈, 2012: 165에서 재인용).”
밀은 심지어 "영국 정부보다"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더 잘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동인도회사의 직원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현지인들의 감정과 사정에 밝고 외국 통치에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갖췄다. 정부 기관도 아니기 때문에 본국 정치의 알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반면 지구 반대편에서 통치하는 영국의 정치인들은 인도의 이해가 아닌 영국의 이해를 좇을 것이다. 인도에 대해 무지한 장관이 임명될 것이고, 업무를 숙달하기도 전에 당리당략에 따라 직무를 옮기거나 사임하게 될 것이다(BG, 200; RG, 770).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정치인들은 토착민들의 문제에 공정할 수 없을 것이고, 그들의 정당한 감정조차 예전만큼 존중받지 못할 것이다(PT, 110; 113). 밀은 (동인도회사를 통한 간접통치가 아닌) 영국 정부의 직접통치가 무굴이나 브라만들의 지배처럼 현지 사정에 무심하고 지배를 위한 지배를 펼칠까 우려했다(Tunick, 2006: 1; Williams, 2018: 11 참고).
"위선일까, 순진함일까?" 경희대학교의 강준호 교수는 이렇게 물었다(2009: 137). 그는 「인도주의적 간섭과 고전적 공리주의자들: 제국주의의 도덕성에 대한 벤담과 밀의 입장의 비교연구」라는 논문에서 자유주의의 화신인 존 스튜어트 밀의 식민지배 옹호를 '위선'으로 해석했다. 저 모든 거룩하고 결연하고 달달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합리적'인 것이 아닌 '합리화'에 불과했고, '정당한' 것이 아닌 '정당화'일 뿐이었다. 제국주의는 본질상 자유의 침해이다. 자유를 침해할 뿐 아니라, 부자유를 계속해서 강화하게 된다. 이를 몰랐다면 멍청한 놈이고, 알았다면 사악한 놈일 텐데, 밀 같은 천재가 멍청할리는 없으니, 사악하다고 할 수 있겠다.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계속해서 밀의 논증을 풀어 설명했듯, 밀은 결코 위선자가 아니었다.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들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한심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정책을 밀어붙여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조롱과 비웃음을 살지언정, 말과 행동이 다른 자들은 아니었다. (과연 누가 저 곧고 위대한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Gladstone, 1809-1898년)더러 '위선자'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존 스튜어트 밀과 제임스 밀 부자는 영국의 인도 지배의 몇몇 폐단들을 잘 알고 있었다. 제임스 밀은 영국의 인도 지배 및 기존의 식민화 정책이 귀족 등 기득권 계급만 이롭게 한다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럼에도 제임스 밀이 식민지배를 지지했던 이유는 오직 인도인들을 위해서였다. 영국의 사악한 기득권층이 이득을 챙기겠지만, 인도인들이 보는 득이 더 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영국이 나서서 인도를 개화해야 한다는 제임스 밀의 신념은 확고하다 못해 하나의 신앙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는 "휴가를 가고 싶어도, 수많은 인도 사람들의 행복과 고통이 자기 손에 달려 있는 걸 생각하면 단 하루도 편히 쉴 수 없다(서병훈, 2012: 166에서 재인용)."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는 낙후된 인도를 개선하는 사업에 진심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도 아버지와 비슷했다. 밀이 보기에 영국이 식민지를 거느린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특별히 이득을 볼 것이 없었고, 전쟁과 방위 비용 때문이라도 영국의 번영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서병훈, 2012: 166). 20세기가 되어야 제기된 '식민지의 낮은 경제성' 문제를 19세기에 통찰해낸 것이었다. 그럼에도 밀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식민지배의 비용이 클지라도 인도인들의 진보를 위해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밀이 품은 믿음의 현실성을 떠나, 많은 사람들은 밀의 진정성만큼은 높이 샀다. 밀은 양심적으로 피치자들의 이익을 추구했다. 그리고 영국(동인도회사)의 인도 지배가 그 의도와 결과 양 측면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강준호 교수의 생각과 다르게, 밀의 도덕철학과 제국주의는 (앞서 보았듯) 사실 필연적인 수준이다. 대부분의 (혹은 모든) 도덕철학이 그렇듯,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도 일종의 보편주의를 지향한다. 영국에게 옳은 것은 인도에게도 옳은 것이고, 영국인에게 좋은 것은 인도인에게도 좋은 것이다. 국경이 없다. 만약 개인과 사회의 진보라는 것이 "가장 높은 효용"이고 "최상위 규범"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영국은 문명국으로서 가장 높은 단계의 진보를 이뤄냈다. 따라서 그렇지 못해 퇴보하고 정체된 지역의 진보와 발전에 헌실한 책임이 문명국에게 있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미국과 영국 등 인권 선진국들이 노예제도를 유지하거나 여성을 극도로 차별하는 인권 후진국들을 비난하고 이따금씩 간섭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들이 믿는 인권은 지역적인 것이 아닌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밀의 식민지배 옹호론은 오히려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서병훈, 2012: 165). 도덕적 보편주의와 개입주의 사이엔 모종의 필연성이 있다.
물론 밀의 논증에도 여러 결함들이 존재한다. 특히 그가 신봉했던 4단계 문명발전론은 밀처럼 지적인 사람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충격적일 정도로 조야하고 조잡한 도식화였다. 국민의 성품을 진보와 퇴보, 능동과 수동, 냉정과 흥분 등으로 이분법화한 것도 지나친 단순화였다. 게다가 밀은 비유럽 사회의 문화적 특수성에 놀라울 정도로 관심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밀의 견해는 대단히 '서구중심적'이었다. 수프랑은 보편주의적 정치이론으로 출발했던 자유주의가 특정 인종과 민족을 배제하는 경향을 보인 것은 자유주의의 역설이라 꼬집었고(Souffrant, 2000: 95), 강준호 교수는 밀의 자유와 관용엔 '지리적 경계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썼다(강준호, 2009: 120).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밀은 인종주의자가 아니었다. '어떻게 타민족을 미개하다고 스스럼없이 부른 사람이 인종주의자가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겠지만, 밀이나 그랜트나 매콜리 같은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들 대부분은 (시대를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비(非)인종주의자'였다(Tunick, 2006: 18; 21-23; Mantena, 2010: 7). 밀의 자유주의는 인종이나 민족을 가리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간섭하지 않고 자유나 권리나 문명화로부터 배제해버리는 것이 오히려 더 차별적이다. 그들의 발전 가능성을 무시하는 처사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무지한 자를 교육하는 것은 그들을 열등하다고 믿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들의 발전 가능성을 "믿기 때문에" 그들을 배우도록 하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짐승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이 말하는 '미개성'은 인종이라는 조건에 매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주어진 상황과 여건이 인도인들을 미성숙한 상태로 붙잡고 있다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인종이 아니라 제도와 정부와 교육이었다. 밀이 보기에 영국은 인도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었다. 즉, 영국과 인도는 인종적으로 평등하다. 다만 진보의 정도에 따라, 특정 시점에 한 쪽이 앞서거나 뒤쳐질 뿐이다. 환경이 달라진다면 인도도 진보할 것이다. 어쩌면 영국보다 더 진보할 것이다. 물론, 그 환경을 달리하는 것은 외국의 지배긴 하지만.
밀이 고집한 '저 진보의 척도들은 과연 공정하고 옳았는가,' '서구중심적이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은 유효하고, 제기되어야 마땅하다.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들은 어쨌거나 인도의 퇴보적 상태를 경멸했고, (그들이 보편적이라 믿었던) 영국의 기준으로 인도를 판단했다. 자기 기준으로 타자를 판단하면 타자는 언제나 모자랄 수밖에 없듯, 인도는 영국에 비해 언제나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밀도 시대의 자식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참작해줄 수 있다. 밀만 그렇게 본 것이 아니었다.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들만 그렇게 본 것도 아니었다. 동양의 전제정과 위계질서와 유구한 봉건제에 미혹당한 낭만적인 보수주의자들을 제외한, 서유럽의 거의 모든 진보주의자들은 제 기준으로 인도를 판단했고, 항상 유럽 뒤에 아시아를 배치했다. 그리고 영국의 제국주의를 "진보의 동력"으로 보았다. 심지어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년)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든 간에, 결국 그 혁명을 일으킨 데 있어 영국은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무의식적인 도구였던 셈이다(Marx, 1853)." 영국의 식민지배는 사악하지만, 인도의 진보를 위해선 이롭다는 주장이다.
영국의 지배가 인도인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줬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재차 강조하자면, 동인도회사나 무굴제국이나 '외부 세력'이긴 매한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동인도회사의 직원들의 수가 더 적고 피부색이 더 밝았을 뿐이다. 게다가 『대의정부론』 초반부에 등장하는 냉혹한 문장, "문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비용을 치러야만 한다(RG, 505)."를 고려한다면, 밀에게 영국의 지배는 인도가 진보하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할 '성장통'이요, 장기간의 쇠락을 단기간에 치유하기 위한 '극약처방'으로 비춰졌을 것이다(서병훈, 2012: 170). 영국으로 비유하면, '영국내전'이라고 할까. 영국내전은 당시 영국인들에게 끔찍한 경험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영국의 헌정제도를 발전시키고 폭 넓은 자유를 이룩한 성장통이었다는 것이 19세기 역사가들(특히, 휘그사관에 경도된 자들)의 일관된 견해였다.
따라서 밀은 위선적이지 않았다. 밀의 제국주의 옹호론에 결함이 있다면, 그것은 위선이 아니라 '순진함'이었다. 최선의 제국도 결코 선량하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밀이 '철학적 입법자들'이라 칭송했던 동인도회사 직원들도 부패할 수 있었고, 지역에 파견된 사법관이나 행정관들도 부패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런 자들도 존재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배로 정신적 진보를 이룩했다 할지라도, 영국의 제국주의자들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밀은 간과했다.
19세기 말에도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의 수사가 존재했다. 인도의 총독이었던 리펀 후작(1st Marquess of Ripon, 1827-1909년)은 "인도는 다양한 인종·계급·종교를 아우르는 인도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 통치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소수 유럽인의 이익만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영국은 인도 국민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정치적 훈련, 경제적 번영, 교육 및 도덕적 성장에 기여해야 할 책임이 있는가? 아니면 그저 브랜슨 씨의 말처럼 '지배자에 대한 깊은 증오를 품은 피지배 민족'을 불안정한 권력으로 억누르는 것이 전부인가?"라고 물었다(Mantena, 2010: 12에서 재인용). 제국은 식민지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지, 본국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Mantena, 2010: 13).
리펀 총독과 글래드스턴 총리의 정부는 어쩌면 '최후의 진정한 자유주의적 제국주의' 정부였을 것이다. (훗날 로즈버리와 애스퀴스(Herbert Henry Asquith, 1852-1928년) 등은 이론적으로 빈약했고 신념적으로 텅 비어 있었다.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가 아닌 '자유당 내 제국주의자'에 가까웠다.) 밀의 시대에 자유주의적 제국주의는 현실적이고 방임적인 정치에 '패배'했다. 인도의 진보와 개혁에의 열정은 이미 급격하게 시들고 있었다. 19세기 말이 되면 제국주의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시도들이 사라졌고, 보다 현실적이고 보다 실용적이고 보다 전략적인 정당화 시도들이 줄을 이었다. 특히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볼 수 있는) 세포이 항쟁 이후 그랬다(Mantena, 2010: 19-23). 이에 더해 (자유당이 쏘아올린) 아일랜드 자치 논란(1886년)이 터지자 수많은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들이 현실적이고 보수주의적인 제국주의로 급선회했다(Mantena, 2010: 15). 늦어도 20세기 말이면,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서 '자유주의'는 확실히 패배했다.
1차 세계대전 초만 하더라도 식민지 획득 의지를 표명하는 것은 그럭저럭 용인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년)의 미국과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년)의 러시아가 반제국주의 수사를 이용해 유럽의 제국주의를 공격한 뒤로는, 세인들의 생각과 정치적 표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종전 무렵, 영국 사회는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수주의적 제국주의는 그다지 실리적이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모든 재원을 쏟아부어, 결국에는 본국 사회를 고갈시키는 값비싼 희생으로 보게 된 것이다(Fromkin, 2015: 860). 이로써 자유주의에 이어 제국주의도 더이상 염원되지 않는 무언가가 되었다.
분명 패했고, 많은 결함이 있었지만, 자유주의에 입각해 식민지배를 옹호했던 밀의 논증은 여전히 강력하다. 스스로에게 질문해보라. 국민의 복지엔 아무런 관심이 없는 폭정을 일삼는 독재자가 다스리고, 과부를 산 채로 불태우고, 여성할례를 자행하고, 여성의 교육권을 박탈하고, 선교사들이 참수당하고, 노예무역과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국가에 이른바 '선진국들'이 개입하는 것은 불의한가? 주권과 독립, 민족과 국경이 아무리 신성하더라도, 그것이 생명과 자유보다 더 중요한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평등주의와 민족자결주의에 익숙한 우리는 국경 밖의 일에 간섭하는 것에 시대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만(강준호, 2009: 140), 많은 사람들이 현재도 국경 너머에서 벌어지는 최악의 범죄들, 이를테면 인종청소·여성할례·노예제도·전쟁·인권유린 등을 놓고 윤리적 고민을 거듭하고 이다. 밀이 시대의 자식으로서 19세기 영국인의 눈으로 인도를 바라보았듯, 우리 또한 시대의 산물로서 21세기 현대인의 눈으로 세상을 방임적으로 바라보는 것 아닐까? 마이클 월저 같은 사람들은 강경하게 말한다. 생명과 자유가 문제된다면, 국제적 경계를 넘는 무력 사용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이다(Walzer, 2008: 446-449). 밀은 우리에게 개입과 불개입,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와 현실주의적 방임주의 중 어떤 것이 정말 부도덕한 것인지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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