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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Jan 14. 2024

어린 왕자의 북유럽 항해일지


“잠깐만, 삐지지 말고 이야기 들어 봐.”

내가 목소리를 깔면서 입을 열자, 남희가 눈에 힘을 주고 쳐다봤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전에 휴가 마치고, 배 타러 나가고 나서 나미가 막 욕을 하면서 편지 보낸 적 있었잖아?”

“그래서?

“그때 나도 성질이 나서 니들 편지를 구겨서 콜롬비아의 르따헤나 바다에다가 던져버렸거든. 그리고 맥주 한잔하고 졸다가 밤에 나와서 바다를 쳐다보니 너희 얼굴이 밝은 달에 겹쳐 보이더라고....”

“술 먹고 조는 버릇은 여전하네, 그런데?”

“그때야 나미의 마음을 읽은 거야. 나 참 늦지?”

“그래, 이 바보야.”

“‘아, 실수했구나. 주소라도 남겨 놓을 건데.’라고 후회했는데 그 편지가 내가 잡은 큰 물고기 배에서 나온 거 있지. 정말 질긴 인연 아니겠어?”

“어머머~.”

“그래서 선미 씨 편지도 버릴 수 없었던 거야. 시집 안 간 거도 알아.”

“그래도 그렇지, 베개 밑에 다른 여자 편지를 놓고 자는 걸 보고 좋아할 여자가 어디 있겠니? 그래서 저 편지를 다림질한 거야?”

남희가 벽에 얼룩이 져 구겨지고 색 바랜 편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응, 선미 씨 편지는 안 다렸어. 그리고 그 애 생각만 하면 POOP 생각이 나서....”

“???”


“오늘 밤 나 어디서 자?”

“여기서 같이 자자, 난 소파에서 잘게.”

“뭐라고? 아직 안 돼, 짜샤. 너나 나나 옷 안 입고 자잖아.

“응, 그래. 그럴까 봐 비어 있는 선주 감독 방 치워놓으라고 했어. 거기도 방이 .”

“그 일항사 방 옆은?”

“안 돼, 거기는. 그 인간 자기 방에서 벽이라도 뚫을 사람이야.”

“하하하, 어쩌자. 잉카 콜라는 또 무슨 소리야?”

“푸하하하. 요즘 그 양반 잉카 콜라 빼면 할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야. 조각하는 큰딸이 코이카 단원으로 루에 갔다는데 거기 잉카 콜라는 노란색인 모양이야. 그래서 만날 잉카 콜라 이야기만 해. 일항사님은 법 없이도 사실 분인데, 요즘은 오감이 다 노랑 모드야.”


“자기도 세계 각국에 애인 하나씩 있겠다, 그치?”

“그럴 리야 있겠니, 어디. 알렉산드리아에서 아픈 추억이 있긴 있었어.”

“응, 그래. 말해 봐. 듣고 싶다. 네 이야기라면....”

“흠, 이야기하자면 길고 명예 살인 때문에 캡틴이 상륙 금지를 해서 해프닝으로 끝났어. 어떻게 보면 다행인지도 모르지, 뭐. 그때 주먹으로 벽을 쳐서 다친 상처야.”

내가 왼손 주먹을 보여주자, 남희가 따뜻한 손으로 잡고 훈훈한 입김을 불어주었다.

“아주 아팠겠다. 자, 호~.”


“참! 일본에서 사려다가 바빠서 대신 싱가포르에서 선물 하나 샀다.”

서랍에서 예쁜 포장이 된 작은 상자를 남희에게 내밀었다.

“야, 짜샤! 아주 세련됐다. 전에는 뭔 꽃인가 길에서 꺾어다가 신문지에다 둘둘 말아주더니....”

“응, 이젠 월급 많이 받잖아. 열어 봐.”

“그래, 고마워. 신문지에 아무렇게나 싸주더라도 난 괜찮. ~ 반지네! 심플하고. 고맙다, 정말~.”

“자, 이제 일과 시간도 끝났고 나가자. 예쁜 옷 사줄게.”


“그래. 어머니는 잘 계신대?”

“응. 잘 계실 거야. 어머니는 벌써 눈치채신 거 같아.”

“그래? 아니 어떻게?”

“전에 과 애들하고 나미가 충신동 우리 집에 우르르 몰려온 적 있었잖아?”

“응.”

“그때 니가 먹던 라면을 나한테 줬잖아. 군소리 안 하고 받아먹는 걸 보고 어머니 눈이 반짝하시더라. 나중에 유빈 누나도 그 이야기 듣더니 열받아서 ‘그래서 아들 키워봐야 말짱 소용없다니까요. 엄마 앞에서는 그렇게 까탈스럽게 굴던 식이 제 여자 앞에서는 꼼짝 못 하고’라며 핏대를 올리고....”

“어머머, 그랬어? 하긴 네가 표 안 나게 유별났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손을 씻고. 그리고 그 생각나서 요즘 라면 타령이니?”

“응? 아, 한국 라면! 외국에 오래 살다 보니 유효 기간 지난 거라도 정말 먹고 싶어. 그리고 지금은 별로 안 그래. 살아 보니까 땅에 떨어진 거 주워 먹고도 죽는 동물이 없다는 걸 알고 나서. 자, 이제 나가자.”

“응. 나도 지사에 전화해서 ‘HAPPY NINA’ 호 다큐멘터리 찍는 거 의논해야겠다. ‘어린 왕자의 북유럽 항해일지’ 이런 거 한번 만들면 어떻겠냐고.”


“그래, 옷 사고 나서 어디 근사한 데 가서 오랜만에 말리부 한잔하자.”

“응, 나 옷 가격이나 브랜드 그런 거 안 따진다. 그냥 편하면 돼. 그리고 어디 조용한 데 앉아서 알렉산드리아에서 있었던 이야기 해줘, 도시 이름하고 재미있겠다.”

젊은 연인들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HAPPY NINA’ 호가 정박해 있는 로테르담 부두를 뒤로 하고 붉게 저물어가는 에라스뮈스 다리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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