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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Jan 01. 2024

우리들의 이야기

해적 소굴 말라카 해협



중국 칭왕따오 항에서 유럽으로 갈 사료용 콩가루를 한배 가득 선적한 ‘HAPPY NINA’ 호는 싱가포르항에서 기름을 받기 위하여 밤낮없이 항해하고 있었다. 싱가포르항은 중계 무역항으로 수출입 화물 외에도 면세 기름, 주부식, 선용품 등을 선적하고 선원 교대를 하기 위해 많은 배가 기항한다. 벙커링과 주부식을 는 짧은 시간 동안 선원들은 2교대로 통선을 타고 상륙을 나갔다. 일단 어디든지 배가 기항하면 땅도 밟아보고 육지 공기도 마시면서 관광과 쇼핑을 하기 위해 나간다.


싱가포르는 공원 속에 도시를 건설한 것같이 깨끗하고 아름답다. 적도에서 100여 Km밖에 떨어지지 않아 엄청 더운 나라지만, 울창한 나무숲과 매일 한낮에 내리는 스콜 덕분에 체감 온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쇼핑몰이나 식당에 들어가면 에어컨이 시원하게 틀어져 있어 언제 가도 상쾌 느낌이다. 서울시만 면적에 인구 오륙백만 명이 사는데 그중 반 이상이 화교란다. 이 나라는 거지도 세금을 내고 영업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길거리에 담배꽁초, 껌 등을 버려도 걸리면 만만치 않은 벌금을 내야 한다. 마약을 갖고 있거나 하다가 잡히면 최고 사형이란다. 도시의 쾌적한 환경을 위하여 버스나 전철 등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게 하려고 자동차에 각종 규제와 높은 세금이 매겨져 찻값이 비싸다고 한다.


나는 선원 몇 명이 계약 기간이 다 되어 가 선원수첩에 계약 연장 공인을 받기 위해 대사관에서 영사 업무를 보고 난 뒤, 쇼핑몰과 야시장이 있는 People's Park에 택시타고 갔다. 이곳 택시는 대부분 Benz이고 운전석이 영국, 일본과 같이 오른쪽에 있다.


예쁘고 하늘하늘한 아가씨가 있는 보석 가게에서 화려하지 않은 반지를 하나 골라 남희 손가락을 가늠하며 그 아가씨 손에 끼워보고 샀다. 그리고 손님이 많은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블랙 페퍼 크랩과 해물 볶음밥에 맥주 한잔하다가 시간이 남아 센토사 파크에 놀러 갔다. 나비 공원과 곤충 왕궁을 둘러보다가 통선 시간에 맞추어 통선장으로 갔다. 적도의 후덥지근한 바닷바람이 이마의 땀을 식혀주었다. 통선장에는 우리 선원뿐만 아니라 싱가포르 앞바다를 가득 채운 선박에서 상륙 나오고 귀선하는 선원들로 붐볐다. 간혹 하룻밤 풋사랑을 찾아 나온 듯한 화사한 아가씨들도 보이고....


연료와 선용품을 싣고 뱃고동을 길게 울리며 출항하긴 했지만, 아직 화물을 풀어 줄 항구가 확정되지 않아 선주로부터 경제속력으로 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콩가루를 풀어 줄 하역 항구 스케줄을 조정하는 모양이다. 싱가포르를 빠져나와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면서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이 지역에 자주 출몰하는 해적들 때문에 전속력으로 항해하면서 비상근무 체제로 들어갔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배 곳곳에 소방 호스를 설치했다. 해적들이 쫓아오면 강력한 물대포로 퇴치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배보다 빠른 스피드 보트를 타고 총을 쏘며 추격해 오면 별 재간이 없겠지만.


말라카 해협에서 해적들에게 털린 배는 수없이 많다. 우리 정부가 발주한 삼천여 톤의 알루미늄괴를 인도네시아에서 싣고 인천으로 가던 ‘텐유’ 호가 싱가포르 출항 3시간 만에 이 해역에서 실종되었는데 나흘 뒤 미얀마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때 선명이 ‘빅토리아’ 호로 둔갑해 있었다. 화물은 이미 다 팔아먹고 필리핀을 거쳐 말레이시아에서 야자유 삼천여 톤을 싣고 선명을 다시 ‘산에이 1’ 호로 바꾸어 중국 상하이항에 입항했다가 장물 취득 혐의로 억류되었는데  야자유도 해적질로 탈취한 화물인 것으로 알려졌다. 배와 함께 삼천 톤이 넘는 알루미늄괴, 그리고 한국인 선장과 기관장을 포함한 14명의 선원이 순식간에 사라진 말라카 해협. 이곳은 밀수를 비롯해 해상 강도, 선박 탈취 등 사건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며 해적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장한 채로 항해 중인 선박에 기어 올라와 선원들을 위협하고, 배와 화물을 강탈한다. 근래에는 쾌속정에 중무장을 하고 심지어 군인으로 위장하여 해적질한다고 했다. 얼마 전에도 한국 국적선 '씨 케이 블루벨' 호가 브라질에서 옥수수 칠만여 톤을 싣고 싱가포르에서 연료 보급 후 인천으로 항해하던 중, 해적 7명이 스피드 보트를 타고 쫓아와 배에 올라타 선원들을 폭행하고 총과 칼로 위협해 현금과 휴대전화기 등을 빼앗고 30분 만에 달아났다고 한다.


말라카 해협은 우리나라에서 수입하는 유의 주 수송로이고 컨테이너 등 수출입 물동량의 거의 절반이 통과하는 생명선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을 포함한 태평양 연안국들이 합동으로 이 해협을 순찰하고 있어 해적 사건의 발생 건수는 감소세라고 하는데 지금은 주 무대가 아프리카의 소말리아로 바뀌었다. ‘HAPPY NINA’ 호는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여 인도양으로 들어섰다.




잔잔한 인도양의 푸른 바다를 보며 싱가포르에서 남희와 전화 통화한 것이 생각났다. 내가 해준 김치찌개가 그렇게 먹고 싶다고.... 과 친구들과 휴일에 도봉산에 올라갔을 때였다. 젊은 남희는 산을 얼마나 잘 타던지 거의 앞장서다시피 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뒤쫓아 갔는데 희한하게 남희 청바지 엉덩이에 당연히 있어야 할 라인이 보이지 않아서 저 가시나가 속에 아무것도 안 입었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정상에 올라갔다가 인근 계곡에서 밥을 해 먹자 해서 모두 남희 얼굴을 쳐다보자, 그녀가 한 말이 야무졌다.

“야! 왜 날 쳐다보냐? 여기까지 와서 내가 군번이니? 야. 짜샤들아! 대한제국 건국 이래로 엠티 와서 여자가 밥하는 거 사람 있으면 나와 봐. 난 땀 좀 식힐 테니 니가 식사 당번해라. 돼지고기 팍팍 넣고 김치찌개 맛있게 해 봐.”

“뭐라고라?”

눈을 크게 뜨고 대꾸하자 앙쥔 주먹으로 때리는 시늉을 하면서 ‘예쁜 누나가 하라면 해, 짜샤!’ 해서 할 수 없이 식사 당번을 했었다. 성냥갑보다 작게 보이는 도시의 건물과 점점이 보이는 차를 내려다보며 세상사 높은 서 보니 다 별거 아닌데 이 좋은 세상에 뭔 근심 걱정들이 그리 많은지. 그렇게 밥을 먹을 때 남희가 한 말.

“야, 짜샤! 죽인다, 죽여. 디게 맛있는데. 누나 소주 한잔 받아라!”

돌도 소화할 나이에 날아가는 새만 봐도 웃음보가 터지던 젊은 우리들이 아름다운 산속에서 동기들과 땀 흘린 후 먹는 밥맛이란....


전화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그 김치찌개와 파전이 먹고 싶다고? 외국 오래 살면 아무래도 한국 음식이 생각나기 마련이지. 한국에선 그 흔한 파전, 콩나물조차도 그립고, 신라면 끓여 남은 국물에 찬밥 말아먹고 싶어 목이 멘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래~ 내가 한 찌개 하지. 독일에서 만나면 내 사랑스러운 동기 남희를 위해 김치찌개를 맛있게 끓여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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