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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Jan 09. 2024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에서 달리기


갑판 위에서 어제도 뛰었고 오늘도 뛴다. 뭍에 닿으면 부두에서 뛴다. 물론 출항하면 내일도  위에서 뛰겠지. 비가 오거나 파도치면 선내에서 줄넘기라도 한다. 중독인 모양이다. 선체 길이가 200m가 넘으니 여섯 바퀴만 돌면 3km 정도 된다. 가슴엔 태극 마크를, 등에는 선명한 청색으로 ‘KOREA’라고 새겨진 회색 운동복에 반바지를 입고 영화 로키의 주인공처럼 뛰고, 이봉주가 되어 한 주먹으로 하늘을 찌르며 갑판 위를 뛴다.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에서는 황영조가 되어 양팔을 올리고 뛰기도 했고, 함부르크에선 손기정이 되어서 이를 앙다물고 뛰기도 했다. 때로는 관중이 되어 환호하며 목이 메어 뛰었다.


‘HAPPY NINA’ 호가 로테르담을 향해 경제속력으로 가는 길에 우현 쪽으로 아스라이 스페인의 헤라클레스 등대가 보인다. 이천여 년 전 로마 시대에 지었다는 아주 오래된 등대이다. 정열의 나라, 스페인! 현란한 복장으로 소와 겨뤄 창과 칼에 찔려 검붉은 피를 흘리는 것에 열광하고, 토마토를 길에 던지고 난리굿을 치며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 라틴아메리카와 필리핀 등을 수백 년간 통치한 저력.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패하기 전까지 세계 최강국으로 화려한 영화를 누렸던 작지만 큰 나라. 시애스터 때는 온 국민이 낮잠 자고, 밤에는 식사를 네댓 시간씩 하는 문화를 가진 여유로운 사람들지금도 그들의 문화권 안에서 살 수밖에 없는 세 번째로 많은 인구가 사용하는 스페인어.


우리가 배우길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콜럼버스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그는 인도로 가려다 삼천포로 빠져 엉뚱한 데를 죽을 때까지 인도로 착각한 것이다. 어쨌든 이탈리아 사람인 콜럼버스가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그곳에는 이미 원주민 문명이 존재했고, 보다 사오백 년 전에 바이킹족대구를 잡으려고 캐나다 뉴펀들랜드까지 가 살았던 유적지가 발견되었.


15세기 말경엔 후추가 유럽인들에겐 대단히 귀한 양념이었다. 그때까지 유럽인들은 고기를 구워서 소금만 찍어 먹었다는데 후추를 뿌려 먹으니까,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그래서 유럽 사교계와 부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후추를 구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 후추를 대량으로 구하면 떼부자가 될 수 있었다는 인데 그러려면 인도까지 가야 했다.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길은 당시에는 육로가 공포의 오스만 제국에 막혀 오다가다 죄 삥 뜯기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다가 희망봉을 돌아서 가는 길이 유일했다. 스페인과 견원지간인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서해안을 장악하고 있어서 스페인 선원과 상인들은 그쪽으로 가길 꺼렸다. 콜럼버스가 지구는 동그랗게 생겼다니까 그쪽으로 가지 말고 반대편인 서쪽으로 돌아가도 인도에 갈 수 있다고 스페인 국왕을 꼬드겨서 배와 선원을 지원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양반이 지금의 중남미 대륙에 도착해서 거기가 인도인 줄 알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후추가 없었다. 그들은 그곳에 살고 있던 잉카, 아즈텍, 마야를 점령하고 자기네 식민지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스페인 사람들이 지금의 멕시코부터 남미까지 몽땅 자기네 영역이라고 우기고 식민지로 삼았다. 하지만 그 당시 스페인과 맞잡이였던 포르투갈이 배가 아파 가만있지 않았고 ‘야, 우리가 남이가, 그만 처무그라’ 하고 숟가락 들고 달려들어 브라질 땅을 자기네 식민지로 삼았다. 그뿐인가, 영국, 프랑스도 사촌이 땅 생기니 배가 아프다고 지들도 배 타고 가서 여긴 우리 땅이라고 말뚝 박은 게 인디언이 살던 지금의 미국과 캐나다이다. 우리는 자들이 왜곡한 역사를 진실인 양 일괄되게 가르치고 배우는 황당한 현실에서 살고 있다. 그러게 우리가 알고, 말하는 역사에는 엉터리와 거짓이 많다는 말이다.


그 당시 프랑스 등 유럽에서는 요강에 밤새 본 대소변을 사람이 지나가든 말든 2층에서 길거리에 쏟아버리는 등 우리만큼이나 덜 문화인이었다. 그때 똥 벼락을 안 맞거나 밟지 않으려고 나온 것이 양산과 힐이라고 한다. 그유럽인들이 전 세계에서 땅따먹기할 때 우리네 조상님들은 뭐 했나 모르겠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발을 디디기 전, 서양인들은 일일이 양피지에 펜으로 적어서 책을 만들 때, 우리 조상님은 한글을 만들고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팍팍 찍어 냈었다. 그런 나라의 리더들이 동포끼리 당파 싸움 하느라 엉뚱한 데 빼고 있었다. 장보고 형님이나 우리같이 배 타던 사람을 좀 더 멀리 나가 해적질이라도 해서 배불리 묵고살고 남는 것은 나라에 뽀찌 좀 주라고 했으면 황무지였던 호주나 보르네오에 이 땅은 나의 땅 하고 깃발 꽂고 만세 불렀을 것을.... 그랬다면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이 한국어를 공용어로 쓰기 전에 호주나 말레이시아가 영연방 국가가 아닌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K 연방 국가가 되어 우리가 더 뻐하고 잘 먹여 살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 우물 안 개구리가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찌 알겠는가?




전에 바르셀로나에 입항했을 때 조리장 영감님과 부식 사러 시내로 나간 적이 있었다. 도로뿐 아니라 보도에도 박아놓은 수백 년 된 돌을 밟고, 짓기 시작한 지 백 년이 넘었다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바라봤다. 기부금으로 짓고 언제 완공될지 모르는 엄청난 규모에 아름답게 짓는다고 소문난 가우디 선생의 작품이라고 한다. 지금도 짓고 있는데 내가 살아생전 완공을 볼 수 없단다. 우리는 짓기 바쁘게 입주하고 이삼십 년 되면 부슬부슬 낡아서 재건축하는 빨리빨리 문화인데 스페인이나 남미에 가보면 백 년 이상 된 고옥이 널려 있다. 빨리빨리가 결국 빠른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적은 인구로 세계를 다스렸던 경험이 있는 나라 사람은 우리와 마인드가 달라도 보통 다른 게 아닌 모양이다. 미합중국은 고작 이삼백 년 역사인데, 우리나라가 오천 년 역사를 지닌 대단한 단일 민족이라는 게 결국 말장난에 불과할 뿐다.


작은 배낭을 메고 조리장과 같이 바르셀로나 라 보께리아 시장으로 갔다. 싱싱한 채소와 부족한 주부식을 사기 위해서이다. 게다가 지중해에서 나오는 속이 빨갛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오렌지를 살 욕심도 있었다. 대부분의 항구에서는 배에 납품하는 선식업자에게 주문하지만, 많지 않은 주부식을 살 경우는 이렇게 나가서 사기도 한다. 뭐, 스페인어를 못해도 영서 포켓 사전 있겠다, 물건을 눈으로 보고 거기 적혀 있는 가격을 환율 계산해 가격 비교하면서 사면되니까 어려운 것은 없다. 남의 나라에서 돈 버는 게 어렵지, 쓰는 거야. 필요한 주부식을 다 사고 트럭을 수배했다. 나는 배낭에 넣어온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띠를 한 채 스트레칭을 조금 하고 뛰기 시작했다. 갈아입은 옷과 구두는 배낭에 담아 조리장이 부식을 싣고 가는 트럭 편으로 보냈다. 몬주익 언덕을 돌아서 ‘HAPPY NINA’ 호가 정박해 있는 부두까지 뛰어갈 생각이다. 여긴 바르셀로나니까 환상의 조영조가 되어서....


중학생 때 새벽에 동숭동에서 신문 돌리며 뛰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매일의 소중한 일과 중 하나가 됐다. 안 뛰면 뭔가 허전해서 몸과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바다가 아닌 육지, 몬주익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뛰어가며 기분 좋은 피로감에 젖어 마음속으로 남희에게 속삭인다.

"나미, 널 볼 때도 좋지만, 이렇게 널 생각할 때도 나는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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