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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May 08. 2024

오페라의 유령

월남 갈치


'HAPPY LATIN' 호는 바하마와 마이애미 사이를 물 찬 제비처럼 날렵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간간이 보이는 화물선과 어선을 보며 육지가 가까우니 갈매기가 배 위에 날아오기도 한다.

키웨스트 등대와 아바나 사이 플로리다 해협은 다른 곳보다 좁아 선박 통행량이 많다.


점심을 먹고 선내 비상벨이 울린다.

항해 중에 해상인명안전조약 규정대로 구명정 훈련을 한다.

타이태닉 호 사고 후 여객선은 필수로 퇴선 훈련을 해야 한다.

상선은 통상 한 달에 한 번, 삼항사가 구명정을 점검한다.

육상 연차 검사에는 구명정의 모든 것을 점검하고 불량은 수리, 교체한다.

선원 교대 등으로 신규 선원이 많은 경우 7일 안에 구명정 훈련을 하고 석 달에 한 번 진수 훈련을 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훈련 사진을 남기고 항해일지인 로그 북에 기록하여야 한다.


"아니, 국장님은 점심때도 참치회 안 고 라면 드시더니만 저녁에도 갈치를 안 드세요?"

일기사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라면 가끔 먹으면 맛있잖아요. 전에 다른 배 탈 때 월남 갈치를 많이 잡아 몇 달 동안 먹었더니 쳐다보기도 싫네요. 그때 죽은 갈치 귀신이 붙었나 봐요."

일항사가 파, 간장 양념을 올린 갈치를 하모니카 불듯이 발라먹으며 묻는다.

"갈치를 얼마나 많이 드셨길래 이 맛있는 거에 물리셨을까? 난 몇 달 계속 먹어도 안 질릴 거 같은데..."

"돈가스 집 아들이 돈가스 먹는 거 봤어요? 처음에야 신나게 먹었겠지만... 오페라의 유령을 도 갈치 비린내가 난다니까요."

내 말에 모두 웃는다.


오페라의 유령은 프랑스 작가 가스통 르루가 쓴 소설이다.

많은 드라마, 영화와 연극이 나왔는데 작곡가 앤드루 웨버와 프로듀서 캐머런 매킨토시가 뮤지컬로 만든 작품은 브로드웨이에서 35년이나 공연됐다.

영국 웨스트엔드에서는 코로나 때 잠시 멈췄다가 지금도 공연하고 있단다.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10,000회 이상 공연한 작품이고 거의 매회 매진이라고 한다.

그 음악이 좋아 휴대폰 컬러링으로 쓴 적이 있다.


파키스탄과 인도에 하역해 줄 잡화와 중장비를 가득 선적한 대농 그룹의 대한선박 소속선 'Korean Amethyst' 호는 인도 봄베이 항에서 장기 대기해야 한다는 대리점의 연락을 받고 용선주의 지시대로 파키스탄의 카라치 항으로 먼저 선수를 돌렸다.

영국의 인도 강점 후에 봄베이로 불리던 것이 원래 이름인 '뭄바이'로 바뀌었다.

카라치 외항에도 입항 순서를 기다리는 많은 선박의 불빛으로 휘황찬란했다.

현지 포트 컨트롤이 지정한 투묘 위치에 닻을 내리니 먼저 와서 대기 중인 삼보 배너 호에서 VHF 무선 전화로 본선을 호출한다.

그 배는 전에 같은 대한선박 소속선 한양 호로 박통과 세 자녀가 명명식을 했던 그 당시 제일 큰 배였다.

율산해운을 거쳐 삼보해운으로 넘어가 삼보 배너 호로 이름이 바뀌었다.

동문의 안부도 묻고 전에 같이 배를 타던 사람끼리 이런저런 담을 나누다가 보니 어느 선원이 자기 배 밑은 오징어 밭이라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낚시 도구를 챙겨서 선미로 갔다.

릴낚싯대를 바다에 넣자마자 갑자기 배 밑이 은빛으로 변한다.

낚싯줄이 팽팽해진다.

힘껏 잡아당기는 데 이놈 힘이 보통이 아니다.

실랑이하다 낚싯바늘에 걸려 올라오는 놈을 보니 은빛 찬란한 갈치다.

우리 배 밑은 갈치 밭이네.

우리나라에서 흔히 월남 갈치라고 하는 몸집은 큰데, 살에 둥근 뼛조각이 한두 개 박혀 있고 맛은 좀 퍽퍽하다.

그 뼈는 폼으로 있는 게 아니고 헤엄칠 때 균형을 잡아 준단다.


이를 본 선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낚싯줄을 바다에 던진다.

가끔 몸통이 반쯤 잘린 놈, 옆구리나 꼬리가 뜯긴 놈 등 별놈이 다 올라온다.

낚시에 낚여 올라오는 놈을 성질 급하고 사나운 다른 갈치가 날카로운 이빨로 베어 먹는 동족상잔이 벌어진 모양이다.

순식간에 선미 갑판은 갈치 어판장이 되었고 한쪽에서는 즉석 회 파티가 벌어진다.

뭐니 뭐니 해도 회는 갈치가 끝내준다면서...

캡틴이 선원들 기분 맞춰준다고 맥주 두어 박스 내려준다.

나는 판자촌 출신 촌놈이라 회를 먹어본 적이 없어서 선원들 먹는 것만 보면서 캔맥주를 마시며 낚시만 한다.

통신장은 정박 중에는 별로 할 일이 없어서 낮에는 자고 그렇게 사흘 밤을 갈치만 잡아서 먹고, 남은 것은 냉동실에 보관했는데 엄청나게 많았다.


배에서의 식사는 아침에는 된장국, 계란 프라이, 김치에 간단히 먹고, 점심에는 육류를 주로 먹는다.

긴 항해 중에 먹을 부식은 냉동식품이 주를 이루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점심 메뉴는 소, 돼지, 닭, 소, 돼지, 닭 요리의 반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일요일 점심은 보통 참치회가 나오는데 나는 그냥 라면을 끓여달라 다.


일요일 저녁 메뉴도 생선구이 같은 것이 나오는데 사단의 서막이 시작된다.

조리장이 카라치에서 잡은 갈치를 내가 하선할 때까지 7개월 동안 일요일 저녁 메뉴로 계속 내는 것이 아닌가.

선원들은 승선 중에 밥 먹는 시간만 기다린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퍽퍽한 월남 갈치를 소금만 뿌려 구워서 내놓으니,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나마 무 넣고 조림하거나 양념장을 얹는 등 바꿔주면 조금 나을 텐데...

어느 일요일 저녁 식사 중 기어코 일이 터졌다.

한 선원이 밥 먹으러 식당에 왔다가 변함없이 월남 갈치가 소금을 뒤집어쓴 채로 하얗게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숟가락을 내동댕이치면서 버럭 고함을 치고는 식당 문을 박차고 나갔다.

"에이, 씨벌! 언 놈이 갈치를 그렇게 많이 잡아서 허구한 날 맛없는 월남 갈치만 먹게 만들어! 물리지도 않나?"  

나는 죄지은 사람 모양 고개 숙인 채 말없이 퍽퍽하고 맛없는 월남 갈치만 젓가락으로 깨작깨작하고 있었다.


갈치는 깊은 바다에서 살고 밤이 되면 수면으로 올라온다.

겉의 은분은 많이 먹으면 복통을 일으킨다는데 익혀 먹으면 괜찮다고 한다.

이 은분은 립스틱, 매니큐어 등 화장품 재료로 쓰인다고 한다.

길쭉하고 번쩍거리는 외형이 칼과 비슷해 칼의 옛말인 갈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영미권에서는 단검을 뜻하는 Cutlassfish라고 한다.


갈치는 장어처럼 꾸물거리며 헤엄치지 않고 서서 지느러미를 움직여 헤엄친다.

근본적으로 심해어인 데다 성질이 급해서 물 밖에 나오면 제풀에 못 이겨 곧바로 죽는다.

우리나라에서 예전에는 갈치를 먹지 않고 개밥이나 주고 했다는데 요즘은 귀한 생선이다.

다른 나라에선 잘 먹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

뻬루 리마의 아구아 둘세 생선 시장에서 갈치를 현지인이 사지 않아 한 상자에 1불도 안 했다.

교민들이 그걸 알고 너도나도 찾으니 차츰 올라 20불까지 했단다.  


갈치와 생김새가 비슷하며 길이가 10m가 넘는 산갈치라는 심해어가 가끔 잡힌다.

자갈치시장은 갈치와 상관없고 자갈이 많았던 언덕이라 이름이 그렇게 지어졌단다.

사람이 바다에 빠져 죽으면 갈치가 가장 먼저 달려든다는 말이 있는데 먹이가 있으면 대부분 어류가 다 달려드니 갈치는 무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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