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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Jan 05. 2024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대


어느 일요일, 햇살이 따사롭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며 파도는 잔잔하지 않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희망봉 앞을 지나고 있는 ‘HAPPY NINA’ 호의 선원들은 당직자를 제외하고 다들 쉬고 있었다. 희망봉은 산이 아니고 대서양 해변에 암벽으로 이루어진 곶이다. 곶은 바다나 호수에서 면이 물에 둘러싸인 튀어나온 땅말한다. 곶의 규모가 크면 반도라 한다. 처음 번역에 오류가 있어 희망봉이 아닌 희망곶이라 해야 맞는다. 선주로부터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항을 향해 경제속력으로 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비싼 수에즈 운하 통행료를 주고 가는 것보다 화물 일정상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경제적인 모양이다. 미리 항구에 도착해서 대기하고 있어도 톤당 지불하는 항만세를 비롯해 만만찮은 경비가 나간다.


통신실 옆 갑판에 매달려 있는 구명정 아래 그늘에 의자를 놓고 앉아 전혜린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에 머리가 날려 귀를 간지럽게 했다. 아스라이 희망봉이 우람하게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한 권의 책이 마음에 들 때, 좋아하는 음악이 들려올 때 또 비 오는 거리를 혼자 걸을 때 나는 행복하다. 맛있는 음식, 진한 커피, 향기로운 포도주, 따스한 햇살 비치는 길을 걷는 것, 생각해 보면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렇게 말했던 혜린이 누나는 서른한 살의 애늙은이로 왜 세코날 40알을 삼킨 후로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가? 우리는 똑똑한 그녀가 쓴 글처럼 이렇게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고마워하며 이 좋은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고, 살아서 술 한 잔이 죽어 술 석 잔보다 좋다는 말도 있는데 말이지.


항해 중에 남희에게 몇 번 전화해서 겨우 연결되어 목소리를 들었는데 졸지에 1호봉 승급을 하게 됐다고 아주 기뻐했다. 본에서 뉴스 촬영 준비 중 갑자기 카메라가 작동이 안 되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남희가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나. 일단 전원 부분을 뜯어보니 선이 하나 덜렁거려 얼른 장비 차에 올라가서 납땜해서 동작시켰단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지사장님이 그 자리에서 자기 재량으로 1호봉 승급을 시켜주겠다고 했다나. 그래 봤자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독일 지사에서 자기가 인정받는 계기가 되어 아주 기쁘다고.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문과 출신들이야 대부분 기계치니까 여자가 이런 거 수리하는 것이 무척 신기하게 보이는 모양이지.’ 하면서 재잘댔다. 나미가 조금씩 변하는 것 같다. 그전에 그렇게 씩씩하던 아가씨가 요즘 아주 상냥해지고 말이 많아졌다. ‘짜샤’ 소리 들은 지도 꽤 된 거 같다.




아까부터 수평선 멀리 점 같은 것이 하나 보이는데 물개인지 뭔지 손을 마구 흔드는 것 같았다. 궁금해서 슬리퍼를 구두로 갈아 신고 브리지로 올라갔다. 당직 이항사와 망원경을 보며 이야기하고 있는 캡틴이 보였다.

“어, 국장 어서 오게.”

“네, 안 쉬시고 올라와 계셨네요. 저거 뭡니까?”

내가 묻자, 이항사가 먼저 대답했다.

“아, 웬 연탄이 하나 보이는데요.”

“어허! 연탄이라니. 이항사 그리 안 봤는데....”

캡틴의 힐난조의 말에 이항사가 머쓱해졌다.


“일단 가까이 가보세. 어선은 아니고 표류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큰데....”

가까이 가서 보니 더반 항에서 밀항하려고 유럽으로 가는 화물선에 숨어 탔다가 선원들에게 들켜 바다에 버려진 불쌍한 사람이었다. 패스포트를 보여주며 살려달라고 손으로 싹싹 비는 흑인을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서 캡틴이 제안했다. 일단 아이보리코스트까지 태워줄 테니 주방에서 설거지 도와주면서 밥값하고 그다음에는 알아서 하라고. 밀항자를 태우고 유럽이나 미국 항구입항했다가 적발되면 벌금에 귀국 경비까지 전부 선주가 부담해야 한다. 그렇다고 스케줄이 바쁜 배를 돌려 돌아갈 수도 없고 해서 많은 배의 책임자들은 밀항자를 그냥 바다에 던져 버린다. 이 친구는 그래도 뗏목에 먹을 거라도 챙겨서 내려주었으니 다행인 편이다. 거기다가 캡틴의 배려로 상아해안까지 가면 삼 분의 이는 간 거 아닌가? 쿤타킨테같이 양손을 들고 기뻐 춤추는 그를 당직 타수가 빈방 하나 내주고 샤워하게 데리고 갔다.


“안 선장님, 잘하셨습니다.”

“우야노. 그냥 모르는 체하고 가면 평생 잊지 못할 낀데. 국장은 이제 며칠 안 남았네, 애인 만날 날이.”

캡틴이 빙긋이 웃으며 말하는데 나는 가슴이 뛰고 할 말이 없었다.

“내 아버님이 젊었을 때 일본에서 음악을 했는데 유진 올만디인가 미국에 같이 가자는 것을 못 가서 평생 후회하시다가 돌아가셨다네.”

“네....”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아. 전에 Voice of America 한국어 방송 들으니까, 쵸사와 자네들 월급이 대한민국 월급쟁이 중 일 퍼센트 안에 들던데.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판자촌 출신에 마도로스라고 기죽지 말고 잘해보소. 그동안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그만한 아가씨도 1% 안에 드는 걸세.”

“네....”

나는 캡틴에게 수고하시라는 인사를 하고 내려오면서 조리장에게 김치 좀 삭혀놓으라고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독일이 가까워질수록 가슴 깊은 곳에서 문득문득 솟아오르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울렁임과 불안감남희가 ‘남에게 보여서 부끄럽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야. 사랑이라면 마땅히 대낮에도 부끄러울 리가 없는 거야.’라는 말을 뜬금없이 했었지. 남희는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 애 닮아 하고, 아~ 난 뭐가 문제여서 이렇게 가슴이 콩닥콩닥 좌불안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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