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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Feb 11. 2024

Carpe Diem, 지금을 즐겨

‘HAPPY NINA’ 호의 매선


노르웨이에서 이번 항차 하역을 모두 마치고 ‘HAPPY NINA’ 호는 빈 배로, 공해상으로 나온다. 선주로부터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경제속력으로 지중해를 거쳐 그리스 쪽으로 가란다. 부서별로 인벤토리를 작성하고.... 그동안의 경험으로는 이런 경우 배가 팔리는 것이다. 새로운 선주에게 배를 인도해 주기 전에 배가 매선 됐다는 소식이 들리면 일부 선원들이 동요하여 일을 안 하고, 꼬장 부리고 선내 비품을 버리는 등 정상적인 운항에 지장을 줄 수도 있기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러한 사실을 바로 알려주지 않는다.


“기관장님은 배 팔리면 어떻게 할 생각이오?”

식사를 마친 후 캡틴이 말문을 연다.

“허허, 나야 배 팔리면 할멈 엉덩이나 두드리고 손주 녀석들 재롱 보다가 회사에서 배 나가라면 다시 나와야지요.”

“쵸사는?”

“네, 저도 매선 수당 받아서 그거 다 쓰기 전에 자리 알아봐야죠.”

“그래, 일기사는?”

“저도 쵸사나 마찬가지입니다. 별 뾰족한 수도 없고요.”

“국장만 남았네?”

“네, 총각이 귀국해야 별일 있습니까? 저는 한국 맨닝 회사 거치지 않고 독일 오너 배에 다이렉트로 취업하려고요. 독일 다니는 배를 구해 타야죠.”

“흠, 한국 면허장 말고 어디 면장이 있소?”

캡틴의 질문에 대답한다.

“파나마와 라이베리아 1급 통신사 라이선스가 있습니다.”

“그래요. 독일 국적선 말고 그 두 나라 선적이면 탈 수 있겠구먼.”


북해의 차가운 해풍을 온몸으로 받으며 통신실 옆 덱에 나와 있다. 남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던 바로 그 장소에. 그녀의 심장이 뱃고동 소리같이 내 가슴안에서 힘차게 울리는 것 같다. 습기가 많은 찬 바닷바람이 마치 남희 머리카락이 내 볼을 간지럽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물안개가 스쳐 가며 시야가 흐려진다. 혜린이 누나나 유럽에 오래 살았던 사람은 이곳의 안개와 가스등의 추억이 많이 있을 것이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도 안개와 스산한 바람 그리고 을씨년스러운 가스등으로 프롤로그를 장식한 기억이 난다. 뱃고동이 길게 울려 퍼진다. 안개 항해 중에는 자주 뱃고동을 울려준다. 나 여기 있으매 지나는 선박끼리 서로 사랑하지 말자고. 배끼리 사랑하면 난리 나는 거지. 곧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경도 0도를 지나게 된다. 배를 처음 탔을 때 초짜 선원을 놀려먹는다고 적도와 날짜 변경선에는 해상 브이가 설치되어 있으니 잘 찾아보라고 고참 선원들이 웃으면서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래서 적도를 지날 때 적도제를 지내고 해상 브이 인증사진을 찍을 거라고 시간 넘게 바다만 뚫어지게 쳐다본 적이 있다.


신항로 개척 시대에, 지도에 기준선을 정하는 문제가 생겼다. 당시 유럽의 각 나라는 자기네 국가를 지나는 기준 자오선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제 교류가 많아지니 통일된 것이 필요했다. 워싱턴에서 국제 자오선 회의가 열려 영국 그리니치 왕립 천문대를 지나는 선을 본초자오선으로 하기로 국제적인 합의를 봤다때는 시간의 기준도 나라마다 다 달랐다. 지도의 기준선인 본초자오선이 결정되니 시간의 기준도 영국의 그리니치로 채택되어 동경 180°와 서경 180° 지점에 날짜변경선이 설정되었다. 그래서 시간으로 지구에서 하루가 가장 먼저 시작하는 곳이 뉴질랜드를 비롯한 태평양의 조그마한 섬들이다. 또한, 하루의 시작을 정오에서 지금과 같이 자정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렇게 결정된 자오선은 당시 주로 항해에 많이 이용하였는데 선박이 대양 항해할 때 SEXTANT를 사용하여 태양, 달이나 별자리의 고도를 측정하여 현재 위치를 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폭격기가 영국에 공습하여 막대한 피해를 줬다. 특히 독일 파일럿은 야간 공습에 섹스턴트를 사용하여 타격 목표에 상당히 정확하게 폭격해 영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 흑역사가 있다.


함부르크 무선국에서 트래픽 리스트를 알리는 시간이 되었다. 수신기를 켜니 본선 콜사인을 호출한다. 8MHz 워킹 주파수로 바꿔 전보를 수신한다. ‘HAPPY NINA’ 호가 매선 됐으니, 그리스의 피리우스 외항에서 새 선주에게 인도해 주고 계약 기간이 남은 선원은 알렉산드리아 독에서 수리 중인 독일 선주 파나마 국적인 Car & Bulk Carrier ‘HAPPY LATIN’ 호에 전선 하라는 전보이다. 계약 기간이 남았는데 전선을 원하지 않고 귀국하는 선원은 2개월 본봉에 해당하는 매선 수당을 지급한단다. 전보를 타이핑해서 캡틴에게 갖다주니 최소 당직자를 제외한 전 선원은 부원 식당 휴게실에 모이라고 했다. 나는 선내 방송을 하고 팩시밀리 기상이 나오는 시간이라 통신실에 남았다.




기상도를 브리지에 갖다주고 INMARSAT 전화기를 든다. 번 전화했으나 남희가 바쁜지 연결이 되지 않았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긴 벨 소리 끝에 수화기 건너편으로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린다.

"할로? 구텐 타크!”

남희의 구슬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가 위성 전화로 들린다.

, 나야!”

“어~ 그래. 자기 어디야?”

“응, 북해. 노르웨이에서 나왔어.”

“자기, 전화 여러 번 했지? 안 봐도 알아. 여기저기 슈팅 다니느라 바빴거든, 잘 있는 거지?”

“응, 배 팔린대.”

“그래?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응, 더 잘 됐는지도 몰라. 독일에서 남미 다니는 자동차, 벌크 겸용선으로 전선하게 될 거야.”

“그래~, 그럼 계속 보겠네. 와, 신난다.”

“잘 있는 거지?”

“그럼~, 난 매일매일 얼마나 재미있고 행복한데.”

금방 헤어졌는데 또 보고 싶어 미치겠더니만, 남희 목소리를 들으니 살 것 같다.

“그래, 열심히 살아. 우리 사랑 더 해야지. Carpe Diem!”

그녀의 유쾌한 목소리의 여운이 귀에 오래오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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