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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Jan 16. 2024

알렉산드리아의 최고 미녀 히파티아


남희와 나는 에라스뮈스 다리 부근의 한 조용한 카페에 마주 앉아 있었다. 그녀는 늘 흔들리는 배에 있다 내리니 이젠 땅도 흔들리는 것 같단다. 남희는 무엇이 그리 궁금한지 알렉산드리아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달라고 재촉했다. 달콤한 말리부 온더록스로 목을 축이며 긴 이야기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졸았다. 항해하면 수시로 변하는 시차와 영감처럼 늘 새벽에 일어나니 만성 수면 부족인 모양이다.




기원전부터 번성했던 지중해의 이집트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나는 대리점에 방문하러 갔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고대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옛것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도시로 보였으나, 부두에서 대리점 차로 시내에 들어서니 사막의 모래 먼지와 함께 매연이 심해서 호흡이 불편했다. 눈 옆 가리개를 한 말이 끄는 마차와 함께 티코가 종횡무진 시내를 질주하고 있어 무척 반갑다. 어쩌다 포니도 보인다. '아니 저 차가 아직도 굴러다니다니.' 잠시 후 운전기사가 깨끗한 건물 앞에 차를 세우더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란다.


"하이! 하유 두잉?"

문을 열고 들어가며 인사를 하는데 냉방이 잘된 사무실에 아리따운 아가씨 혼자 수줍게 웃으며 맞이한다.  

"웰컴! 캔 아이 핼퓨, 플리스?"

이목구비가 뚜렷한 이집트 미녀의 유창한 영어에 갑자기 주눅이 들었다. 클레오파트라가 환생하면 이런 모습일까? 세기의 미녀 엘리자베스 테일러 아가씨 때 모습에 견줄만할까?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앞에서도 진땀이 나기 시작하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머릿속이 하얗게 된 거 같다.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가 탁 막혀버려 우물쭈물 말이 안 나온다. 아가씨는 이미 나의 방문을 알고 있어서인지 생글생글 웃으며, '우츄 라이크 해버 커버 커피 오 오렌주스, 플리스?'라고 묻는다. 앉으라는 의자에 엉거주춤 앉으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오렌주스, 플리스.'라고 대답했다.


긴장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말해보니 '클레오파트라'의 후예 같은 이 아가씨는 '히파티아'라는 예쁜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여성이 취업하기가 쉽지 않다는데 카이로 대학을 나오고 영어를 제법 해 외국 배를 상대하는 쉬핑 에이전트에 들어오게 되었단다. 일단 칭찬부터 해야지, 고래도 칭찬하면 춤을 춘다는데.

"요 소 뷰러플, 룩스 라이크 클레오파트라!"

내 말에 '리얼리?' 하고 함박웃음을 웃으며 되묻는 아가씨에게 '슈어, 슈어!'라고 대답하면서 뭔가 잘 풀릴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대리점에  하러 갔는지도 잊고 예쁜 아가씨에게 눈이 꽂혀 시내 구경할 수 있냐고 하니 '어럽쇼!' 이 또한 쾌히 응한다. 에이전트 사무실을 나와 택시를 타고 일단 조용한 해변으로 갔다. 분위기 잡으려면 바닷가도 괜찮지.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구름 위에 뜬 기분으로 이집트의 아름다운 아가씨와 지중해 해변을 걸었다. 말하다가 잘 안 통하면 손짓, 발짓 만국 공용어 바디 랭귀지가 있지 않은가? 하물며 국제 마도로스와 쉬핑 에이전트 직원인데.


아름다운 알렉산드리아의 해변도 어느덧 노을이 지고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다. 처음 가 본 이국의 해변 절경에 취하고 '히파티아'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잃을 지경인데도 어김없이 뱃속에서는 신호가 온다. 바닷가에 지천으로 있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예약하셨나요?"

레스토랑 입구에서 아리따운 종업원이 묻는다. 아니라고 대답하자, 한구석으로 안내하려고 했다. 그러자 '히파티아'가 이분은 알렉산드리아에 처음 온, 리어라는 동아시아의 왕자님인데 바다가 보이는 2층 창가에 앉을 수 없겠느냐고 요청했다. 아가씨가 잠시 기다리라며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웬 왕자?' 하긴 어렸을 때 집에서 엄마한테 왕자 소리를 듣긴 했었지. 잠시 후, 지배인이 웨이트리스와 같이 나타나 정중하게 안내한다. 졸지에 내가 동양의 왕자가 됐다. 하지만 식은땀이 나고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진다.


일단 권하는 자리에 폼나게 앉아 주문하려고 메뉴판을 보니 지렁이 기어가는 글씨와 그 밑에 영어가 적혀 있는데 뭐 아는 게 있어야지. '히파티아'를 보면서 정중하게 메뉴판을 그녀가 보기 좋게 놓아주고, 까막눈이 아니라고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 있는데 여종업원이 뭔가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서 웃음을 참으려고 쿡쿡댄다. 나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언제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와 봤어야지. 만날 허름한 분식집이나 학사 주점만 들락날락했었지.


'히파티아'가 메뉴판에서 뭔가를 가리키는데, 사진에 바닷가재가 보인다.   

"Oh, Lobster! I like it. That's delicious. Give me a big one, please!"

말만 들었지 언제 바닷가재를 구경이라도 했나. 어렸을 때 남산 개울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민물 가재를 본 게 전부였는데. 난생처음 보고 맛보는 오르되브르에 '꼬르륵' 소리를 내던 일심 이체의 위장은 달래 놓았다. 잠시 후 아라비안 풍의 고풍스럽고 엄청나게 큰 접시에 바닷가재가 한 마리 턱 하니 엎어져서 인사한다. 내 평생 앞으로 언제 이런 멋진 아가씨와 외국의 고급 레스토랑에 오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독일 라인 산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질렀다. 그녀도 환하게 웃는다. 작업의 기본에는 일단 알코올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독일산 화이트 와인에 랍스터라! 히파티아와 함께하는 멋진 식사와 알렉산드리아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내 마음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멋진 디너를 마치고 지중해의 시원한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느끼해변을 걷는데 '히파티아'가 가볍게 팔짱을 낀다. 그렇게 걸어가다 보니 디스코 클럽의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이 보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떡여 같이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웬만한 이슬람 국가에서는 술은커녕 클럽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데 이집트는 맥주의 기원인 나라답게 아주 느슨한 거 같다. 요란한 음악 소리와 함께 제법 많은 젊은이가 플로어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다. 간간이 발리 댄서들이 손님 테이블에 맨발로 올라와서 배꼽춤을 추며 흥을 돋운다. 이곳 댄서들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풍만한 몸매를 자랑하며 어깨와 배만 노출하고 있다. 웨이터가 안내하는 자리에 앉아서 흥겨운 음악을 들으며 '히파티아'와 맥주잔을 기울이자, 옆자리의 젊은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앉은자리에서 잔을 높이 올려 건배하는 등 외국인에게 관심을 보인다. 급기야 한 청년이 우리 테이블에 와서 'Where're you from?'이라고 묻기에 'I'm from South Korea'라고 대답했더니 자기 자리에 돌아가서 'Kuria!'를 외치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음악이 멈추자, 플로어에 있던 젊은이들이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오늘 결혼식을 했는지 화려하게 치장한 신부, 신랑으로 보이는 사람 주위로 수십 명이 둘러앉았다. 잠시 후 사회자가 신랑, 신부를 호명하자 일어나 인사하고 요란한 함성과 박수 속에 축하 세리머니를 한다. 그때 갑자기 옆자리의 아까 그 청년이 무대 밑으로 뛰어가더니 사회자에게 뭐라고 말하니까 우리 쪽을 쳐다보며 '오리엔트 어쩌고, 쿠리어 저쩌고' 하며 유일한 외국인이 앉아 있는 내 자리를 가리킨다. 갑자기 조명이 우리에게 비치며 함성과 손뼉 소리가 클럽이 떠나갈 듯이 요란했다.


'아니, 나보고 어쩌라고.' 어리둥절해 있는데 클럽 안에 있는 젊은이들이 일어서서 환호와 손뼉을 치며 나를 쳐다보고 무대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얼떨결에 엉덩이를 뒤로 뺀 채 엉거주춤 무대로 올라갔고 사회자가 목청껏 뭐라 말하며 마이크를 넘겨준다. 눈치로 봐서 ‘아! 이집션 신랑, 신부를 축하해 주라는 거구나.’ 하는 생각에 마이크를 넘겨받고 축하는 해주어야겠는데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언제 말해 본 적이 있어야지. 더군다나 이역만리 외국인들 앞에서 말이야. 눈앞이 캄캄해지며 입술과 마이크를 잡은 손이 떨리는데 저 앞에 '히파티아'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무대에 섰는데, 대한 남아가 쪽 팔릴 순 없지. 떨리는 목소리로 아랍어 '슈크란!'이라고 인사를 닦고 'Ladies and Gentlemen! I'm from Korea in the East Asia. Congratulations on your marriage.' 하는데 요란한 음악과 젊은이들의 환호와 손뼉 소리에 내 말은 묻혀서 들리지 않는다. 신랑, 신부가 다시 한번 일어나 인사하고, 잠시 후 조금 조용해지자, 조명과 함께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린다. 축하 인사는 된 것 같고 이제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Let me introduce my girl friend. She's the most beautiful woman in the world. She looks like Cleopatra. Her name is Hypatia! I love Hypatia!"

흥분한 외국인의 마이크 소리에 클럽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일제히 손뼉을 치며 함성을 지른다.  

"Kuria, Kuria, Kuria! Hypatia, Hypatia, Hypatia!"

그 순간 클럽이 떠나갈 듯한 환호와 음악 소리를 뚫고 아름다운 '히파티아'가 양팔을 올리고 진격의 여신 잔 다르크처럼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무대 위의 나를 향하여 뛰어온다.

환희에 찬 그녀의 모습에 둥그런 조명과 함께 나를 다시 구름 위에 뜨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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