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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Feb 24. 2024

수에즈 운하 앞에서 방황하는 유령선



반갑게 맞이해주는 기존 선원들. 전에 다른 배에서 같이 승선했던 선원들이 몇 명 보인다. 뭐, 배 타는 우리들은 어디서나 만나고 또 헤어지고 그렇지, 뭐. 같은 회사 소속의 선원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귀국할 전임 통신장과 인계인수한다. 그리고 세 명의 사관은 손을 흔들며 떠난다. 내일 아침에 Pilot가 승선해서 일단 외항으로 배를 뗀다고 한다.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일항사와 전에 다른 배에서 같이 탔던 일기사가 노크하고 들어온다. 반갑게 하이 파이브를 짜악~ 소리 나게 하고 냉장고를 열어본다. 캔 맥주와 마른안주가 보여 꺼내서 같이 앉아 마신다.


‘HAPPY LATIN’ 호는 라틴 아메리카를 주로 간다기에 대화는 남미에 대한 이야기로 왔다 갔다 한다. ‘아르헨티나는 백 년 전에 지하철이 다녔는데 우리 조상님은 가마나 지게 메하셨냐?’로 해서 ‘공기가 좋아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데 지금은 지명을 바꿔야겠다는 거 하며, 남미 람은 아무리 심각해도 농담을 잃지 않는다는 버전에서, 남미 세뇨리따들은 어렸을 땐 기가 막히게 예쁜데 나이 들면 왜 그리 뚱뚱해지냐는 둥’ 기승전녀 이야기하며 맥주 깡통을 비웠다. 일항사는 그래도 눈이 말똥말똥한데 나는 맥주만 마시고 있다가 드디어 하품을 시작한다. 일기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희의 환영과 함께 전에 수에즈 운하 앞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야! 오늘 저녁 반찬 뭐냐?"

선미에서 오징어 낚시를 하고 있던 갑판장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갑판부원에게 묻는다.

“에이, 오징어 국에 절인 양배추밖에 없어요.”

갑판부원의 대답에 갑판장의 양미간이 찌푸려지면서 ‘우~ 씨! 그걸 먹고 어떻게 일을 하라고, 젠장. 이 노무 그리스 선주 놈들은 한국 선원 알기를 개똥보다 못하게 여기니.’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벌써 한 달째, 내가 타고 있는 화물선은 수에즈 운하 앞에서 톤당 3달러 정도 하는 운하 통행료와 대리점 비를 내지 못해 지중해상의 이집트 ‘Portside’ 항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운하 통행료는 선종, 톤수와 화물 적재 여부에 따라 다르다. 주부식도 바닥이 나고 낚시만 던지면 잡히는 오징어를 낚아서 국 끓이고, 무쳐서 반찬 대신 먹는 등 근근이 연명하고 있었다. 어쩌다 먹는 오징어회야 맛이 기가 막히지만, 먹을 게 없어서 그것만 먹는 선원들은 질려서 오징어 냄새 맡기도 싫을 것이다. 김치 떨어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지나가는 이집트 상인의 작은 쪽배에서 양배추를 사다가 고춧가루 없이 소금에만 절인 하얀 양배추를 먹고 있었다. 그나마 안 굶는 게 다행이다. 기름도 다 떨어져 가고 있어 발전기를 끄고, 밥할 때만 돌린다. 급기야 빈 침실의 침대를 뜯어다가 나무 불을 피워 밥을 해 먹어야 할 지경이 되었다. 야간에 선박 충돌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박등을 켜야 하는데 이것도 기름이 떨어져 발전기를 돌릴 형편이 안 되어서 호롱불을 켜 들고 선수와 선미에서 당직을 서고 있다. 유령선이 따로 없었다.


부터 선박왕 오나시스와 함께 주도적으로 중고선을 사들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박을 보유한 국가로 부동의 해운 왕국이었던 그리스 선주들이 해운 불경기에 하나둘씩 유동성 위기에 처하기 시작했다. 그 영향이 본선에도 미치는 모양이다. 세상에 대리점 비를 얼마나 안 주었으면 화물을 가득 싣고 운항하는 배가 해상 미아가 되어 수에즈 운하 앞에서 이렇게 거지같이 잡혀 있다니, 화주에게 지불해야 할 클레임도 만만치 않을 텐데. 선원들의 불만도 차츰 고조되어 통제가 잘 안되고, 상급자의 말이 잘 안 먹힌다. 잘 먹으려고 배를 탄다는 선원도 있는데 주부식이 다 떨어져 가고 있으니 난감한 상황이다. 매일 그리스 ‘Athinai’ 무선국에서 선주의 전보가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기를 한 달째, 이윽고 전보 한 통이 날아온다. 대리점과 모든 것이 해결되었으니 기름과 주부식을 싣고 운하를 통과하라는 간단한 전보이다. 공치사 받을 일도 없지만 미안하다는 이야기 한마디 없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그리스 선주‘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유대인 ‘샤일록’도 이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기름과 주부식을 싣고 운하를 향해 출항하려는데 이번에는 한국의 송출회사에서 선주로부터 선원들 급료를 석 달째 못 받고 있다고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출항하지 말고, ITF에 이 상황을 고발하라는 긴급 전보가 온다. 국제 운수 노조 연맹에서는 임금체불을 최우선 처리한다. 애고, 돈 벌려고 배를 타서 이역만리 낯선 곳에서 파도와 외로움과 싸우고, 먹는 거 부실한 거야 참겠는데 월급이 안 나온다니! 이를 알게 된 선원들의 분위기도 살벌해진다. 지금 당장 하선하겠다는 선원도 나오고, 당연히 일은 안 하고 이쪽저쪽에서 모여서 웅성대고 있다. 잘못하면 폭동이라도 일어날 판이다.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부서장과 직장급 이상의 긴급회의가 열리고 대책을 논의했으나 선주가 돈으로 해결할 일에 무슨 대책이 있겠는가.


일단 동요하는 선원들을 달래기 위해 캡틴이 전 선원들을 이게 했다. ‘이렇게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여 본선 책임자인 선장 본인도 참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을 시작하는데 평소 불평불만이  기관부 선원 한 명이 욕설과 고함을 치며 월급 못 받고는 배 못 타겠으니, 집에 보내 달라고 소동을 피웠다. 군기반장 격인 일항사와 몇몇 선원들이 간신히 말려서 제지했다. 전체 회의에서 별다른 소득이 있을 수 없었고 이런 상황을 송출선사에 타전하였더니 부산에 있는 선원 맨닝 회사에서 선주로부터 임금을 받지 못해도 선원 가족에게는 회사에서 월급을 밀리지 않고 지불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회사 지시에 따르라는 회신에 선원들이 잠잠해진다.


선원들은 승선 중에 하루 8시간씩 일을 해서 월급 값을 해야 하는데 통제가 안 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을 시키고, 또 일할 형편이 안 되어 선미에서 삼삼오오 낚시한다. 그런데 본선이 닻을 내린 곳은 다른 고기는 하나도 안 잡히고 오징어만 낚인다. 질리도록 먹고, 남은 것은 배를 따서 철사에 끼워 배 난간에 차곡차곡 걸어 놓았다. 일주일여 만에 선원들 급료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부산 회사에서 출항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동안 우리 선원이 일은 안 하고 매일 낚아서 말린 오징어는 선미 난간을 다 덮고도 남아 선실 복도에도 빈틈없이 걸려있어서 처치 곤란할 정도였다. 그래서 항해 중에 두고두고 오징어를 먹고도 남아, 귀국하는 선원들에게 몇 축씩 싸주었다. 또, 정박 중에 다른 배 선원이 놀러 오면 가는 길에 선물로 주었다. 그때 오징어를 너무 많이 잡아먹어서 그런지 이제는 오징어 보기가 무섭다. 지중해 오징어 유령의 저주가 붙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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