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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Feb 23. 2024

알렉산드리아의 ‘HAPPY LATIN’ 호



엄청나게 푸른 바다라고 해야겠다. 호주 대산호초의 그 푸른 바다보다도 더 파란 바다. 에게안 에어라인의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에게해의 모습이. 점점이 보이는 햇볕에 반사된 회색 섬, 그리고 하얀 요트. 저 바다에 풍덩 빠지고 싶은 유혹이 는다.


간간이 비행기 창문을 내려다보다가 졸고 있는 내 귀에 속삭이는 일항사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스쳐 지나간다.

“선장님. 제가 볼 땐 확 밀어붙여 할 땐 오히려 한 템포 늦추시는 것이 잘 이해가 안 되던데요.”

“흠. 자네도 최고 책임자가 되어 보소. 다들 알고 있거든, 바쁜 거와 중요한 것의 차이를. 그런데 나까지 서둘러 보게. 사고 날 확률이 더 커진다네. 순간적이지만 뭐가 더 중요한 건지 자꾸 생각하는 거야.”

캡틴의 대답에 한참 생각하는 일항사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데, 국장 괜찮을까요?”

더 작아지는 일항사의 목소리와 이어지는 캡틴의 속삭임.

“음, 왜 걱정되는가?”

“통 제정신이 아닌 거 같아요. 확실히 맛이 간 거 같은데....”

“자네는 저런 적이 없었는가?”

“글쎄, 좀 심한 거 같아서요. 전에 선장님 방에서 시바스 마실 때도 벽 보고 웃으면서 혼자 중얼거리고, 마치 정신 나간 사람 같아요.”

“후후후. 미친 거 같다고? 좋을 때네. 젊어서 그래. 이 나이 돼 보소. 좋아좋다고 표현하지 못할 때가 많잖소? 나쁜 놈이 되는 거 보다 미치는 게 더 낫지.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으니, 심장이 뛰고 있는 증거라고.”

“....”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전벨트를 매라는 안내 방송. 그리고 대리석을 깎아 빚은 듯 아름답고 아담한 그리스 스튜어디스의 친절한 안내. 창가에서 내려다보이는 ‘지중해의 진주’라 불리는 알렉산드리아는 밝은 회색빛 도시이다. 벌써 몇 번째 오는 항구다. 후덥지근하다. 양복저고리를 벗어 손에 든다. 대리점 직원이 안내하는 승합차에 가방을 싣고 차에 탄다. 사막의 먼지와 매캐한 도시 매연과 함께 치마 같은 하얀 옷을 입고 거리를 누비는 이집션들. 마차를 끄는 들이 그들과 함께 도로를 누비고 있다. 새 차보다 더 많은, 굴러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의 폐차 직전의 찌그러진 차들. 대한 국민이 만든 티코도 반갑게 지나간다. 갑자기 가슴이 아려온다. 클레오파트라가 환생한 듯 아름답던 그 히파티아! 그녀가 숨 쉬고 있는 도시에 다시 왔다. 그때 다친 주먹을 가볍게 쥐어본다. 스르르 아려오는 왼 주먹. 겹쳐오는 남희의 웃는 모습.

그래, 나미. 네가 훨씬 좋아....


알렉산드라 역 옆의 ‘로만 원형극장’을 지난다. 규모는 작으나 원 틀을 유지한 채로 곳곳에 부서진 기둥과 조각품이 보인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는 로마식 원형극장은 마침 서쪽으로 넘어가는 태양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로만 원형 극장 안의 가운데 돌판 위에 서서 ‘Hola, Hola! Uno, Dos, Tres.’라고 말하면 극장 안에 크게 골고루 퍼지는 공명 포인트. 어찌 그 오래전에 그런 걸 알고 이런 건축물을 만들었는지, 우리 민초는 모르는 거 투성이인데...부두 쪽으로 다가가자, 곳곳에 모스크보다 작은 하얀 탑들이 보인다. 일항사가 운전기사에 저건 뭐냐고 묻는다. 서툰 영어로 친절하게 대답해 준다. 자기들은 비둘기 고기를 좋아하는데 저 하얀 탑 바닥에 날개를 부러트린 비둘기 암컷을 놓아두면 그 새가 우는 소리에 수컷들이 탑 맨 위의 구멍을 통해 들어와 도망가지 못하고 잡힌다고. 어찌 한 번 해볼 거라고 탑 안에 들어왔다가 불귀의 객이 되는 불쌍한 수놈들. 인간사도 매양 이런 거 아닐까?


곧 거대한 화물선이 눈앞에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선박은 서양에선 여성 명사로 말한다. 이는 선박이 여성처럼 화장 즉 도장을 하는 데다 여성의 이미지처럼 부드럽게 항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한때 여성이 배에 타면 부정 탄다고 하여 금기시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여자 선원도 많아 여성 선장도 나오고 항해사의 최고봉인 여성 도선사도 배출됐다.


선박이 만들어지면 인도 전에 선주가 조선소에 와 배 이름을 부여하는 '명명식' 행사를 연다. 선박의 탄생을 세상에 알리고 무사 운항을 기원하는 중요한 행사이다. 오랜 시간 작업자들의 피와 땀, 열정이 녹아있는 선박의 이름은 대부분 여성 명사로 짓는다. 명명자가 “이 배를 ‘HAPPY NINA’ 호로 명명한다.”며 금도끼로 명명대를 내려치면 선박과 행사장 간에 연결된 줄이 잘리면서 걸려 있는 박이 터지고 꽃종이가 날린다. 명명식 행사에서 작은 도끼로 밧줄을 끊는 역할은 주로 선주의 부인이나 딸이 맡는데, 이 여성을 God mother, 또는 Sponsor라고 부른다. 하지만 남성의 권위가 막강한 중동에서는 여전히 터번 두른 남성이 명명자로 나선다.


‘HAPPY LATIN’ 호! 안 선장님과 일항사, 그리고 나와 남희의 디아블라가 또 동고동락할 아름다운 그녀. 이제 출항하면 어디로 갈까? 미다스의 손, 남희가 활약하고 있는 독일에는 언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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