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운엽 Jun 05. 2024

에게해의 진주 산토리니섬

헤엄 쳐 시리아 난민을 살린 유스라 마르디니


'HAPPY LATIN' 호는 진주처럼 영롱한 에게해를 항해하고 있다.

보석처럼 반짝이면서도 맑고 푸른 바다 물빛이 눈부시다.

에게해 주변에 보이는 집들은 낭만적이고 낙천적인 지중해 사람들이 푸른 바다 물빛과 하늘색을 닮은 지붕에 벽은 대부분 순백색으로 만들어 깎아지른 하얀 절벽과 함께 한바다 위의 마도로스 슴을 아리게 다.

저기엔 또 어떤 여신이 살고 있었지?


에게해 주변에서 그리스 문명이 번성했다.

섬과 해안의 하얀 동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마을로 꼽힌다.

주민들이 늘 파란 지붕과 하얀 벽에 페인트나 회반죽으로 칠을 한다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자체 당국에서 규제한단다.

에게해는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바다로 파도가 잔잔한 편이고 지중해 크루즈선은 대부분 이곳을 지나간다.

아름다운 지중해 사진에 에게해가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에게해에는 섬이 많은데, 작은 섬 몇 개를 제외하면 터키 코앞에 있는 섬까지 전부 그리스 이다.

한때 그리스 본토까지 전부 터키 땅이었지만, 19세기 초반부터 역전되었다.


그중에서도 너무나 아름다운 산토리니섬은 '에게해의 진주'라 불린다.

에게해 한가운데 위치한 산토리니섬은 고대부터 그리스, 로마, 터키, 그리고 이집트를 잇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렇다 보니 산토리니는 힘 있는 이웃 나라가 탐내는 요충지 섬이었고, 게양되는 국기도 수시로 바뀌었다.

기원전에 발생한 거대한 화산 폭발로 한순간에 크레타 문명이 사라지고 산토리니는 화산재와 용암으로 뒤덮인 섬이 되었다.

그래서 이곳 땅은 화산암과 석회암이 주를 이루어 곡식이 자라기엔 너무 척박하지만, 다행히 포도가 자랐다.

산토리니는 빈산토 와인이 유명하다.

빈산토는 포도를 말려 만든 와인이라 당도와 알코올 도수가 좋고, 오래 보관해도 잘 상하지 않았다.

베네치아에서 이 와인을 산토리니에서 만든 와인이라는 뜻에서 비노 산토로 불렀고, 나중에 빈산토가 됐다.

산토리니는 빈산토를 수출해 재미를 봤다.

16세기부터 산토리니를 지배한 오스만제국은 회교국이었지만, 맛있는 빈산토중동으로 갖다가 비싸게 팔았다.


산토리니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 포도나무는 동그란 바구니처럼 땅에 바짝 붙어 자란다.

가지는 위로 자라지 않고 구부러져 동그란 바구니 형태가 되고 포도는 그 안에서 자란다.

바구니 윗부분은 잎들이 덮여있다.

포도 바구니는 이른 아침 바다에서 밀려오는 안갯속의 습기를 머금고, 윗부분의 포도 잎은 강한 햇볕에서 포도를 보호한다.

뜨겁고 건조한 환경에서 포도가 자라는 척박한 환경이지만, 포도나무가 땅바닥에 붙어 자라다 보니 산토리니 사람들에게 포도 수확은 등골 빠지는 중노동이다.


"은 문 하나를 닫으시면, 창문 하나를 열어 놓으신다."

험한 세상에서 분명 살아갈 길이 있다는 희망을 담은 그리스 속담이다.

산토리니는 아름다우나 농사지어 고살기에는 아주 가혹한 땅이다.

산토리니에서 포도는 열어놓은 창문일지도 모르겠다.

빈산토는 그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희망의 속삭임이런가.


우리나라 여자 이름으로 영자, 순자 씨가 익숙하듯이 유럽이나 중남미 사람에게 친숙한 이름으로 페넬로페가 있다.

스페인 국민 가수 중 한 분인 호안 마누엘 세랏의 히트곡' 페넬로페'가 한국 사람에게는 폴 모리아의 연주곡 '에게해의 진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 번안한 제목을 그리 만들어서 굳어졌다.

스파르타 지방의 왕이었던 이카리오스는 딸 페넬로페를 지극히 사랑해서 딸이 오디세이와 결혼해 떠나려 하자 같이 살자고 설득한다.

남편 오디세이는 아내 페넬로페에 선택권을 주자, 그녀는 대답 대신 베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남편을 따라가겠다는 뜻을 밝히고, 이에 왕은 딸과 사위를 보낸다.

잘 키운 딸이 열 아들 부럽지 않다고 말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애써 딸 키워봤자 남 좋은 일 시킨다는 말에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오디세이가 전장으로 떠나면서 페넬로페에게 1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재혼하라고 했다는데, 그녀는 재혼하지 않고 오디세이를 마냥 기다렸다.

오디세이가 없는 사이 구혼자들의 청혼이 밀려오자, 시아버지에게 드릴 수의가 완성되면 결혼하겠다는 핑계를 댔다.

낮에는 옷을 만들고 밤에는 풀어버리는 식으로 석삼년을 버텼으나 하녀의 배신으로 들통난다.

이 이야기가 '페넬로페의 베 짜기'의 유래이며 이 말은 쉴 새 없이 하는데도 끝나지 않는 일을 비유할 때 쓰인다.

후에 오디세이가 돌아오자, 페넬로페는 침대를 옮기라고 한다.

오디세이가 그 말을 듣고 '이 침대는 옮길 수 없지 않소?'라고 말하자, 진짜 신랑이 돌아온 게 맞다고 두 부부는 감격의 해후를 한다.

오디세이와 페넬로페의 신혼 침대는 성안을 뚫고 자란 단단한 올리브 나무를 베지 않고 그 나무 중심으로 침실을 만든 둘만의 사연이 있었다.

오디세이의 저자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와 페넬로페가 함께 왕국을 다스리며 먹고 잘 살았다고 썼다.




리우 올림픽에 난민 올림픽 선수단 소속으로 출전한 시리아 출신의 여자 수영선수 유스라 마르디니는 시리아 내전을 피해 에게해를 헤엄쳐 건너와 망명했다.

마르디니는 언니와 함께 작은 고무보트를 타고 탈출했다.

20여 명의 사람이 빼곡히 타고 있던 고무보트는 시리아를 떠나 망망대해에서 엔진이 고장 나 섰다.

유스라는 고무보트에 물이 새어들자,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봤다.

대다수의 사람은 수영할 줄 몰랐지만, 유스라와 언니 사라는 수영을 할 줄 알았다.

자매는 힘을 합쳐 3시간 반 동안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계속해서 헤엄치며 고무보트를 밀었다.

차가운 바다를 헤엄치며 몸이 얼어붙고 지쳤지만, 두 자매는 모두 같이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배를 끌고 그리스에 도착했다.


유스라는 말한다.

"조국 시리아가 그리워요. 전쟁이 끝나면 다시 고향에 돌아가 살고 싶어요. 그리고 어린이들에 제가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경험을 가르쳐줄 거예요."

코로나 난리에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전쟁 등 세상이 험하지만, 그래도 이 좋은 세상에 아직도 살아있음에 감사드릴 일이 천지에 널려있다.

작가의 이전글 유대인과 이스라엘 여전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