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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Jan 08. 2024

뒤뚱거리며 걷는 리스본의 남희


한겨울의 북대서양은 바람이 세고, 파도가 거칠다. 기압이 빠르게 움직이고 저기압 세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세게 불면 수면 위의 파도는 하얀 거품을 내며 산산이 부서져 갑판 위를 넘나든다. ‘HAPPY NINA’ 호는 조금 거칠어진 파도를 뚫고 포르투갈 옆을 항해하고 있었다. 식당에서는 한참 아사도 파티가 벌어졌다. 미국이나 유럽 선주 배를 타면 부식비가 따로 정해지지 않고, 양껏 먹고 버리지만 말라고 한다. 한국 선주 배에서도 소갈비는 가끔 먹지만, ‘HAPPY NINA’ 호에서는 소갈비를 숯불에 구워 실컷 먹게 했다. 아사도에 띤또, 적포도주가 빠지면 안 되지. 안 선장님은 평소 즐기던 프랑스 테이블 와인에 계피와 스위트 바질을 넣어 따뜻하게 덥혀 사관들에게 한 잔씩 따라주며 독일에선 추운 겨울에 이렇게 마시는 사람이 제법 있다고 하며 배 타면서 재미있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글뤼바인 잔을 기울이며 지금 지나고 있는 오뽀르또 항에서 마시던 테이블 와인을 떠올렸다.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마시던 와인보다 더 향기로우면서 부드럽게 취하던 포르투갈 와인. 맛있다고 홀짝홀짝 마시다가는 흑발의 자그마한 포르투갈 아가씨의 애처로운 파두 노래와 함께 뿅 가버리는 신의 음료. 부원 식당에서는 아사도 파티에 완전 피아스따가 된 듯 시끌벅적했다.


“국장님, 위성 전화벨이 울립니다. 이상, 이항사!”

선교에서 당직을 서는 이항사의 선내 방송이 울렸다. 나는 얼른 냅킨으로 입술을 닦고 통신실로 뛰어 올라갔다. 송수화기를 잡자마자 뭐라 말하기 전에 남희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마침 리스본에서 열리는 국제 해양 회의 취재차 포르투갈에 왔단다. 거리에 넘치는 아사도와 사딘 굽는 고소한 냄새에 취하고 유럽 어디에서나 부적절하게 깔린, 오래된 돌길에 흥분한 듯했다. 고색창연한 리스본의 주황색이 주도하는 아담한 풍경과 친절하고 잘생긴 포르투갈 사람들에 기분이 좋다고 한다. 남희는 뛰는 가슴 그녀의 하이힐이 울퉁불퉁하게 깔린 수백 년 된 돌길 위에서 얼마나 뒤뚱거렸을까? 유럽의 돌길에서는 캐주얼 같은 편한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하는데게다가 저 숙녀는 젊음을 뽐내느라 타이트한 투피스를 입고 있겠지그리고 라인이 보인다고 안에는 아무것도 안 걸쳤을 테고.... 묘한 흥분을 느끼며 다리를 꼬고 앉아서 통화를 계속했다. 그녀의 귀엽게 재잘대는 예쁜 입술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나미야, 유럽 어느 나라가 제일 맘에 드니?”

내가 묻자, ‘응,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이 사는 포르투갈이 제일 맘에 들어. 너 전에 여기서도 엽서 보냈잖아?’라고 말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나미가 좋다니 나도 좋은 기억이 많이 난다. 언제 한번 화려하고 단정한 리스보아 거리를 같이 걸으면 참 좋을 텐데.”

내가 대답하자 그녀가 이어갔다.

“사람들이 참 친절해. 유럽 웬만한 데는 다 가 봤어도 여기만큼은 아니더라. 동양인같이 자그마한 사람들이 찌든 표정도 없고 아주 여유롭게 느껴져. 기후도 좋고 참 편안해.”

“그래, 어디나 미인에게는 다 친절해. 곧 독일 도착할 거야. 보고 싶다, 나미....”

‘응, 나도 보고 싶어. I miss you.'라는 말과 함께 ‘쪽’ 소리가 나고 전화가 끊어졌다.


그녀 말로 소련에 근무하는 미국인이 본토에 사는 애인을 만날 때 리스본에서 랑데부한다나. 남자는 약속한 날짜보다 미리 와서 이 도시의 많은 것을 즐기는 것을 보고 부러워했단다. 아~ 이 바다만 헤엄쳐 가면 아스라이 보이는 저 지척에 남희가 빨빨대고 다닌다니.... 아쉬운 마음을 간직한 채 사관 식당에 돌아오니 캡틴이 이야기하다 멈추고 쳐다보았다. ‘네, 개인 전화예요.’라고 말하고 자리에 앉아 와인 잔을 들었다.


이야기는 지중해의 삼각파도에 대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오대양에 끼지는 못하지만 큰 바다인 지중해.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 바다에 날씨가 나쁠 때는 파도가 멀리 퍼지지 못하고 되돌아와 삼각파도가 되 화물선이 그 모서에 얹히면 배가 부러지게 된다. 얼마 전, 그리스 선주의 한국 선원이 타고 있던 노후한 오만 톤급 광석선 ‘Ocean Glory’ 호가 이 지중해에서 배가 부러져 가라앉았다. 그 배에 승선 중인 내가 알던 통신장의 부음도 나중에 통신사 협회 회보를 보고 알았다. 예전에는 배의 연결 부분을 '타이태닉' 호처럼 리벳으로 조이던 것이 발전해서 용접으로 붙였는데 재수 없이 삼각파도에 배가 얹혀 하중을 못 견뎌 용접 부위가 부러진 모양이었다. 한밤중에 이런 사고가 나면 순식간에 가라앉아 조난신호도 못 보내고 꼼짝없이 물고기 밥이 되는 거지. 유조선에서 광석선으로 개조한 노후선 '스텔라 데이지' 호도 브라질에서 광석을 싣고 대서양을 항해하다 배가 찢어지며 바닷물이 들어와 눈 깜짝할 새에 가라앉아 연락이 두절됐다.




전에 동남아를 운항하던 국적 원목선에 승선한 적이 있었다. 당시 국적선은 급료가 약하고 노후 선박이 많았다. 그런데 국내 6대 그룹 중 하나이던 K 선박회사에서 승선 요청이 들어왔다. 최고호봉을 준다는 말에 자존심을 갖고 13개월 동안 승선했었는데, 배가 얼마나 낡았는지 남지나해에서 태풍보다 약한 열대성 저기압을 만나 강한 파도밭을 헤쳐 나가지 못해 배가 뒤로 2노트씩 밀렸다. 배가 전복될까 봐 돌리지도 못하고 ‘이 또한 지나가리니’ 하며 몇 시간을 마음 졸이고 항해하는 진풍경을 겪기도 했고, 잦은 엔진 고장으로 열흘 항해에 배가 열세 번을 멈추었던가. 어떤 때는 기관부 선원들이 잠을 제대로 못 자 메인 엔진을 수리하면서 피스톤을 거꾸로 끼우는 웃지 못할 일조차 있었다.


말레이시아 오지 강가에서 원목을 싣고 있을 때 본선 데릭이 고장 나 화물을 선적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역 중에 수리하러 싱가포르로 갈 수도 없고, 수리할 기술자를 오지로 보내자니 시간과 경비가 만만치 않은지라 본사에서는 어떻게든 수리해서 짐 싣고 한국에만 오라고 했다. 당시 어선 기관장을 하다가 우리 배에 온 일기사가 밤잠 안 자고 기관부원과 함께 기적적으로 수리하여 원목을 싣게 되었다. 본사에서는 희색이 만연하여 노고 사하는 전문이 오가고 축제 분위기였다.


짐 싣고 한국으로 가던 중, 바닷물을 증류해서 물을 만드는 조수기가 고장 나 밥 해 먹을 물도 간당간당해서 절수가 아닌 단수를 하게 되었다. 에어컨도 비실비실한 노후선에 그 더운 동남아에서 씻지를 못하고 빨래를 할 수 없어 옷을 갈아입지 못해 오페라의 유령이 아닌 상거지 신세에 선원들이 집단 피부병과 합병증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본사에서는 칭찬 일색이던 일기사를 잠결에 피스톤을 거꾸로 끼웠다고 희생양으로 하선 조치시키고.... 어이가 없어서 핏기가 가신 채로 보따리를 싸서 내리던 그 일기사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다시는 국적선을 안 탈거라고 하더니 선원 경기 좋은 당시에 급료 좋은 해외 취업선에 턱 하니 기관장으로 승선하는 걸 봤다. 나도 물론 그 후로 배를 그만둘 때까지 국적선을 타지 않았지만, 젊은 우리는 그 똥배에서 고생이 뭔지도 모르고 깔깔대며 만기가 될 때까지 그 배를 탔다. 지금은 국적선도 대우가 좋고 새 배가 넘쳐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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