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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Jan 15. 2024

로테르담에서 꿈속의 사랑



은 안개가 으스스하게 깔린 독일 함부르크 항으로 들어가는 ‘HAPPY NINA’ 호는 네덜란드 로테르담 항과 작은 어촌같이 한적한 델프질 항에서 콩가루를 풀어주고 마치 유령선같이 항해하고 있었다.

"뿌~ 우웅~~~."

뱃고동 소리 또한 스산하게 들렸다. 귀여운 헨젤과 그레텔을 잡아먹으려고 까만 고깔모자를 쓰고 코가 긴 괴기하게 생긴 독일 마귀 할매가 빗자루를 타고 우리 배 위로 쌔앵 날아간다. 그러나 계속되는 짧은 항해 중에, 더러워진 갑판을 청소해야지, 외항에서 승선할 도선사가 붙잡고 올라올 사다리를 설치하랴, 갑판부 선원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에는 유럽의 물류를 실어 나르는 수많은 화물선이 검은 실루엣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HAPPY NINA’ 호는 독일 선주가 보유한 30여 척의 화물선단 중 지난 일 년간 운임 수입 대비 경비가 가장 경제성 있는 선박에 뽑혀 본사에서 특별 상여금도 주고 기념 화보를 작성하기 위해 홍보팀이 방선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편에 남희가 근무하는 방송국 취재팀도 같이 오기로 했고이윽고 도선사를 선두로 본사 홍보팀, 방송국 취재팀이 미속으로 항진하는 ‘HAPPY NINA’ 호의 좌현에 설치한 로프 사다리에 달라붙어 한 명씩 배에 올라오고, 무거운 장비들 또한 힘겹게 올렸


방송국 취재팀은 갑판까지 마중 나온 남희와 반갑게 인사하자마자 바로 마이크를 주며 촬영에 들어갔다. 역시 프로들은 뭐가 달라도 달라. 같이 올라온 파일럿을 촬영하고, 타고 온 배를 잠시 기다리라 하고 무비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리고 사다리를 걷어 올리는 것까지 꼼꼼히 촬영하고 남희를 따라 맨 위에 있는 브리지로 올라왔다. 반갑게 맞이하는 안 선장님. 오늘따라 트레이드 마크인 삐딱하게 쓴 마도로스 모자와 입에 문 파이프가 여간 멋있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흰 정복도 칼같이 다려 입었다. 취재진이 고개 숙여 인사하면서도 계속 카메라는 돌아가고 남희의 멘트도 쉬지 않고 이어진다.

“여기 오대양 육대주에서 외화 획득의 숨은 파수꾼들인 독일 선주의 라이베리아 국적 화물선 ‘HAPPY NINA’ 호의 선상에서 선장님 말씀을 시청자 여러분과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며 재빨리 마이크를 안 선장님 앞에 대는 남희. 평상시 무뚝뚝하고 그 많은 선원을 무섭게, 때로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호령하던 캡틴도 카메라 마이크 앞에서는 갑자기 주눅이 드는지 말을 더듬었다.

“에, 또.... 안녕하세요?”  

“선장님, 이거 생방송 아니거든요. 편집할 거니까 그냥 평상시처럼 편하게 말씀하세요.”

남희의 애교 섞인 말에 헛기침만 하는 캡틴. 다시 마이크를 캡틴에게 대려 하자 망원경으로 앞을 보며 ‘저어~ 지금 배 붙여야 하는데요.’라며 머리를 긁적이면서 나지막하게 말하는 캡틴.

“잠시 마이크를 일등항해사님께 돌리겠습니다.”

남희가 말하면서 일항사 쪽으로 몸을 돌리자 벌써 바람과 같이 사라진 Chief officer.

“어디 갔지? 조금 전에 옆에 있는 거 같았는데.”

혼자 종알거린다.


“다음에는 ‘HAPPY NINA’ 호의 모든 통신을 담당하는 심장부인 통신실을 취재하겠습니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통신실로 들이닥치는 남희와 카메라맨.

“아, 통신장님. 먼저 하나 묻겠는데 선장님 견장이 네 줄이고 통신장님 견장은 세 줄인데 그건 왜 그렇습니까?”

남희의 속사포 같은 말에 이어 마이크를 내 앞에 댄다.

“네, 군대의 계급같이 비행기나 어느 배에서든 최고 책임자인 선, 기장님은 견장이 네 줄이고 그 밑에 일등항해사, 일등기관사와 통신장 등 고급 사관은 세 줄입니다. 그리고 초급 사관인 이삼등항해사와 기관사는 두 줄 내지는 한 줄이고요.”

“아, 네!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궁금한 것이 이렇게 장기간 해상생활을 하면서 특별히 불편하다든가 어려운 점이 있으시다면?”

“네, 해상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익숙해져서 별다른 불편한 점은 없고, 육상보다 더 잘 먹고 잘사는 편입니다. 다만 아쉽다면 여자와 빨래가....”

‘아이고, 저 푼수. 또 여자하고 속옷 타령이냐?’라고 종알거리며 다시 마이크를 잡는 남희.

“이렇게 해상생활하시면서 제일 생각나는 사람은요?”

갑자기 화색이 돌면서 마이크를 뺏다시피 잡아채며 말했다.

“네, 역시 저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님이 늘 생각납니다만, 역시 우리 애인 나미가 더 생각납니다. 하하하.”

“야, 짜샤! 장난하냐? 지금 녹화 중이야, 카메라 돌아가고 있다고~!”

성질내는 남희의 입을 거칠게 입으로 틀어막고 미친 듯이 봉긋한 가슴과 몸을 더듬었다.

그녀 역시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다른 사람이 보거나 말거나 도발적으로 움직였다.




“야, 너 정말 이럴래? 여기까지 와서 조냐? 588번 버스 타고 왔다 갔다 할 때도 밤새 졸더니....”

남희 말에 정신 차려보니 로테르담의 노천카페 테이블에 놓여 있는 하얀 말리부 병과 빠에야의 노란 샤프란 소스가 남아 있는 접시 그리고 애잔한 표정의 남희.

“음냐, 음냐. 보드랍고, 뭉클하니 맛있었는데....”


말리부를 온더록스로 홀짝홀짝 마시며 남희에게 알렉산드리아의 클레오파트라 이야기를 하다가 달콤한 말리부에 취한 건지 오랜만에 만난 남희에 맛이 간 건지 나도 모르게 깜빡 존 모양이다. 이렇게 또 로테르담 항의 아름다운 에라스뮈스 다리 옆 노천카페에서 젊은 우리의 추억이 새롭게 쌓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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