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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Jan 21. 2024

로테르담의 상큼한 바다



뉴욕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고 파리에 에펠탑이 있다면 로테르담에는 에라스뮈스 다리가 있다. 바다보다 낮은 육지, 그 바다와의 투쟁이 네덜란드 역사 자체인 셈이다. 알프스의 양치기 소년과 함께 우리가 어렸을 때 책에서 본 자기 팔로 둑을 막은 어린 네덜란드 소년. 낙농의 나라였던 그들이 지금은 세계에서 키가 제일 큰 국민이 됐다. 남성 평균 키가 180cm, 여성은 170cm가 넘는다고 한다. 어째 오다가다 본 네덜란드 사람이 호리낭창하고 늘씬늘씬하더라니. 알프스에서 시작하여 북유럽을 지나 북해로 흘러가는 라인강의 끝자락. 그 마스 강변에 자리 잡은 네덜란드 최대 산업도시이자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로테르담 항구. 네덜란드의 풍차, 젖소와 튤립에 대한 선입견을 바뀌게 한 도시. 네덜란드는 16세기에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던 리더 Oranje 가문을 기려 오렌지색에 열광한다. 축구 국가대표팀도 오렌지 군단이라 하여 오렌지색 유니폼에, 응원단과 거리도 오렌지색으로 도배된다.


남희와 나는 노천카페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백여 년 전부터 이 운하를 운항하다 퇴역한 배들이 전시된 해양박물관을 지나 에라스뮈스 다리를 향하여 걸었다. 배로 돌아가 쉬려면 밤이 지쳐서 숨기 전에 우리는 저 다리를 건너야 한다. 남희의 팔짱 낀 손을 가볍게 흘리며 어깨를 안았다. 목덜미의 긴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어 부드럽게 헤집는다. 동시에 어깨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다리를 향해 걸으면서 손으로 남희의 등을 간지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역시 걸리는 게 없다. 속눈썹을 부르르 떠는 남희.
“춥니? 왜 떨어?”
내 능청맞은 말에 목소리가 잠기는 남희.
“몰라, 등을 만지니까.”
“그러니? 난 온몸이 성감대인데....
“야, 너 프로 아냐?”
“애고, 뭔.
“짜식이 싱겁긴. , 담배 하나 주라.”
“응~.”
불도 줘.”
“네, 여기.”
손으로 바람을 막으며 라이터를 켜서 서로 담뱃불을 붙인다.
“근데, 나미야. 난 여자들 담배 피우는 거 보면 참 섹시하게 보인다.”
“그래서?”
“서양 영화 같은 데서 여자가 담배를 물고 있는 빨간 입술을 보면 뽀~하고 싶어.”

“야, 넌 뭔 맛으로 술 마시냐? 만날 졸면서.
“응, 난 술 마시면 행복해.”
“너 중독 아냐?”
“글쎄, 술 마시면 기분이 좋아져서 나쁜 일도 다 좋게 생각되고 그러다 보면 디아블라를 만나게 된다.”
“뭐라고? 그거 또 여자 귀신이냐?”
“행복의 여자 구신이야. 그래서 손잡고 같이 꿈나라로 가.”
“웃~기고 있네. 그래서 아까 그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뭔가를 쪽쪽 빠는 시늉을 했냐?”
“난 기가 막히게 맛있었는데.... ”

“야, 근데 거리에 전봇대가 없다. 전깃줄, 전화선 다 땅속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전찻길만 빼고.”
“응, 정말 그렇네. 나미 너, 누가 공돌이 출신 아니랄까 봐 눈썰미도 좋다. 하하하. 로테르담이 이차대전 때 폐허가 된 후 보수하지 않고 새로 만든 도시라 그런 모양이다. 우리나라처럼 비슷비슷한 아파트가 아닌 큐브 하우스도 있고, 세계 건축 문화 도시라고도 하잖아.”
“어! 저기 말로만 듣던 연주차도 있네. 벌써 두 번째 본다.”
“응, 정말! 저기 점자처럼 보이는 책이 악보인 모양이지?”
“그래. 저 책을 집어넣으면 차에서 연주가 되나?”

어느덧 백조 모양의 우아한 에라스뮈스 브리지에 들어선다.
학자이자 인문 철학자로서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공부한 자국인 Erasmus의 이름을 딴 아름다운 다리. 엄청나게 많은 학생이 그의 이름을 딴 에라스뮈스 장학금을 받고 공부한단다. 그 학생들이 사회에 나와 제 역할을 할 땐 네덜란드의 우호 세력에 자기 나라의 중심에 설 거란 생각이 든다. 그가 일주일 만에 쓴 어리석은 여신의 풍자와 해학 이야기 '우신예찬'은 수백 년간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등 많은 이에게 영감을 주고 지금도 읽어야 할 책 목록에 들어간다. 어떤 이는 수십 년간 글을 써도 대부분 잊혀 사라지는데.... 의 책에서 인간은 어리석음으로 인해 온갖 근심과 걱정을 벗어날 수가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삶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아, 상큼한 바다!”

남희의 말에 내가 대꾸했다.

“여긴 강이라니까. 라인강 지류 마스강이야. 바다는 한 이삼십 킬로 더 가야 해.”

"어이, 범생 씨! 캄캄한데 강이나 바다나 상큼하면 됐지, 모처럼 왔는데 초치긴.”


에라스뮈스 브리지에서 로테르담의 아름다운 야경에 넋을 잃고 보고 있는 남희를 뒤에서 부드럽게 껴안고 그녀의 하얀 목에 그리고 향기로운 머리에 입술을 비비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떼 아모, 나미....”

기대 오는 그녀의 보드라운 살과 체중을 온몸으로 느낀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내 얼굴과 목을 간지럽히고, 알 수 없는 저 깊은 곳에서 밤하늘의 불꽃처럼 환희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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