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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Mar 01. 2024

버큰헤드 정신과 타이태닉 호의 영웅들



‘HAPPY LATIN’ 호는 이탈리아 북부 사보나 항에서 남미 뻬루로 갈 자동차와 중장비를 반나절 만에 다 싣고 숨 가쁘게 출항했다. 소피 누고 뭐 볼 시간조차 없다는 말이 있듯이 상륙 나가 구경할 겨를도 없어 부두 근처에서 잠깐 땅만 밟고 들어왔다. 그리고 부두 앞에서 이탈리아 하우스 와인과 사딘, 하몬, 길표 피자 등을 사 왔다. 이탈리아가 피자 원조라고 하던데 피자 종류가 백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길에서 파는 1불도 안 하는 피자가 상당히 맛있었다.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것이 대단해서 세월이 한참 지났는데도 그 맛의 여운과 감동지금까지 남아 있는 게 참 희한하다.


이탈리아에서 뻬루까지 제법 긴 항해다. 지중해를 빠져나와 대서양으로 들어서니 매서운 바람과 파도가 장난이 아니다. 어느 바다든 하지 않은 바다가 어디 있겠느냐만, 제일 고약한 바다가 겨울 북대서양인 것 같다. 오죽했으면 유독 북대서양만 겨울에 항해할 때 만재 흘수선이 따로 정해져 있어 안전을 위해 화물을 많이 싣지 못하게 규정되어 있겠나. 그게 타이태닉 호 침몰 사고 때문으로 알고 있다. 그 사고를 계기로, 국제적으로 ‘해상 인명 안전조약(SOLAS)’이 체결됐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인데, 조약은 모든 상선과 여객선에 승선한 인명의 안전 문제를 우선으로 강제 규정하여 그나마 승객과 선원들을 위해 다행한 법이다.


‘HAPPY LATIN’ 호가 북위 41도 서경 49도쯤 지나자, 캡틴과 기관장이 조니 워커 한 병과 마른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브리지에 올라가자고 한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따라 올라갔더니 당직 근무 중인 일항사와 조타수를 데리고 윙 브리지로 갔다. 캡틴이 입을 열었다.

"이 근처가 타이태 호가 침몰한 지역이오. 같이 명복을 빕시다."

그리고 ‘왕과 나’에 나오는 율 브리너같이 한 손으로 얼굴과 가슴 앞영어 대문자 ‘L’ 자를 성호처럼 그린다. 바다를 향해 고개를 숙여 절하 한바다에 위스키를 세 번에 나눠서 뿌렸다.


"당시에 여객선들은 정시에 도착하기 위해 경쟁하는 시대였는데 석탄을 때는 증기선인데도 그 큰 배가 시속 20노트로 달렸다네. 지금 우리 배가 벙커 C를 써서 평균 15노트로 가는 거에 비하면 백여 년 전에 대단한 거였지. 타이타닉 호가 여길 지날 때 달도 뜨지 않았고 바다는 잔잔했대요. 만약 달이 떠 있었으면 망루에서 전방을 견시하는 갑판원이 떠다니는 빙하를 미리 볼 수 있었을 테고, 게다가 바람이 불었으면 파도가 빙산에 부딪쳐 물보라에 빙하가 쉽게 눈에 띄어 역사가 바뀌었겠지. 배침수되고 선장은 조난신호를 보내라고 지시했는데 당시 주변에 있던 십여 척의 배가 구조하기 위해 달려왔다지. 그런데 너무 멀리 있었어. 가장 가까운 거리에 캘리포니아 호가 있었지만, 그 배에서는 몰랐대요. 불과 20km 정도의 거리에 빙산에 둘러싸여 항해를 못 하고 정박 중이었는데, 한 명밖에 없는 통신사가 자는 야간이라 조난 통신을 받지 못했다네. 더욱 기가 막힐 일은 캘리포니아 호의 수습 갑판원이 밤하늘에 터진 조난 신호탄을 보고 선장을 깨우러 갔지만, 감히 선장을 깨우지 못했다네. 당시에 선장은 일반 선원이 마주 보기도 어려운 지존이었대요."

우리는 같은 선원 입장에서 많은 생명이 사라진 이 바다 앞에서 침울해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안 선장님이 말을 이어갔다.

"타이태 호 캡틴은 배가 계속 침수되자 구조선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해서 구명보트를 내리라고 지시했지.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모르는 승객들은 보트에 옮겨 타라는 말에 반신반의했어요. 자기 짐도 많았고, 이 추운 겨울에 이렇게 큰 배를 놔두고 구명보트에 탄다는 게 더 겁이 났겠지. 그러나 곧 배가 비스듬히 기울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구명보트를 타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다네. 문제는 구명보트가 부족해 승객의 절반밖에 태울 수 없었어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엄청난 재난이 닥쳐오자, 그 아비규환 속에서 승객들은 제각각 용기, 비겁함과 희망, 절망감들이 적나라하게 나타났겠지. 그러나 그날 밤 대서양 한가운데서 20세기 인류의 감동적인 드라마가 연출됐다네. 선원들은 사방을 뛰어다니며 승객들이 구명복 입는 것을 도와줬지만 정작 자신은 입지 않았고, 하틀리가 지휘하는 8명의 악단은 배가 침몰하기 전까지 곡을 연주했고 그 연주가 그들의 생애 마지막 연주가 되고 말았지. 우체부는 우편물을 지키려고 동분서주하고, 기관부 선원들은 캄캄한 밤중에 전기가 꺼져 구조선이 혹시 자기 배를 못 찾을까 봐 마지막 순간까지 발전기를 지키고 있었답디다. 통신사들도 선장이 그만 퇴선하라고 해도 가라앉는 통신실에서 끝까지 남아 조난신호를 보냈다네. 아내를 구명보트에 태운 다음, 부녀자와 아이 우선이라 성인 남자는 탈 수 없다는 대답을 듣자 정중하게 뒤로 물러선 신사도 있었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 충분히 구명정에 탈 수 있었던 이도 ‘명예만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보트 승선을 거부하고 가진 옷 중에 제일 좋은 예복을 입고 마지막을 맞았다지."

잠시 쉬었다가 캡틴이 말을 이어갔다.


"부딪힌 지 시간 여 만에 타이태 호는 영원히 바닷속으로 사라졌어요. 배가 물에 가라앉은 후에 깜깜한 밤, 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지르는 어마어마한 비명과 아우성, 자기 가족을 걱정하는 통곡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거기 있는 모두 그 끔찍한 아비규환 에서 너무 가슴 아프고, 참담한 기분이었겠지요. 영하의 차가운 바다에 떠 있던 사람들은 저체온증으로 대부분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영상 20도의 해수에서도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수 있거든. 당시 바닷물에 빠졌다가 나온 이등항해사의 말이 ‘마치 수백 자루의 칼이 몸을 찌르는 느낌’이었다고 해요. 지옥이 따로 없는 거지.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이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답디다. 스스로가 비겁한 행동을 한 게 아니었어도, 그 트라우마는 쉽게 없어지지 않은 모양이오. 당시 어린아이였던 어떤 생존자는 어른이 되어서 운동 경기를 보러 가지 못했대요. 관중들의 함성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거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인 거겠지."

일항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게요.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게, 아~ 단골집에서 돈이 없어 외상을 안 주면 스트레스야 받겠지만, 그런다고 장애까지 온답니까?"

푸하하~ 이 대목에서 웃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타이태닉 호에서 제법 멀리 있던 캐퍼시아 호 선장은 자다가 통신사로부터 타이태 호가 조난신호를 보냈다는 것을 보고 받고, 30여 년 항해 경력에서 구조는 처음이었지만 매뉴얼대로 철저히 준비하면서 사고 현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대요. 우선 속력을 최대로 높이기 위해 승객의 양해를 얻어 선내 모든 난방을 꺼 배의 속력을 14노트에서 17노트로 올렸답니다. 전속력으로 항해하면서 빙산 충돌을 대비해 전방 견시원을 더 배치했고, 승객 중 생존자를 응급처치하고 도와줄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승무원을 식당과 복도 곳곳에 배치하고, 승객들을 이동시켜 객실을 확보하고 담요, 커피와 따뜻한 물, 수프 등을 준비하고, 복도로 들어오는 모든 문을 열어 놓고, 생존자들이 타고 올라올 줄과 사다리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구명보트를 내렸다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캡틴이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표류하는 구명보트들은 파도가 점점 거칠어지고, 특히 접이식 보트들은 물이 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대요. 구조하러 오는 캐퍼시아 호의 불빛이 보여 생존자들이 환호했고, 모든 생존자를 인양하는 데는 몇 시간이 더 걸렸지. 캐퍼시아 호 선원과 승객들은 생존자들을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녔고 다른 승객들도 옷, 세면도구 등을 빌려주며 적극적으로 도왔다고 해요. 그때 캐퍼시아 호의 선원과 승객은 바다에 20개가 넘는 거대한 빙산과 타이태닉 호의 잔해들이 떠다니는 것을 보았답디다. 오전 8시 반쯤 705번째 마지막 생존자를 구조하고 나서야 다른 배들이 도착했는데 이미 추가 생존자는 발견할 수 없어서 상황 종료였다네. 구조 작업이 막바지였을 때 가장 가까이 있었던 캘리포니아 호가 다가왔는데 그들은 생존자는 물론 단 한 구의 시신도 찾지 못했대요. 캐퍼시아 호에는 타이태 호의 생존자들을 구호할 충분한 의약품과 양식이 없어서 출발지였던 뉴욕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네. 생존자들을 위해 손해와 불편을 감수한 것이고, 승객들 모두 이해해 줬대요."


캡틴도 긴 이야기를 하며 상황이 눈에 보이는 듯 진저리를 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뉴욕으로 돌아가는 항로도, 애초 배 자체가 썩 빠르지 못한 데다 빙산, 폭풍, 안개 등 악천후에다 침몰 사고를 겪은 직후라 조심해서 항해하니 하루면 도착할 거리를 나흘이나 걸려서 뉴욕항에 입항했대요. 뉴욕항은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수만 명의 가족과 인파로 북적였고 취재하려는 기자들도 상당히 많았지만, 로스트론 선장은 생존자들의 휴식과 안정을 위해 기자들에게 취재를 자제할 것을 요구했대요."


"잘못된 보도에서 ‘다른 이들을 제치고 보트에 억지로 타려는 일본인이 있었다.’라는 증언이 퍼지게 되어 유일한 일본인 생존자는 ‘여자와 아이를 우선으로 구한다.’라는 신사도를 무시했고 ‘일본 사무라이들은 전쟁에서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는 둥 귀국하고도 언론 등에서 온갖 욕을 먹고 직장에서도 해고되어 불운하게 생애를 마감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다른 사람을 밀치고 구명정을 탄 동양인은 일본인이 아닌 중국인이라는 게 밝혀졌다네. 일본인이 서 있던 보트 근처에 여자와 어린이가 더 없어 항해사가 2명분의 자리가 아직 남아있어 태웠다는 것이 밝혀져 수십 년 만에 명예를 회복했대요. 호소노 씨는 일본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타이태 호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하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이후에도 오보를 확인하지도 않고 타이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일본인의 민족성 운운하면서 까곤 했다네. 기레기 기자가 애먼 사람 인생을 망친 대표적인 사례라네."




"진정한 사관과 신사 이야기가 있지. 배가 침몰할 때 선장이나 승무원의 통제가 안 먹히는 경우 여성과 특히 어린이들의 생존율이 매우 낮아집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아무래도 젊고 힘센 남성이 구명보트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지. 그러나 타이태 호 사건 때는 승객들에 대한 통제와 선원들이 사관들의 명령에 복종이 잘 됐소. 이는 승객들이 타이태 호 같은 큰 배가 설마 금방 침몰하리란 생각을 못 한 덕에 비교적 여유롭게 행동했고, 구명정이 부족할 거란 생각을 못 했지. 무엇보다 대영제국의 버큰헤드 정신이 살아있었기 때문이었소. 버큰헤드 함은 영국에서 남아공으로 병력과 가족을 수송하다 희망봉 근처에서 암초에 걸려 침몰하면서, 먼저 살기 위해 보트를 타려고 아수라장이 된 혼란을 막기 위해 영국군 지휘관인 알렉산더 세튼 중령은 병력을 집결시켜 단호하게 말했어요. ‘제군들은 들어라. 지금까지 가족들은 우리를 위해 희생해 왔다. 이제 우리가 그들을 위해 희생할 때가 되었다. 어린이와 여자부터 구명보트에 태워라. 대영제국의 군인답게 명예롭게 행동하라!’ 부녀자와 아이 그리고 민간인을 우선 구명정에 태웠고, 장병들은 갑판 위에 부동자세로 도열한 채로 가라앉았다네. 이후 영국에서는 ‘버큰헤드 호를 기억하자.’는 분위기가 일어나 영국 사회정신의 뿌리가 되었어요. 타이태 호의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는 잘잘못을 떠나 그야말로 악조건의 연속이자 총체적 난국에서 승객들을 먼저 구하고 끝까지 배에 남았기에 ‘선장은 배와 운명을 함께 한다.’는 전통이 되었다네."


캡틴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린이와 여자를 먼저 살리기 위해 갑판 위에 부동자세로 도열한 채로 가라앉는 영국군 장교와 장병들 모습을 상상하자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었다. 노 선장님이 젊은 우리에게 사관과 신사 명예와 전통에 관해 말씀하셨다. 머리로만 기억하고 입으로만 이야기하면서 그런 상황에서 나는 과연 버큰헤드 호의 영국군처럼, 타이태 호 선원처럼 절체절명의 순간에 승객들을 구하기 위해 내 한목숨 바칠 수 있을까 곱씹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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