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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Mar 18. 2024

파나마 운하와 고갱



'HAPPY LATIN' 호는 거친 대서양을 헤쳐 나와 잔잔한 카리브해로 접어들었다. 반지의 제왕, 아바타 등의 영화 OST를 부른 감미로운 목소리의 아일랜드 가수 Enya의 노래 '캐리비안 블루'로 많은 사람의 가슴에 카리브 바다와 하늘에 대한 동경을 갖게 했다. 그리고 파란 천연 보석 '라 리마'로도 널리 알려진 아름답고 정말 푸른 카리브. 바다가 얼마나 푸르면 그 속의 돌도 파랗게 변할까? 넋 놓고 카리브 바다를 쳐다보며 항해하다 보니 파나마 운하가 가까워졌다. 운하를 통과하면 유빈 누나가 사는 뻬루의 삐우라를 향해 남미대륙을 왼쪽으로 끼고 항해하게 된다.


어느 나른한 일요일 오후에 사관 식당에서 점심 먹고 커피 한 잔씩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늘 대화를 주도하는 안 선장님.

"곧 파나마 운하를 통과할 텐데 우리는 편하게 항해하지만, 운하를 만들 때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있는 건 잘 알지요? 운하 건설은 스페인 무적함대 시절부터 구상했는데 시작은 프랑스인이 했어요. 그런데 자연과 모기와의 싸움에서 인간이 졌소. 내 사위도 프랑스 사람인데 자기 할아버지 대에 운하 건설에 투자했다가 많이 날렸다고 합디다. 프랑스인들은 파나마에서 공사하면서도 프랑스식으로 살려고 했어요. 집 주위에 정원을 만들고 나무 주위에 개미가 지 말라고 도랑을 파고 물을 넣었으니. 침대에도 벌레가 올라오는 것을 막으려고 침대 다리에 물통을 만들었다지. 옛날 현대 정 회장이 젊었을 때 빈대가 물지 말라고 침대 다리 밑에 물었더니 빈대가 묵고 살려고 천정으로 기어올라가 뛰어내려 피 빠는 것을 보고, 일하는 게 맘에 들지 않는 직원에게 '이 빈대만도 못한 놈아!'라고 했다지. 프랑스인은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오두막에 방충망을 만들어주지 않았어요. 우기가 시작되자 황열병과 말라리아가 돌았지. 게다가 프랑스인들이 파놓은 구덩이가 모기가 번식하기에 좋았던 모양이오. 그렇게 해서 기술자, 노동자가 이만 명 넘게 죽었답디다."


세계 일주에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단독 무착륙 무보급 세계 일주 기록으로는 67시간에 37,000km를 비행한 기록이 있다. 마젤란이 범선 빅토리아호를 타고 세계 일주할 때는 3년이 걸렸다고 한다. 시간이 확 줄어든 때는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쓴 쥘 베른이 당시에 존재하는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 80일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19세기말에 미국인 기자 넬리 블라이가 세계 일주에 도전했는데 때 72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녀는 아메리카와 유럽에서는 증기선과 철도를 이용하고 아시아에서는 말과 당나귀, 인력거와 돛단배를 이용했다. 삼백 년 사이에 세계 일주 시간이 3년에서 10주로 단축되었다.


바다를 횡단하는 데는 여전히 장벽이 있었다. 길이가 무려 만 오천 km에 달하는 아메리카 대륙이었다. 하지만 지름길을 만들 틈새가 있었다. 유럽에서 인도로 갈 때 아프리카를 빙 돌아가야 하는 게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인명 피해가 커 프랑스인 레셉스가 1869년에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를 건설했다. 그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수에즈 운하 대공사를 성공시켰던 영웅이었다. 수에즈 운하를 개통한 지 십여 년 후 그는 파나마를 관통하는 운하 건설권을 땄다. 누구나 이번에도 레셉스가 파나마 운하를 만들 거라고 믿었다. 길이 192km의 수에즈 운하를 만든 그에게 길이 82km의 파나마 운하는 코끼리 비스킷같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은행은 어마어마한 대출을 거절했다. 하지만 레셉스는 프랑스의 영웅이었다. 그는 프랑스인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수많은 프랑스인이 운하 건설 비용에 투자했다.


1880년 레셉스가 세기의 건설을 시작했다. 프랑스 기술자 삼천여 명과 카리브 제도 출신의 흑인 노동자 이만여 명이 공사에 들어갔다. 눈으로 보는 지도와 실제 자연은 많이 다르다. 수에즈 운하의 경우 파야 하는 육지의 제일 높은 데가 해발 16m였다. 그러나 파나마에서는 수면 위 50m 이상인 곳이 8km가 넘었으며 심지어 해발 100m가 는 곳도 있었다.  많은 흙과 암석을 파내는 일은 일찍이 지구 역사에 없었다. 실제 공사에 들어가니 말라리아, 황열병뿐만 아니라 날씨도 큰 영향을 주었다. 수에즈는 사막기후의 영향을 받아 비가 내리는 날이 거의 없었지만, 파나마 지역은 비가 많이 내리는 열대우림 지역이다. 그러다 보니 공사 중에 수시로 홍수와 산사태가 발생했다. 레셉스는 여기에 대한 경험이 없어 방비를 하지 않아 공사하던 것들이 홍수로 떠내려가기도 했다. 수많은 인부가 죽고 레셉스는 파산했으며 수만 명의 프랑스인이 투자금을 날렸다.


1904년 미국이 운하 건설권따내 다시 시작했다. 미국은 프랑스의 실패를 거울삼아 철저히 준비했다. 가장 적은 비용을 들이고 대공사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날씨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은 먼저 정확한 날씨 예보를 위해 기상관측 인원을 늘렸다. 또 호우가 예상되면 미리미리 대비했다. 여기에 미 육군 공병대는 대대적으로 모기 방역을 했다. 이제 홍수나 산사태, 말라리아로 인한 인부 사망이 줄었다. 미국은 레셉스가 수에즈 운하를 만들 때 썼던 수평 운하 방식에서 갑문식 운하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때까지 파나마란 나라가 없었고 땅 주인인 콜롬비아가 파나마 운하 공사에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미국은 파나마 원주민을 꼬드겨 반란을 지원해 독립시켰다. 당시에 새로운 건축자재인 콘크리트가 나왔다. 무엇보다 운하 구조를 수평식에서 갑문식으로 변경한 게 효율적이었다. 땅을 무턱대고 파내는 대신, 강을 둑으로 막아 해수면보다 26m 높은 인공호수를 건설하여 갑문을 통해 인공호수로 배를 띄웠다가 반대편에서 다시 갑문을 통해 선박을 해수면으로 내려놓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자연환경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식이라, 작업도 상대적으로 쉬웠고 비용도 절약되었다. 마침내 1914년 태평양과 대서양에 뱃길이 뚫어졌다. 덕분에 파나마는 사실상 미국의 지배에 들어간다. 그리고 파나마 운하를 발판으로 미국은 세계 경제의 주역으로 부상한다. 파나마는 2000년에야 파나마 운하 운영권을 갖게 됐다.


파나마운하는 물길 중간에 여러 갑문을 설치해 물을 채우고 빼면서 배를 계단식으로 통과시킨다. 운하를 통과하는 데 8시간 정도 걸리는데, 대기 시간 등을 합치면 하루 이상 걸린다. 갑문을 통과할 때는 수로 양옆에서 예인 전동차가 끌고 터그보트가 밀어준다. 파나마운하가 해상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보니 많은 배가 여기에 맞춰 만들어졌다. 길이 295m, 너비 32m 등 파나마 갑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든 최대 크기 배를 'Panamax'라 한다. 통행료는 선박 종류 등에 따라 다르지만, 파나맥스급은 약 20만 달러라고 한다.


캡틴의 이야기가 계속됐다.

"그런데 말이지 파나마 운하 공사장에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 폴 고갱도 있었대요. 당시 고갱이 아내에게 쓴 편지를 보면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이 악몽처럼 묘사돼 있어요. '나는 아침 5시부터 저녁 6시까지 열대의 태양 아래 또는 빗속에서 땅을 파야 했소. 밤이면 모기들한테 뜯겼지.' 그의 나이 39살 때였어요. 다섯 명의 자녀를 뒀으나, 빈털터리였지. 그는 파나마 운하 건설 공사판에서 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떠났다요. 그는 먹고살기 위해 배도 탔어요. 우리 마도로스 선배라는 말이야."


잠시 쉬었다가 캡틴이 물었다.

"학생 때 '달과 6펜스'를 쓴 '서머셋 모옴' 이름은 들어봤겠지요? 그는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간결하고 논리 정연하게 써서 읽기 편하고 이해하기 쉬워요. 서머셋 모옴은 무명시절 자신의 책이 팔리지 않자, 신문에 광고를 냈대요. 젊은 백만장자가 서머셋 모옴의 소설 주인공 은 여성을 찾는다고 말이지. 이 광고가 나가고 어떻게 됐겠소?"

마침 일항사가 입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얼른 대답했다.

"아~ 거, 노벨상은 안 받겠다 하고 나중에 상금만 달라고 해서 거절당한 작가 이야기 아닙니까?"

"에이,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그건 사르트르 이야기고."

"하하하~ 그럼 당근 작가가 사기 쳤다고 아가씨들한테 머리 쥐어뜯기고 했겠죠. 어디선가 늙은 작가 사진 보니 머리가 반쯤 없던데요."

"푸하하~ 애고, 잘 나왔소. 늙어서 머리 빠진 거와 뭔 상관인데, 암튼 둘러 붙이긴... 책이 품귀되고 난리 났지. 그런데 소설이 재미있거든. 그래서 서머셋 모옴은 유명한 작가가 됐지."


1917년, 한 영국인 작가가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에 다. 10여 년 전 이 섬에서 죽은 한 화가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작가는 전에 파리에 들렀을 때 우연히 그 화가의 작품과 비극적 생애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화가의 흔치 않은 삶을 소설로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타히티 섬을 찾아온 작가는 깜짝 놀랐다. 그곳의 아름다운 풍경과 현지인들의 원시적 생활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난을 피해 고국을 떠나온 화가는 말년에 병에 시달리며 자신의 그림을 일용할 양식바꿔 먹었다고 한다. 마을의 구멍가게 주인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화가의 데생을 포장지나 화장실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단다. 또 화가가 그려준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 처박아놓고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도 있고, 그림 선물을 코웃음을 치며 거절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취재 여행을 마친 작가는 화가가 머물렀던 오두막 문짝에 그린 그림을 헐값에 사 영국으로 가져갔다. 그 그림은 그 당시 경매에서 거액인 만 달러 넘게 낙찰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4년 뒤 작가는 '달과 6펜스'라는 작품을 발표해 대박을 다고 한다. 작가의 이름은 바로 서머셋 모옴. 그가 타히티섬에서 흔적을 찾아 헤맸던 화가는 다름 아닌 자기 귀를 자른 화가 고흐의 친구 폴 고갱이었다. 고갱의 삶은 물질과 탐욕에 찌든 문명사회에 물들지 않은 원초적인 인간성과 뜨거운 열정이라고 한다. 독특하고 과감한 색채가 돋보이는 그의 작품은 평론가와 관람자의 관심을 끌고 피카소를 비롯한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했다.

"과감하긴 하지만 새롭지는 않다."

전시회에 대한 평론가의 말에 고갱은 단호하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뭐가 어떻단 말인가? 미술은 표절 아니면 혁명이다."


가난과 고독, 질병에 시달리다 죽은 고갱의 작품에 얼마 후 프랑스 미술계는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의 삶과 열정 그리고 독특한 예술 세계를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고갱은 생전에 그런 영광을 한 번도 겪지 못하고 병들어 쫄쫄 다가 죽었다고 다. 이러한 인생사를 볼 때 '살아서 술 한 잔이 낫지 죽어 신문에 나오고 떼돈을 면 뭐 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게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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