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운엽 Jan 17. 2024

명예 살인과 상륙 금지


"Sparky! Sparky!"

그리스 Port Captain이 내 침실 문을 노크하며 부른다. 서양인들은 통신사를 종종 전기 불꽃이 튀는 것에 비유해 '스파키'라 부른다.

"음냐, 음냐. 가만있자, 여기가 어디지? 흠, 히파티아가 무대 쪽으로 뛰어오고, 그다음엔...."

아직도 히파티아의 향기로운 체취가 느껴진다.

"스파키! 지금 몇 신데 아직도 자냐? "

포트 캡틴 영감의 성화에 잠이 깬 나는 머리맡에 있는 전등 스위치를 켜고 탁상시계를 쳐다보았다. 8시가 다 되어간다. 선박에서는 보통 아침 6시부터 식사를 하고 8시에는 오전 일과가 시작된다. 얼른 창문 암막 커튼을 열면서 대답했다.

"Oh! Captain. Come right in, please."

그제야 영감이 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왔다.

"대리점에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그리고 아랍 국가에서 혼자 그렇게 밤늦게 돌아다니면 어떻게 해?"

영감이 어제저녁에 기다리면서 걱정했던지 들어서자마자 따발총같이 퍼부어댄다. 포트 캡틴은 우리나라 선원들과 혼승을 많이 해 봐서 한국 선원들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고, 직책이 직책인지라 선, 기장의 시어머니 역할을 하다 보니 배에서 외톨이로 지내는 편이다. 통신장과는 업무상 부딪칠 일이 별로 없고 SSB 무선 전화로 자기 집에 전화만 잘 걸어주면 만사 O.K.다.


어이쿠! 어제 대리점에서 아무 일도 못 했잖아. 머뭇머뭇하면서 대답하길 '매니저를 못 만났어요. 오늘 다시 가 봐야죠.'.

"얼른 식사하고 에이전트에 갔다 오게."

선주 감독이 말하고 나가자, 히파티아와 오늘 피라미드 구경을 가기로 약속한 게 생각이 났다. 그녀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서둘러야겠다. 모처럼 구두 광내고, 선글라스도 쓰고 서둘러서 나가는 나를 보고, 갑판 위에서 일하고 있던 선원들이 '어이! 국장님. 멋있게 차려입고 어딜 가요?'라고 말하며 휘파람을 불어대는 선원도 있다. 대리점에 간다며 손을 흔들어주고 걸어서 부두 게이트를 나와 거리를 쳐다보니....


빨간색 스포츠카가 한 대 세워져 있고, 운전석에 히파티아가 얼굴이 뚫린 차도르를 쓰고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채 빙긋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혹시 잘못 본 것은 아닌지 해서 선글라스를 추켜올려서 다시 쳐다보았다. 그녀가 싱긋이 웃으며 'Come on, please. Hurry up!'이라고 깜찍하게 이야기한다. 얼른 옆에 타니 터번을 준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기자 피라미드까지 두어 시간 걸리는데 남의 이목도 있으니 쓰란다. 졸지에 동양의 왕자에서 아랍 왕자로 변했다. 호기심에 우리를 쳐다보는 부두 앞의 이집션을 뒤로하고 시동을 걸어 하이웨이로 향했다.


군데군데 야자수가 서 있고 사막 한가운데 뻥 뚫린 하이웨이에서 히파티아는 엑셀레이터를 힘차게 밟으며 기어를 6단까지 올린다. 나는 약간 겁이 나서 그녀를 쳐다보니 까르르 웃으며 'Don't worry about it. Take it easy!'라며 손을 잡아준다. '에이, 사람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더군다나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와 함께라면'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히파티아도 기분이 좋은지 까르르 웃어댄다. 분홍빛으로 물든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그녀도 살포시 눈을 감았다 뜬다. 시간이 얼마 지난 것 같지 않은데 멀리 피라미드가 보인다. 여행도 누구랑 같이 가느냐에 따라 이렇게 차이가 난다. 냄새나는 사내들과 아무리 멋진 데를 가 봐도 술 마실 때 빼고는 무덤덤한데, 히파티아와의 여행은 왜 이리 가슴이 뛰고 시간도 금방 흐르는지.


'4,500여 년 전, 사막 한복판에 무엇으로 저렇게 큰 돌을 옮겨다가 집권자의 무덤을 만들었을까, 얼마나 많은 민초가 고생하다 죽어갔을까? 단지 죽고 나서 영생을 위한다는 허울에....'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히파티아가 내 손을 잡고 피라미드로 안내한다. 아르바이트로 여성을 위한 가이드를 좀 해 보았다며 친절히 이것저것 설명한다. 물론 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녀의 예쁜 입과 가지런한 하얀 이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서늘한 피라미드 안의 천장과 벽을 쳐다보니 바위 이음새 사이로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 정말 대단하다. 수천 년 전에 이렇게 만들었으니 인류 역사에서 불가사의한 것 중 하나겠지. 부드러우면서 따뜻한 그녀의 체온이 느껴지는 손을 잡고 피라미드에서 내려와 수호신 스핑크스 옆까지 왔다. 거기에 있는 낙타를 원 달러에 타 보았다. 낙타 타기는 말타기보다 쉽다. 낙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면 낙타 주인이 이끄는 대로 올라타서 정해진 코스를 한 바퀴 돌면 된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처럼 멋지게 타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볼 건 다 보고 히파티아의 스포츠카에 올랐다. 덕분에 히파티아와 함께한 내 생애 최고의 여행이 됐다.


오는 길에 해변의 차이니스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으로 샥스핀 수프에 해물 볶음밥을 먹었다. 물론 쌀은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안남미 종류였다. 먹고 나면 금방 소화되는 찰기가 없는 쌀이다. 콜라를 시키니 펩시를 갖다준다. 코카콜라는 없냐고 물으니, 히파티아가 아랍 국가에서는 코카콜라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한다. 같은 미국 회사인데 코카콜라를 이스라엘 사람이 마시니 중동에서 불매운동이 일어나 펩시가 어부지리로 시장을 장악하게 되었단다. 미국 문화와 자본주의의 상징인 코카콜라가 없는 나라가 쿠바와 북한이라던가.


기자 가는 길은 서둘러 갔지만,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올 때는 바쁜 것이 없어서 히파티아와 이야기를 하며 천천히 왔다. 그녀는 중동 아랍 국가에 별 애착이 없단다. 어렸을 때는 멋모르고 컸는데 지금은 이슬람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종교와 체제의 모순 때문에 너무 힘들어 기회만 주어진다면 자유스러운 다른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며 애잔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붉은 노을이 지는 아름다운 알렉산드리아의 해변에 차를 세우고 야자나무 아래에서 가볍게 포옹하고 긴 입맞춤을 했다.

"Do you want to go to Korea with me, Hypatia?"

입술을 떼며 내가 묻자, 그녀는 서글퍼 보이는 눈동자로 내 눈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국장! 국장! 방송 듣는 즉시 선장 집무실로 오세요!"

다음 날 아침에 또 히파티아를 만나려고 상륙 준비를 하는데 선내 방송이 나온다. 캡틴 집무실로 가니 그리스 포트 캡틴과 대리점 매니저가 선장과 함께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내가 나타나자, 세 명의 인상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어이, 국장! 자네 대리점에 업무차 간다더니 이틀 동안 도대체 뭘 한 거요? 매니저는 당신 코빼기도 못 봤다는데."

캡틴이 흥분을 가라앉히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얼른 대답할 말을 못 찾아서 우물쭈물하자, 포트 캡틴이 노려보며 말을 잇는다.

"Sparky! Why didn't you go to the agent for two days? Do you know about 'Honor Killings'?"

(국장! 이틀 동안 왜 대리점에 안 들렀는데? '명예 살인'에 대해 알아요?)

엥? 대리점에 가기야 갔지, 첫날에.... 근데 누가 죽어? 날 죽인다는 말이야, 뭐야?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좌중의 눈치를 보는데 캡틴이 목소리를 높인다.

"이슬람 국가에서 한 해에 수백 명이 명예 살인으로 살해되고 있다는데 대책 없이 대리점 아가씨와 백주에 손잡고 다녀? 국장! 당신 정신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이어서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대리점 매니저가 눈에 힘을 주고 말한다.

"Radio Officer, Listen! If Hypatia is killed by her family, you like it? This is an Islamic country. Very dangerous. Big problem!"

(통신장, 잘 들으시오! 만일 히파티아가 가족에게 살해되면 좋겠소? 여기는 이슬람 국가요. 매우 위험해요. 문제가 크다고!)


흑! 어떡하나? 히파티아가 외국인을 만나다 말로만 듣던 명예 살인을 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네. 어마무시한 나라로군. 만일 명예 살인이 그녀에게 일어난다면? 걍 둘이 튈까.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왔다 갔다 하는데 캡틴이 단호하게 말했다.

"국장! 여러  할 것 없이 시말서 써오고, 선장 직권으로 알렉산드리아 출항할 때까지 상륙 금지요! 할 말 있소?"

힘없이 서 있는 나를 보고 평상시 친하게 지내던 포트 캡틴이 이제 됐다는 듯 손짓으로 가보라 한다. 그 순간 나는 비에 젖은 짚 더미처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통신실에 도착해서 문을 안에서 걸어 잠갔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범벅이 되어 미친놈처럼 흐느꼈다. 히파티아에 대한 그리움은 이내 절망으로 바뀌었다. 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주먹으로 벽을 치며 이를 앙다물었다.


지금도 어쩌다 이슬람 뉴스를 접하면 히파티아의 해맑은 미소가 떠오르며 가슴이 아려온다. 더욱이 술 한잔이라도 걸치면 그때 다친 주먹이 시리다. 내 안의 최고 미인 히파티아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아 목이  알렉산드리아 해변의 물안개 같은 것이 눈 앞을 가린다.


긴 이야기를 마친 내게 남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히파티아와 전혀 의도되지 않은 이별은 잔혹함이라고 생각해. 그러한 열병에 대한 기억으로 우리는 살아가는 게 아닐까? 맛있는 것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열병도 치러 본 사람이 그 의미를 알겠지. 너에게 더 뜨겁고 아름다운 다음 사랑이 올 거로 생각한다. 히파티아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영원히 간직해.”

작가의 이전글 알렉산드리아의 최고 미녀 히파티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